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미학
노트 한 권, 볼펜 한 자루, 그리고 기타를 챙겨서 독서모임 장소인 D 카페로 향한다. 몇 년째 초심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내게 독서모임 N 리더가 기타 강습을 해 주기로 한 것이다. 영하 10도의 칼바람을 뚫고 한 시간이나 일찍 카페에 도착한다.
커피를 주문하고 기타를 꺼내 손가락을 푼다(독립된 공간의 한 구석에서). 독서모임은 뒷전인 게 됐다. 폼 잡으며(?) 기타줄을 튕기고 있는데 N 리더가 들어온다. 그는 노트북 세팅을 마치자마자 강습에 앞서 시연을 보인다.
'아, 기타의 세계는 끝이 없구나.'
초심자의 의지가 또 한 번 꺾인다.
운지법과 핑거링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L 회원이 들어오면서 강습은 급히 마무리된다.
"다음에 핑거링 기초 교본 갖다 줄게요. 어렵지 않을 거예요."
N 리더는 말한다.
오늘 독서모임의 책은 뮈리엘 바르베리의 <고슴도치의 우아함>이다. 리더의 작가 소개 및 배경 설명에 이어 각자 준비해 온 독후감을 낭독하고, 나를 존재하게 하는 취미에 대해, 지적 우아함과 우월감에 대해, 욕망이 배제된 예술의 감동에 대해 다양한 의견과 함께 토론이 전개된다. 생각의 틀을 깨는 새로운 관점, 확장된 질문 등이 나를 깊은 사유로 이끈다.
왕성한 지적 활동을 마치고 왕성한 식욕을 채우러 간다. 족발을 앞에 두고 각자의 이야기가 풀려나온다.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즐겁다. 아들과 함께 제주 올레길을 걷고 온 J는 노년이 되어 꺼내 볼 아들과의 추억거리가 생겼다며 천진하게 웃는다. K는 자식을 키우면서 가장 행복할 때는 자식이 나보다 낫구나,를 느끼는 순간이라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모두들 각자의 삶에서 소소한 행복을 빚으며 살고 있다. '평범함이 지복이구나.' 그들의 얼굴이 평범한 행복으로 빛난다.
"저는 먼저 가겠습니다."
내 키만 한 기타를 둘러메고 인사를 한다.
모두들 잘 가라며 손을 흔든다.
돌아서는 순간 J가 얼른 말한다.
"너를 알게 돼서 너무 행복해."
살짝 부끄러운 듯 웃는 J의 얼굴이 아름답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붕붕 날아오를 듯하다.
"우리는 누군가 내게 행한 열 번의 좋은 일을 잊기 위해선 한 번의 나쁜 일이면 충분한 존재다. (...) 좋은 관계는 한 번의 실수만으로도 쉽게 망가지지만, 나쁜 관계는 열 번의 좋은 일로도 좋아지기 어렵다. (...) 그게 우리가 '선택한' 삶이다. 그렇다면 다른 선택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진경, <삶을 위한 철학수업>
내가 선택한 삶도 다르지 않았다.
갈등, 상처에 맞닥뜨릴 때마다 타인에 대한 마음을 닫아버리고, '내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이들에게 쏟을 필요가 있는가'라며 그러한 관계를 즉각 폐기해 버렸다. 그에 딸린 부정적 감정과 인상도 함께.
'고슴도치'의 삶을 살다가 처음으로 타인들에게 다가섰다. 책을 읽는 사람들, 기본적으로 신뢰가 되었고 소통을 통해 삶이든, 사유든, 뭐가 되었든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낯선 이들과의 소통에 서툰 것인지 교감이 잘 되지 않았고 그들에게서 튕겨져 나와 덩그러니 혼자 앉아 있는 느낌은 관계의 끝을 예고했다.
그렇게 정리를 해 가는 중에 '한 번만 더 해볼까'라는 기대 섞인 미련이 마음을 붙들었고, 그 '한 번만'이 지금까지 이어져 그들은 내 삶에 의미를 더해주는 사람들이 되었다.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뜨거움을 잃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