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테크라는 것이 있습니다
비건은 채식주의자 중에서도 고기, 생선, 유제품 같은 동물에서 얻은 식자재나 그걸로 만든 요리를 전혀 먹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한다. 요즘엔 그냥 채식주의자를 지칭하는 말로 쓰고 있기도 하다. 특정 식습관을 가진 사람을 따로 이름 지어 부르는 이유는, 비건이 단순히 채식을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기를 선택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 비건은 취향이 아니라 태도다. 건강이나 미용을 위해 채식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들은 보다 생명을 존중하고 윤리적으로 소비하는 삶을 살려고 한다.
이런 비건이 가진 삶의 태도를 비거니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런 삶을 지원하는 기술이 비건 테크(vegan tech)다. 비건이 살아가면서 불편한 점을 보완하거나, 비거니즘을 받아들여 동물을 착취하거나 학대하지 않고 제품을 만드는 기술을 말한다.
크게는 동물 재료를 사용하는 음식과 피복 재료의 대안을 찾는 일로 나뉜다. 그 밖에 동물성 성분을 이용한 제품 원료를 바꾸거나, 제품 개발 과정에서 동물 테스트를 진행하지 않거나, 관련 커뮤니티를 만들어 사람들을 연결하거나, 비건 사업을 돕거나, 가축 관련 법과 정책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일까지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비건이 식습관 때문에 붙은 이름인 만큼, 비건 테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분야는 대체 식품이다. 대체 고기로 등장한 임파서블 버거가 인기를 얻은 다음, 흔히 볼 수 있는 햄버거 체인점에서도 (나름) 쉽게 맛볼 수 있게 됐다. 예전 콩으로 만든 대체육(콩고기)과는 다르게, 꽤 진짜 고기 맛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평가를 받은 탓이다.
햄버거뿐만 아니라 커피 체인점에서 파는 파니니나 샌드위치 같은 먹거리, 간식, 면 요리 등 고기 맛을 내는 여러 요리에 쓰인다. 콩고기를 비롯한 관련 기술이 예전부터 존재했기에,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코로나19도 대체육 보급에 큰 역할을 했다. 먼저 코로나로 인해 소비자들이 환경과 건강식품에 관한 관심이 늘었다. 전통 육가공 업체들이 직원 코로나 감염으로 인해 공장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이로 인해 육류 가격이 오르면서, 대체육으로 만든 제품 인기가 높아지기도 했다.
실제로 대체육 시장은 2017년~2019년까지 38% 성장했지만, 2020년 3월에는 전년 대비 231% 늘었고, 이후 계속 세 자리대 성장률을 유지했다. 물론 그전에 가축 사육으로 인한 환경오염, 동물복지 같은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공감대가 커지고 있기도 했다.
대체육을 만드는 기술은 크게 두 가지다. 콩 단백질이나 글루텐으로 만든 식물성 고기와 세포를 배양해 만드는 배양육으로 나뉜다. 식물육으로 잘 알려진 비욘드미트는 완두콩 단백질을 주재료로, 비트 주스로 붉은 피를 흉내 내고, 야자유로 육즙을 대신했다고 알려졌다.
임파서블 푸드 역시 식물성 고기를 만든다. 대두 뿌리에서 육류 피 맛을 내는 헴(Heme)을 추출해, 쇠고기의 맛과 풍미를 재현해서 유명해졌다. 그 밖에 미생물이나 해조류를 이용해 만드는 대체 고기도 존재하며, 고기가 아니라 지방 맛을 내기 위한 연구도 진행 중이다.
배양육은 동물로부터 세포나 조직을 채취해, 그걸 배양해서 근육 섬유를 만들고, 근육 섬유를 가공해 고기로 만드는 기술을 사용한다. 영화 ‘설국열차’ 원작에서 열차 탑승자들에게 음식 재료를 공급하던 장치가 바로 배양육 생성기다.
실제로 지난 2021년 8월 일본 오사카대 연구팀은 근육과 지방, 혈관을 모두 갖춘 와규 배양육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배양육 제조에 3D프린팅 기술을 더했다는 것이다. 배양육을 성장시킨 다음, 진짜 고기처럼 마블링을 프린팅 하면 진짜와 비슷한 식감을 가진 고기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아직 생산 비용이 많이 들어 상용화되진 못했지만, 생산 공장도 짓고 있다고 는 만큼, 곧 배양육을 만날 가능성이 커졌다.
대체육이 잘 알려졌지만, 대체 음식은 고기만 있지 않다. 대체 해산물 분야도 떠오르고 있다. 스페인 미믹 시푸드 사에선 토마토를 이용해 초밥용 참치 회를 만들었다.
조류와 완두콩 단백질을 써서 훈제연어를 만든 회사도 있다. 미국 Sophie’s Kitchen은 각종 식물 기반 해산물로 유명한 브랜드다. 생선 필레, 새우, 게 케이크, 참치 통조림을 식물성 재료로 만든다.
버터나 치즈, 유제품을 대체하는 식물성 식품은 이미 여럿 나왔고, 동물 없이 만든 달걀흰자도 출시됐고, 비건 스팸도 연구 중이다.
식자재 말고 동물성 재료를 많이 쓰는 곳은 어딜까? 패션이다. 동물을 도축하면서 얻는 가죽 같은 부산물을, 인류는 예전부터 의복 등으로 썼다. 때론 가죽을 얻기 위해 많은 동물을 도살한다. 비건 레더는 이런 기존 시스템에 반기를 들기 위해 제안된 인조 가죽이다.
논쟁적인 부분은 있다. 폴리우레탄이나 폴리염화비닐 같은 플라스틱 계열 소재로 만든 인조 가죽은 비건 레더를 어떻게 정의하는 가에 따라 포함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다.
지속가능성이란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인조 가죽을 비건 레더라고 부르지 않는 편이다. 식물성 가죽은 파인애플 잎, 코르크, 선인장, 사과 껍질 같은 과일 폐기물로 만든다. 경계가 모호하지만, 재활용 플라스틱 소재 인조 가죽이 비건 가죽에 포함되기도 한다.
비건 가죽으로 만들어지는 제품은 정말 다양하다. 운동화부터 시작해 부츠, 핸드백, 의류, 자동차 시트커버까지 가죽으로 만들었던 건 대부분 대체할 수 있다.
요즘엔 BMW, 벤츠, 페라리 같은 고급 차들이 비건 가죽 시트를 선택할 수 있게 되면서 고급품으로 대접받고 있기도 하다. 구찌의 비건 레더 데메트라(Demetra)나 에르메스의 비건 레더 빅토리아 백, 벤츠의 아티코(Artico)등이 그런 사례다. 테슬라 모델 3처럼, 아예 가죽을 쓰지 않는 방법도 있다.
다만 비건 레더의 내구성에 대해선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비건 레더가 진짜 가죽 정도의 내구성을 갖출 수 있는지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그 밖에도 비건을 지원하기 위한 기술은 여러 가지다. 예를 들어 동물 실험을 하지 않고, 친환경 성분만 사용하는 비건 화장품은 대세로 떠오르고 있다. 2021년 7월 독일 BASF와 향수 기업 지보단(Givaudan)은 동물 실험 없는 독극물 테스트 전략을 만들어 OECD의 승인을 받았다.
존스 홉킨스 대학교 동물 실험 대체 연구 센터에서는 코로나19 치료제 및 백신 개발 시, 동물 실험을 대체할 방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농촌진흥청에서 개발한 소의 장을 본뜬 미니 장기를 이용하면 동물 질병 연구에 동물 실험을 줄일 수 있다. 동물 기반 원료 등을 없애려는 연구도 이어진다. 해양과학기술원에서 찾은 조류 기반 소태아혈청 대체 소재를 쓰면 세포 배양에 쓰이는 소태아혈청 사용을 줄일 수 있다.
쉽게 만날 수 있는 비건 서비스도 많이 생겼다. 덕분에 채식주의 음식 재료나 음식을 구하기도 점점 쉬워지는 편이다, 국내 비건 포털 사이트 비거닝에서는, 비건 관련 제품들을 받아볼 수 있는 정기 구독 서비스를 제공한다.
스마트폰 앱은 어떨까? 비건 레스토랑 정보 서비스 해피카우(HappyCow)에서 제공하는 Vegan Food Near You 앱을 쓰면, 근처 비건 식당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한국 비건 식당 목록도 제공한다.
Vegan Pocket - Is it Vegan? 은 식품, 화장품, 의류 제품 바코드를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으면, 어떤 성분으로 만들었는지 알려준다. 유료이고 한국 지역은 지원 안 하는 게 흠이다.
칠레 Notco에서 만든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조금 독특한 사례다. 주세페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알고리즘은, 식물 성분 리스트를 활용해 특정 식품 속성을 재현할 수 있는 조합 방법을 찾아낸다.
꼭 비건이 아니어도 알아두면 좋은 서비스도 있다. 오픈 푸드 팩트다. 전 세계 식품 데이터를 정리한, 무료 온라인 크라우드 소싱 데이터베이스 사이트로, 2019년 10월 기준 141개국 100만 개 이상 제품이 등록되어 있다. 다만 한국이나 일본 같은 아시아권 음식 정보는 많지 않다.
비건 테크 관련 기업과 제품은 계속 늘고 있다. 비건이나 채식주의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어서다. 가디언에 따르면 전 세계 채식주의자 수는 약 7,900만 명에 달한다(추정치). 2020년 영국 내 채식 주문은 163% 증가했다.
비건 푸드 시장은 2026년까지 약 243억 달러, 비건 화장품 시장은 208억 달러 규모에 달하리라 여겨진다. 많은 사람이 갑자기 고기나 유제품을 당장 포기할 일은 없겠지만, 건강한 먹거리나 가치 있는 소비를 하고 싶은 사람은 많다. 특히 2030 세대의 선호도가 높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채식주의자가 되는 사람은 드물다. 채식에 적당한 식당, 비건을 존중하는 물건을 알아내는 일부터 시작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끼치는 영향까지 어느 하나 쉬운 일은 없다.
비건 테크가 하는 일은 결국, 이런 세계에서 비건과 일상 세계의 마찰을 줄이는 일이다. 고기를 포기하기보다 식물성 대체육을 먹게 하고, 예쁜 옷을 포기하기보다 그만큼 괜찮은 옷을 입을 방법을 찾는다. 동물 실험은 포기해도 안전한 화장품을 만들 방법도 찾아야 한다.
이런 일이 때로는 ‘이게 진짜 비건이 맞는가?’라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비건의 역사를 살펴보면, 처음부터 비슷한 논쟁은 항상 있었다. 달걀은 먹어도 되는가, 생선은 먹어도 되는가-라는 식으로 시작한 논쟁이.
논쟁과 상관없이, 비건 테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기후 위기는 우리가 앞으로 예전과 같은 시스템으로 살 수는 없다고,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건 테크는 비건과 일상 세계의 마찰을 줄여, 다른 삶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게 해 준다. 그 삶은 어쩌면, 기후 위기 시대에 인류가 적응하는 과정이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