펨테크(FemTech)를 소개합니다
‘골반장기탈출증’이란 병이 있다. 출산을 경험한 50대 이상 여성 10명 중 3명 꼴로 발병하는 질환으로, 자궁이나 방광 같은 장기들이 질을 통해 내려오는 문제다. 이만큼 많은 사람이 겪는 일이면 미리 사회적 예방 교육 및 조치가 이뤄져야 하지만, 이 병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도 드물다. 입에 올리기 어려운 부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그렇다.
답답한 현실에 화난 사업가가 있다. 엘비(Elvie)의 창업자 타니아 볼러다. 간단히 예방 훈련을 하면 환자를 줄일 수 있는 데 왜 다들 가만히 있는 걸까? 그래서 골반장기탈출증을 예방하도록 돕는 골반 근육 운동기를 만들었다. 이 제품을 이용하면 골반기저근을 단련할 수 있고, 출산 후 빠른 회복을 돕는다. 영국에선 국가 보건 의료 서비스(NHS)를 통해 무료로 쓸 수 있다.
이렇게 여성 건강에 도움을 주는 기술이나 제품을 ‘펨테크(femtech)’라고 부른다. Female(여성)과 Technology(테크놀로지)를 합친 말이다. 처음 말한 사람은 아이다 틴. 생리/배란 주기 추적 앱 ‘클루(Clue)’ 를 만든 사업가다. 여성 건강을 다루는 기술 분야가 떠오르고 있으니, 여기에 관심과 투자가 필요하다고 얘기하려고 만들었다.
매일 수많은 신조어가 만들어지지만, 계속 쓰이는 단어는 적다. 어떤 단어가 받아들여 진다는 건, 그 단어를 쓸 장소가 생겼다는 말이다. 펨테크는 어떨까? 이 말이 등장한 후 여성 건강 관련 기술이 신규 투자 분야로 인식되면서, 관련 기업이 늘기 시작했다. 언론에서 다루는 횟수도 많아졌다. 움직임이 커지면서, 2021년 4월 뉴욕타임즈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Is ‘Femtech’ the Next Big Thing in Health Care?(펨테크가 헬스케어의 다음 대세일까?)”
기사는 이렇게 끝난다. 프랑스 펨테크 기업 CEO 줄리엔 파옌의 말을 빌리긴 했지만, “펨테크는 확실히 성장할 준비가 됐다(Femtech is clearly poised to grow)”고.
실제로 글로벌 컨설팅 회사 맥킨지에서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펨테크 산업은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2008년에는 십 여개에 불과했던 신규 펨테크 회사가 2017년 즈음엔 백 여개로 늘었다. 투자금액도 커져서, 2021년에는 25억달러(약 3조 1500 억원)에 달했다. 여성 건강관리 전문 스타트업 메이븐 클리닉은 1억 1천만 달러의 투자를 받아 펨테크 최초 유니콘 기업이 되기도 했다.
전체 시장 규모는 작지만 성장세가 무섭다고 해야할까. 성장세는 무서운 데,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39억 여성이 살고 있는 지구에서, 왜 이제야 펨테크가 각광을 받는걸까? 평균 수명이 긴 탓에 평생 쓰는 의료비도 남자보다 많은데, 왜 이제야? 간단히 말하면, 그동안 전통적인 기술 산업은 남성 중심 제품 디자인과 앱, 투자자가 지배했던 탓이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 피치북에서는 사회 문화적으로 월경 같은 여성의 신체 현상에 대한 문화적 금기가 있음을 지적한다. 남성 투자자들은 이런 단어나 관련 기업에 대해 논의하기조차 꺼려했다. 솔직히 말해 이 글을 쓰면서도 특정 단어를 적는 것이 많이 낯설다. 지금도 이런 금기가 깨졌다고 말하기는 이르다.
다만 일하는 여성이 늘면서 분위기는 바뀌고 있다. 맞벌이 가정이 보편화되고, 여성 직장인 및 CEO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여성의 구매력이 늘었고, 이들의 요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여성 건강 문제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이를 공개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기도 하다.
다른 한 편, 최근 펨테크 붐은 여성 인재가 필요한 기업들이 이끌고 있다. 심리 상담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회사가 늘어난 것처럼, 이들은 펨테크를 통해 여성 인재가 이탈하지 않기를 바란다. 다시 말해 회사 예산에 펨테크 관련 예산을 책정하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라가기 마련이다.
마지막으로 스마트폰 보급으로 인해 기술 산업이 빠르게 발전했고, 이로 인해 여성 건강을 관리할 수 있는 관련 기술이 마련됐기 때문이란 의견도 있다. 많은 펨테크 앱이 2010년대 초반, 스마트폰 앱 붐이 일 때 만들어진 건 사실이다. 선진국에서 일반화되고 있는 고령화/ 만혼/ 비혼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이라고 보고 있기도 하다.
펨테크는 주로 어떤 분야에서 쓰일까? ‘여성 건강을 위한 기술’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 펨테크로 볼 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피치북에선 여성 생애 주기에서 의료적 필요를 해결하는 제품과 서비스만 펨테크로 분류한다. 디지털 헬스케어의 하위 카테고리로 생각해서 그렇다. 반면 다른 글로벌 조사 기관의 보고서에는 웨어러블 장치 등을 추가해서 시장 규모를 부풀리기도 한다.
미디어에서 언급하는 펨테크 범위는 좀 더 유연하다. 의료 제품이나 서비스를 비롯해, 여성용 콘돔이나 생리 시기 입는 바지, 천연 성분 화장품, 성지식 제공 플랫폼 같은 걸 다 포함한다. 범위는 굉장히 넓지만 투자를 받는 회사들은 주로 두 가지로 나뉜다. 맥킨지에 따르면 지원 서비스는 주로 불임 같은 임신 관련 회사가 많고, 제품은 월경과 관련된 제품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미국 카인드바디(Kindbody)는 밀레니얼 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불임 치료 클리닉이다. 노란 팝업 트럭을 이용해 홍보를 진행하며, 임신 가능성 검사를 비롯해 난자 동결을 할 수 있는 플랜을 제공한다. 직장 내 직원 지원 프로그램을 비롯해 산전 산후 지원 프로그램도 있다.
앞서 소개한 클루는 월경전 증후군(PMS)을 예측하고 추적할 수 있는 앱이고, 코라(Cora)는 월경 주기에 맞춰 매달 생리 용품을 보내주는 서비스다. 생리컵은 이미 다양하게 판매되고 있고, 유니클로에서도 2021년부터 여성용 케어 속옷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 밖에도 최근 주목받고 있는 분야로는 갱년기 신체 변화를 지원하는 제품들이 있다.
이는 이용자의 실제 요구와도 일치한다. 일본에서 실시된 펨테크 관련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많이 쓰는 펨테크 서비스는 월경 관련 고민을 푸는 서비스였다. 생활 습관이나 체형 관리, 갱년기, 유방암 같은 질환 및 임신에 대한 고민이 뒤를 이었다. 아직 쓰는 이는 적지만, 펨테크에 대한 기대치가 꽤 높은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가능성은 크지만 아직 시장 초기라는 걸 잊으면 안된다. 기본적으론 디지털 의료에 해당하는 산업이라고 넘어야 할 규제가 많다. 실제 효과가 있는 지 검증 안된 앱이나 서비스, 제품도 꽤 많다. 디지털 헬스 인증 기관 ORCHA는 펨테크 앱의 20%만이 신뢰할 수 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민감한 정보를 다루면서 개인 정보 보호에 미흡하다는 지적도 있다. 기술 산업에 만연한, 투자와 마케팅을 위한 과장된 홍보는 이 분야도 마찬가지다.
조심스럽게 지켜볼 필요가 있지만, 가능성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점점 스스로 신체 데이터를 수집, 분석, 관리하는 세계에 다가가고 있다. 기술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사라졌다. 이런 시대에, 펨테크는 삶을 보다 즐겁게 바꿀 가능성을 품고 있다. 우리는 기술을 이용해 내 몸을 좀 더 잘 알고, 사랑할 자격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