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by 재숙

<바움가트너>는 2024년 세상을 떠난 저자의 투병 생활 중 쓰인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라는 정보가 입력된 상태에서 읽어서인지 읽는 내내 삶과 죽음이 매우 농도 깊게 다가왔다. 저자의 한마디 한마디가 이 정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때로는 바움가트너가 때로는 애나가 저자의 투영체로 느껴졌다. 저자 폴 오스터의 작품은 <선셋 파크> 이후 두 번째다. <선셋 파크>가 젊은이들의 불안, 사랑, 희망을 그리고 있다면 이 책 <바움가트너>는 노년의 고독, 죽음, 애도를 다루고 있다. 이 둘은 세대의 고민과 상황은 다를지언정 결국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미래가 없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이 가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금부터 어떤 것에 희망을 갖지 말고 지금 이순간, 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지금 여기 있지만 곧 사라지는 순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지금만을 위해 살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폴 오스터, <선셋 파크>

"지구에는 불이 붙었고, 세상은 타오르고 있는데, 그래도 지금 당장은 이와 같은 날이 있으니 즐길 수 있을 때 이런 날을 즐기는 게 낫다. 이게 그가 보게 될 마지막 좋은 날일지 누가 알겠는가."
-폴 오스터, <바움가트너>

첵에는 죽음을 예견한 저자의 심상이 구석구석 녹아 있다. '카르페 디엠', 즉 삶의 유한성과 그렇기에 더욱 찬란한 생의 순간을 예찬하는 동시에 반복적으로 죽음을 암시함으로써 이를 우리의 의식 밖으로 끄집어내고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시킨다. 애나를 통해 산 자로서 피해 갈 수 없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 환지통으로 상징되는 상실의 고통과 그리움을 보여주는 한편, 에테르가 되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는 기대는 죽은 자를 애도하는 하나의 방식의 제안이자 기억되고픈 저자의 소망의 투영으로도 읽힌다. 바움가트너는 산 자(주디스) 뿐만 아니라 죽은 자(애나)와의 연결을 강조하며 타자와 연결되지 않은 삶은 죽은 것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애니메이션 <코코>에서 기억은 죽은 자들을 '살'게 하고 산 자는 그들을 통해 죽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

바움가트너는 또 다른 사랑에의, 연결에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나서 '종신형'이라는 제목의 글을 쓴다. 그는 죽음이 전제된 삶을 종신형으로 상정하고 자신의 지난 삶을 짧게 갈무리하면서 앞으로도 계속될 독방 생활이 그다지 외롭지는 않을 거라고 위안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평생 해오던 일과를 계속하다 보면 어느새 독방에서의 종신형에서도 해방될 것이고 그냥 그뿐이라는 것이다. 오직 죽음으로써 삶이 종결되기에 삶의 종신형으로의 비유는 거칠지언정 매우 적확하다 할 수 있겠다. 종신형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필연이라면 우리는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서 그 노정을 어떻게 채울지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독방일지언정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산뜻하게 해방을 맞을지, 혹시 특사의 은혜라도 베풀어지지 않을까 허황된 기대를 품다가 미련과 회한을 가득 안은 채 해방 앞에서 몸부림칠지.

바움가트너는 에세이 <운전대의 신비>에서 인간의 삶을 외로움과 잠재적 죽음이라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통제 불가능한 차에 비유하는데, 바움가트너는 실제로 운전 중 사고를 당한다. 자동차가 파손되고 얼굴에 피를 흘린 채 도움을 찾아 떠나는 모습이 흡사 통제 불능의 영역에 점령된 저자의 지금과 같아, 책의 마지막 문장 "첫 번째 집에 이르러 문을 두드릴 때 S.T 바움가트너 모험담의 마지막 장이 시작된다"는 저자가 독자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 같아 가슴이 아프다.

저자는 바움가트너를 내세워 물리적 죽음 이전의 정신적 죽음, 즉 '인간의 살덩어리'에 불과한 삶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을 드러내는데, 저자는 마지막까지 평생의 일과를 수행하며 그가 바라던 정신적인 삶을 살았다. 그리고 저자는 평생 일구어낸 산물을 통해 수많은 독자의 기억 속에 불멸의 에테르가 되었다.
그의 부재가 가슴 아프지만은 않다.

Q. 당신이 그리는 노년의 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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