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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예쁜 옷을 입고,
널 만나러 갈게

나른한 백일야화 #3

by 자그니

무서워-라고 겨울밤에 입김을 불듯 그녀가 말한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냐고 무심하게 돌아본다. 톱에 베여 밑동만 남은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이 나무, 늘 이 자리에 있었잖아-라고 그녀가 말을 잇는다. 그런데?라고 내가 대답한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그걸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라고 그녀가 말한다. 아아, 그랬었나-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그녀가 움찔거리는 것을 본다. 그리고 내뱉듯, 싫어-라고 말한다.


이 따위 삶, 정말 싫어-.


눈물이 보이지 않는 눈물. 하나 아프지 않을 것 같던 슬픔. 차가워 차갑지 않은 눈송이와, 헤어져도 헤어진 것 같지 않았던 이별.






우리는 아무 데나 주저앉는 것에 익숙해진 연인이었다. 무작정 걷다가 피곤하면 벤치에 드러누워 버리고, 그러다가 다시 걷고, 그렇게 하루 종일 둘이서 재잘대며 떠드는 것에 익숙해진.


배가 고프면 근처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을 사가지고 나와 먹었다. 멀게 햇살이 드리워지던 길거리의 화단, 사람들의 물결이 흐르던 거리. 꽉 막힌 차도와 끝없이 늘어선 차들. 그 곳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입을 맞추고, 커피를 마시다 입을 맞추고, 담배를 피우다가 입을 맞추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거리.

맞잡은 손을 놓치기 싫어 꼭 잡고 있었던 거리.






고운 미소로 곱게 두 손을 모으고 곱게 그녀가 울던 날. 그렇게 곱게 내게 이별을 말하던 날.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항상 차이면서도, 이별할 때마다 달래 주는 것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당신을 만날 수 있었으니 좋았다고. 당신 탓이 아니라고.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삶을 사랑하는 당신, 사람을 사랑하는 당신,

이별에조차 예의를 차려 대할 줄 아는 당신을.

살아가는 모든 것을 곱디 고운 것으로 만들 줄 아는 당신을.






당신과 헤어지고 나서 나는, 한참을 무서워 벌벌 떨면서 살아야 했다. 그런 날이 찾아올까 봐, 내가 당신을 잊는 날이 찾아올까 봐. 삶이 지독하게 길어져, 당신의 이름마저 잊어버릴 때가 올까 봐. 홍대 한 복판 낡은 벤치에 앉아 선글라스를 끼고 편의점에서 사 온 김밥을 먹던 시절을 지나, 내 기억이 사라져버릴 지도 모를 언젠가에 대한 두려움.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나는 지금까지 살아왔다. 막막함으로 점철되었던 이십 대도 벌써 저만큼 까지 흘러가버렸다. 어제는 당신이 선물해줬던 CD를 찾았다. 떨어진 펜을 찾기 위해 손을 넣었던 책장 밑에서, 상처가 가득한 모습으로 구석에 누워있던 CD를.


나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다, 당신을 잊어버린 것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지나가 버린 줄 알았던 슬픔이 눈앞을 막아서서 고개를 갸우뚱한다.






만나지 못하는 당신. 이젠 만날 수도 없는 당신. 하지만 이미 알아버린 탓에 잊을 수는 없는 당신. 멀리 있어도 사랑할 수 있을 줄 믿었다. 나는 변하지 않을 거라고, 당신이 있어서 내가 살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어쩌면 좋을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수만 가지인데 보이는 것은 슬픔뿐이다. 사랑했다 믿었던 것들에게서 나는 너무 멀리 떠나와 버렸다.


그래도 나, 이렇게 만나지는 기억과 두려움과 슬픔이 있어,

저기 저기, 당신이 보여줬던 미소와 함께 먹던 김밥이 있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당신과 함께 했던 순간이 있어서.

당신과 함께 했던 이야기가 있어서.




* 정준일의 노래 좋은 날(두 번째 스무 살 OST)을 들으며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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