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키르기스스탄인
알틴아라샨 트레킹. 키르기스스탄에 온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평소 등산이나 트레킹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알틴아라샨은 꼭 걷고 싶었다. 태초의 자연, 문명이 닿지 않은 순수한 그곳에 '나신'이 되어 숨어들고 싶었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에 도착. 이제 알틴아라샨의 관문 카라콜로 이동해야 한다. 몇 번 버스더라, 어디에서 타더라, 수집한 정보를 뒤적일 새도 없이 직관적인 정보가 날아든다.
"카라콜! 카라콜!"
볼 것 없이 마르슈카에 짐을 싣는다.
정신없이 졸고 있는 여행자를 누군가가 쿡쿡 찌른다. 창밖을 보니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이식쿨 호수가 석양빛으로 불타고 있다. 정신이 번쩍 듦과 동시에 감동, 아니 행복감이 뭉텅 밀려온다. 옆의 아주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눈을 맞춘다. 키르기스스탄이구나, 그제야 실감이 난다.
테스키 게스트하우스는 카라콜 버스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택시에서 내리니 주인 아저씨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문을 열고 나온다. 테스키는 주인 아저씨 탈라이와 부모님이 운영하는 숙소로 조용하고, 깨끗하고, 친절하고 그리고 아름답다. 여기 카라콜을 찾는 여행자는 거의가 알틴아라샨, 알라쿨 호수 트레킹을 하기 위해서다. 탈라이는 알틴아라샨행 버스는 어디에서 타고, 어디에서 내리는지, 요금은 얼마인지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메신저로 지도까지 보내 주고 나서야 안심하고 긴 여로에 지친 여행자를 방 안으로 들여보낸다.
알틴아라샨을 걷는다. 바라던 대로, 그리던 대로다. 하늘을 찌를 듯한 가문비나무, 세차게 흘러내리는 계곡물, 여행자들의 발길로 다져진 소로(小路). 정상 유르트까지 15km라는 압박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느릿느릿 시간을 늘여가며 걷는다. 바위에 앉아 배낭부터 양말까지 모두 벗어던져 버리고 바람을 맞는다. 오다가다 마주치는 여행자는 맑은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낯선데 낯설지 않은 느낌. 자연이 그런가보다. 사람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키고 낯선 이와 친구가 되게 하고 내게서 나를 타자화할 수 있게 해 준다. 모든 부유물을 걷어 내고 지금 이 순간의 감정, 감각만을 남긴다.
서늘하게 어스름이 내려앉을 쯤 유르트에 도착해 차를 마시고, 저녁으로 컵라면을 먹는다. 침대에 누워 담요 세 장을 덮고 배낭에 들어 있던 신문을 보다가 창밖 별들을 보다가 잠이 든다. 다음날 아침, 유르트 앞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가문비나무숲, 하늘, 구름, 양 떼에 아침부터 만취해 버린다.
테스키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고 '갬성' 물씬 풍기는 빨래터에 쪼그려 앉아 대충 옷가지 몇 벌을 비벼 널고 정원을 둘러본다. 색색의 장미와 이름 모를 꽃들, 거기에 사과를 주렁주렁 품고 있는 수많은 사과나무.
탈라이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정원에 있는 사과 따 먹어도 돼요?"
"Of course!"
탈라이에게서 곧바로 답이 온다.
사과 한 개를 따서 방 안으로 들어와 뒹굴거리는 것도 잠시, 누군가 노크를 한다. 탈라이다.
"어머니께서 갖다 주라고."
탈라이가 들고 있던 쟁반을 건넨다. 볶음밥과 수제 간식.
'아, 사과 얘기에 배가 고픈 줄 아셨구나.'
탈라이는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 것조차 쑥스러운지 얼른 자리를 뜬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익명 속의 자유로움 한편으로 긴장과 약간의 두려움이 따라붙는다. 모든 것을 혼자 헤쳐나가야 한다는 비장감과 함께 슬쩍슬쩍 고독이 스치고, 낯선 언어 속에 둘러싸여 의기소침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방인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 심지어 자디잔 이해관계에 갑자기 적대적이 되기도 하는 사람들을 겪으면서 피로감이 쌓여간다. 이때 누군가의 선의는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오고 사람을 무한 긍정하게 만든다. 사람들로부터의 고립을 희망하면서도 결국 사람에 의해 위로를 받는다. 뛰어봐야 사람들 속이다.
외국인에게 내가 단순히 '내'가 아니듯이 탈라이 가족의 따뜻함은 그들을 넘어 키르기스스탄이 되었다. 좋은 기억을 품게 해 준 탈라이 가족에게 참으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