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을 빚다
비 온 뒤라 그런지 아침부터 바람이 거세다.
"제주 바람치고는 이 정도는 약한 거예요."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떠나는 여행자에게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은 말한다. 하루 더 머물면서 어느새 정이 들었는지 오고 가는 작별 인사에 아쉬움이 밴다.
올레길 4코스 시작점에 위치한 안내센터부터 들러 뒤늦게 올레 패스포트를 산다. 센터 직원은 간단하게 올레길 표식 및 관련 앱을 소개한 뒤, 아침에 직접 만들었다며 감귤과 블루베리 잼이 발린 샌드위치 조각을 권한다. 19km의 노정을 앞두고 급한 마음에 엉덩이를 들썩이니 가는 길에 먹으라며 샌드위치와 직접 재배했다는 무 몇 조각을 싸준다. 그러고는 문 앞까지 나와 주먹을 불끈 쥐고 "화이팅!" 하고 외치며 환하게 웃는다. 완벽한 하루가 시작된다.
왼편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바다는 트레커의 발길을 따라 빛의 스펙트럼과 색의 농도만 달리할 뿐 빛이 흩뿌려진 푸른 낯빛으로 가만가만 일렁인다. 바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잦아들고 등을 데우던 태양은 왼쪽 뺨을 달구기 시작한다. 50~100m마다 나뭇가지, 돌담 등에 매달려 흔들리는 파랑과 주황의 올레길 리본은 길눈 어두운 여행자에게 최고의 내비게이터다. 삶에 이러한 안내자 하나 있다면 어떨까, 무심히 생각해 본다. 무한한 자유로움 속에서 가끔은 길을 잃기도, 아주 가끔은 지쳐서 그저 누군가의 손에 이끌리고 싶을 때도 있기에. 생각해 보니 오래전부터 내겐 올레길 리본과 같은 안내자가 있었다. 책. 세이프존에서 뛰쳐나갈 수 있는 용기도, 삶이 생각보다 지극히 짧다는 인식도, 생명체에 대한 연민과 사랑도 모두 그를 통해 배웠고 여전히 배워 가는 중이다.
점심때가 훌쩍 지나고 식당은 보이지 않는다. 바닷가로 내려가 안내센터 직원이 싸준 샌드위치로 늦은 오후의 성찬을 즐긴다. "조금만 싸 주세요." 했던 것이 이렇게 귀중한 양식이 될 줄이야. 무는 또 왜 이리 달고 맛있는 건지. 바람이 스치고 바다가 눈부시다. 세상 부러울 게 없다.
"목마르고 굶주린 자의 식사처럼 맛있고 매 순간이 소중한 그런 삶은 어디에 있는가."
-황석영, <개밥바라기별>
발에 물집이 잡혀 밴드를 겹겹이 감았음에도 속도가 쳐진다. 이제 3~4km만 가면 종점인데 치명적인 풍경보다는 무거운 다리에 더 신경이 쓰인다.
"많이 지쳐 보여요."
뒤에서 오던 트레커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보조를 맞추며 말한다.
"네, 발이 아파서. 4코스 걸으시는 거예요?"
"네, 3-B코스 중간부터 시작했어요. 하루에 한 코스 반씩 걸어요."
나보다 적어도 열 살 정도는 연상일 것 같은데 전혀 지친 기색이 없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더니.. 평소에 운동량이 거의 없다 보니 고관절부터 다리, 어깨에 손목까지 사방 안 아픈 데가 없다. 활력 넘치는 연상의 트레커를 보며 반성과 함께 다시 한번 운동에의 의지를 불태운다.
"혹시 가파도 가보셨어요?"
"거긴 지금 청보리가 많이 안 자라서 별로 볼 게 없을 거예요. 14-1코스 걸어 보세요. 지금 백리향이 피어서 향이 정말 좋아요."
"네, 꼭 가볼게요. 저는 천천히 뒤따라갈 테니 먼저 가셔도 됩니다."
"그럼 천천히 오세요. 혹시 밴드 필요한가요?"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꽃향기 맞으며 다음 코스를 걸을 생각에 일순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마음 가는 대로 발길이 가 닿을 수 있으니 무계획, 자유여행의 커다란 매력이 아닐 수 없다.
게스트하우스 서가에서 책을 하나 뽑아 들고 감성 넘치는 공용 공간으로 향한다. 우드버닝, 통기타, LP, 턴테이블. 밤이 되면 목로주점으로 변신할 것 같은 이곳은 노스탤지어를 한정 없이 자극한다. 웰컴 한라봉을 까먹으면서 어느새 들어와 우드버닝 작업 중인 사장님에게 슬며시 말을 건넨다.
"통기타 치시나 봐요."
"그냥 조금이요."
"악보집을 보니 그냥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요. 저는 몇 년째 초심자인지. 기타도 어느 정도 소질을 타고나야 하나 봐요."
"가까이 두고 시간 날 때마다 잡아 보는 게 중요하죠. 한 곡 연주해 드릴까요?"
이치현과 벗님들의 '당신만이'부터 요즘(?) 노래 '기다린 만큼, 더'까지 통기타 선율과 사장님의 감미로운 음색이 잔잔하게 시공간을 채운다.
연주를 마친 사장님은 무사히 건너왔지만 극도로 위태로웠던 젊은 시절의 고단한 기억, 그보다 더 젊은 시절 LP를 사모으던 푸릇한 추억을 풀어놓으며 턴테이블에 LP를 한 장 올려놓는다. 밥 딜런. 그러고는 밖으로 나가 동백이 점점이 붉어진 커다란 동백나무를 보여주며 환하게 웃는다.
인연에 대해 생각해 본다. 때로는 한 번의 스침이 그 어떤 오랜 인연보다 더 깊이 각인되기도,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어떠한 계산이나 의도도 가미되지 않은 관계는 순수한 공감과 지지로 이어지기 쉬우며, 이는 신뢰와 안정감으로 귀착된다. 관계, 즉 인연이라 함은 단순한 시간적 장구함보다는 거듭되는 마음의 부딪힘과 공명으로 깊어지는 게 아닐까. 가까운, 그리고 먼 타자에 대해 Empathy(feels)를 넘어 Compassion(acts)에 이를 수 있기를, 궁극적으로 좀 더 따뜻한 세상이 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