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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그니 Oct 13. 2018

호빵맨, 5등 인생을 살아도 괜찮아

호빵맨 작가 야나세 다카시가 전하는 인생을 사는 법 

태어나서 딱 한 번 호빵맨을 봤다. 오래전 아르바이트를 했던 회사에서. 아이들이 보낸 편지의 봉투에 적힌 주소를, 컴퓨터 프로그램에 입력하는 일이었다. 지루한 일이라 졸음을 참으며 겨우 일하고 있는데, 한 단아한 여성이 내가 일하던 회의실로 조용히 들어오더니, 모니터를 켜고 호빵맨을 틀었다. 뭘까해서 흘깃 보니, 세균맨의 입모양에 맞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성우가 녹음 전에 연습했던 걸까?


알바는 사흘 만에 잘렸다. 일주일을 계약하고 갔는데, 일이 지루해 간단한 매크로를 짜서 돌렸더니 사흘 만에 끝났다. 원래 그 일을 했던 신입사원은 '일을 참 잘하시네요'라고 말하며 사흘 치 일당을 주고 내일부턴 올 필요 없다고 했다. 내가 일을 잘했더니 내 수입은 줄고 회사는 돈과 시간을 절약했다. 거참,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그래도 나는 이래저래 삶을 살아왔다.
'오늘 하루 살아남았으니까, 내일도 어떻게든 살아보자'라고 생각했다. 

- 네, 호빵맨입니다 중에서



호빵맨을 다시 만난 건 한참이 지난 다음이다. 히로시마로 떠나며 미술관 스케줄을 체크했는데, 히로시마 미술관에서 호빵맨 원작자 '야나세 다카시'전을 열고 있었다. 시간 되면 가야지-하고 생각했는데, 히로시마 성으로 가는 중에 갑자기 '여기가 히로시마 미술관이야!'라고 소리치듯 내 눈 앞에 나타났다. 이 전시가 다른 미술관에서 열리는 걸로 착각하고 있었단 걸, 그때야 알았다(히로시마에는 히로시마 미술관, 히로시마 현대 미술관, 히로시마 현립 미술관...-_-; 이 있다.).


전시를 둘러보는데, 생각과 많이 다르다.  한쪽에는 르네 마그리트 같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그림들이 가득하다. 다른 한쪽에는 옛날 만화가 있고, 또 다른 쪽에는 뭔가 따뜻하지만 슬픈 동화가 있다. 그냥 일러스트 전시회에 온 기분이랄까. 따뜻하고, 꿈을 꾸지만, 슬프다. 전시 여운이 남아 집에 돌아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야나세 다카시 아저씨가 쓴 에세이, '네, 호빵맨입니다!'다.


 

시간은 빨리 흐르고/ 빛나는 별은 사라져
그러니까 너는 가는 거야 / 웃음을 지으며

- 호빵맨 행진곡 중에서



같은 말도 누가 하는 가에 따라 울림이 다르다. 말년에 호빵맨이 큰 인기를 얻긴 했지만, 야나세 다카시 할아버지의 삶은 쉽지 않은 일들로 가득했다. 어릴 적에 부모와 헤어져 양자로 들어가고, 몸은 약해, 기껏 공예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했더니 군에 징집, 이십 대의 태반은 전쟁터에서 보냈지만 전장에선 기다리고 있던 건 굶주림과 강행군, 그 와중에 똑똑했던 동생은 먼저 죽고, 돌아와서 그림 일을 다시 시작했지만 작품은 팔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불러서 일을 도와주는 것이 전부. 다만 그 와중에 자신이 펴낸 '시집'이 인기를 얻고, '시와 메르헨'이란 잡지 편집장을 맡으면 어떻게 그냥저냥 살아왔다. 


... 말 그래도, 그냥저냥 살아왔다. 천천히, 가늘고 길게, 인생은 마라톤이니까.



나는 4등이나  5등이라는 위치를 유지한 채로 오랫동안 일하고 싶었다. 정상에 오른 자를 기다리는 것은 내려오는 일 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인지 동업자에게 경쟁의식도 별로 느끼지 않았고, 자주 어울리며 허물없이 지냈다. 이성 친구도 많았다. 이성은 좋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부분을 가지고 있다. 술은 마실 줄 모르고, 도박에는 손대지 않는다. 놀 줄 모르는 어설픈 인간이지만, 어쨌든 즐겁게 살아왔다.

- 네, 호빵맨입니다 중에서




사실 이 책에 담긴 내용은, 전쟁에 대한 철저한 증오나, 굶주림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빼면, 흔한 산전수전 다 겪은 할아버지의 충고일지도 모른다. 그는 비틀린 역사 속을 버텨내면서, 세상에 떠도는 '큰 이야기' 안에 담긴 거짓을 뼈저리게 알았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특별히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지도, 사랑받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그는, 재능이 많지 않다는 것, 자신이 어쩌면 2류... 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인정한다. 


특별한 의지를 가지지도 않았다. 어쨌든 오늘도 살았으니까 내일도 버텨보자-라는 마음으로, 어쨌든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아갔다. 다만 그는, 자신이 하고픈 일을 선택했다. 좋아하는 일을 찾고, 자기 일이니 자기가 책임졌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했다. '시와 메르헨' 도 자기가 만들고 싶은 잡지가 있으니 만들게 해달라고 해서 만들었다. 



재능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천천히, 그 대신 오랜 시간 쉬지 않고 달리는 방법을 고르면 된다....  좋아한다는 마음 하나로 오늘날까지 제법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좋아하는 일이라면 오래도록 끊임없이 파고드는 것도 그다지 괴롭지 않다. 즐기는 사이, 무언가를 붙잡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책에 담긴 메시지는 촌스럽다.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열심히 해라. 야나세 다카시가 하니까, 그럴지도 모르겠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우리는 안다. 그렇게 매달려봐야 겨우 '무언가 하나' 밖에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 (당연히) 잘 살 수 있는 세상은 없다. 배고플 수도 있는데, 이제와 그런 인생 살고 싶은 사람, 별로 없다. 솔직히 그렇게 살면 못 사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럴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세상이 깔아놓은 안전선 안에 머물게 만든다.


하지만... 어차피 별 볼일 없는 인생이라면, 그렇게 살아도 나쁘지는 않지 않을까? 


사실 어렵다. 야나세 다카시가 던진 메시지는, 결국 (넓은 의미로) '크리에이터'가 되라는 말이니까. 사람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일을 가장 좋아한다고 이 할아버지는 말한다. 그가 말하는 '좋아하는 일'은 '내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일'이다.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일,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일, 좋은 물건을 생산하는 일... 등등. 생각하면, 정말 할 수 있는 일은 많지만. 


재능이 없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가늘고 길게, 어떻게든 먹고살면서 끝까지 가는 삶. 야나세 다카시는 운 좋게(?) 그런 삶을 살았다. 나는 어렵겠다-싶지만,  최소한, 읽고 시간을 버렸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글을 쓰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매일 같이 살다 보면, 언젠가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글도 쓰는 날이 오긴 오겠지...라는 바람을 가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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