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릴 땐

by 재숙

새벽부터 빗소리가 요란하다.

우중 트래킹을 대비해 우비까지 챙겼으나 생각보다 '거센' 비를 핑계 삼아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 더 머물며 쉬기로 한다. 이 넓은 공간, 고요함이 오롯이 내 것이라니, 여행 중 맞닥뜨리게 되는 돌발성은 또 다른 힐링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트래킹 19km의 압박은 하루 유예된다.


게스트하우스 서가에서 책을 꺼내 들고, 읽기도 전부터 충만함에 기분이 좋아진다. 커피를 마시고 무선 키보드를 꺼내 뭔가를 끼적거리고 책을 읽는다. 느리적거리며 흘러가는 시간이 무한정 이어질 듯하다.


"나는 궤도에서 이탈한 소행성이야. 흘러가면서 내 길을 만들 거야."

-황석영, <개밥바라기별>


나 또한 소설 속 주인공처럼 정해진 궤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이탈해 나만의 시간을 유영 중이다. 내 길을 만들겠다거나 하는 무언가에의 성취욕이라든가 거창한 삶에의 의지 따위는 없어진 지 오래다. 패배주의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성공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패배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저 때때로 나의 궤적을 돌이켜보면서 '이만 하면 자유롭게 잘 살고 있다' 정도면 어느 날 갑자기 허망함, 후회로 크게 가슴 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오후가 되니 어느새 비가 그치고 두터운 구름이 깔린다. 점심을 먹고 숙소 주변을 산책한다. 귤농장으로 이어지는 숲길은 빗물을 머금은 나무들이 싱그러운 향을 뿜어내고 곧 소멸될 빗방울이 마지막 빛을 발한다. 푸드덕 놀라 날아오르는 새소리에 나도 모르게 육두문자가 튀어나와도, 농장의 개 짖는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하지만 어느 것 하나 걸리지 않는다. 장염으로 밤새 화장실에 들락거리고, 발에 물집이 잡혀 밴드로 칭칭 감고 다녀도, 비가 내려 일정에 살짝 차질이 생겨도 어깨를 짓누르던 배낭을 벗어버리고 바위에 걸터앉아 바다를 눈에 담을 때면 그저 감읍할 따름이다. 오늘의 충분한 쉼이 내일의 19km 완주로 이어지기를 바라며 짧고도 긴 하루를 몇 자의 글과 함께 마무리한다.


"나는 말야, 세월이 좀 지체되겠지만 확실하게 내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거다."

-황석영, <개밥바라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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