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inem, <TDOSS>를 듣고
2000년대 초반 <The Marshall Mathers LP>, <The Eminem Show> 등의 불후의 명반들로 커리어에 방점을 찍은 에미넴(Eminem)을 막을 자는 없었다. 그는 역사에 남을 기록들을 세웠고, 화려함과 재치를 동시에 잡은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며, 슬림 셰이디(Slim Shady)라는 얼터 에고를 통해 자신의 불만과 분노를 거침없이 표출해냈다. 그는 말 그대로 시야 전방의 모든 것들을 향해 중지를 펼치며 다녔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빼어난 완성도의 작품들로 자신의 재능과 씬에서의 위치를 견고히 했다. 당시 그에게 대적할 수 있는 이는 존재치 않았다.
그로부터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고, 에미넴 역시 쇠락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전성기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준수한 평가를 받았던 <Relapse>, <The Marshall Mathers LP2> 등의 작품으로 커리어를 연장해나가던 그는 2017년 갑작스레 <Revival>이라는 괴작을 발매하며 리스너들에게 이전과는 사뭇 다른 방식의 충격을 선사했다. 이후 발매한 <Kamikaze>, <Music To Be Murdered By> 역시 과거에 비해 평론적으로 미비한 평가를 받으며 자신의 위상에 흠집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렇다. 그의 나이가 반백을 능가한 지 이미 한참 되었다는 시점에서 사실 자연스러운 현상이겠지만, 에미넴은 이제 더 이상 예전 같지 못하다. 그의 분노는 과거에는 슬림 셰이디와 함께해 굉장히 유쾌하고 재치 있게 들렸지만, 여전히 동일한 분노를 머금고 있음에도 이제는 너무나도 둔탁해진 나머지 갱년기의 신경질 정도로 다가오는 경우가 다반사다. 날렵하고 유연한 퍼포먼스를 자랑해왔던 에미넴이 과거 그의 추종자들이었던 랩 팬들에게 이젠 그다지 좋지 못한 이미지로 각인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The Death of Slim Shady>의 인트로 트랙 "Renaissance"의 주제는 전작 <Music To Be Murdered By>의 인트로 "Premonition"과 동일하다. '셰이디는 아기를 담요에 얽힌 뒤, 목을 조르지', '내가 눈치를 안 보기 시작하자마자, 조금씩 팔리기 시작했었어', '이젠 팬은 안 보이고, 불편해하는 놈들만 떼거지인 것 같아', 그는 자신과 동료들의 헤이터들을 향해 매섭게 쏘아붙이고, 논란이 될 만한 가사들을 내뱉으며 남은 1시간 동안 광기 서린 분노를 보여주겠다 예고한다. 풀어서 말하자면, "Renaissance"는 <The Death of Slim Shady>가 근본적으로 테마 면에서 전작과 별 다른 차이점이 존재치 않는—또 하나의 그저 그런 '뉴 에미넴'의 앨범이 될 것임을 알리는 전조와도 같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작품의 장단점을 하나하나 짚어보도록 하자. 우선 앞서 에미넴이 요즈음 선보여주는 가사들이 '갱년기의 신경질'으로 느껴진다고 표현했었는데, 특히 본작에서 그러한 점이 유독 두드러지는 듯하다. <Encore> 에라에서 녹음된 "Brand New Dance"는 2004년 사망한 故 Christopher Reeve를 향한 3분 동안의 디스를 담고 있으며, 앨범이 진행되는 동안 PC, LGBT, Gen-Z 세대, 사우스 파크 등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아쉽게도 <The Eminem Show> 이후 22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로서는 이러한 에미넴의 농담들이 더 이상 해학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Christopher와 Caitlyn Jenner 등 본인의 커리어 내내 디스해오던 인물들을 비롯, Lizzo와 Megan Thee Stallion 등의 인물들 역시 알 수 없는 명목으로 디스하며 — 앨범을 현실성도, 신선함도 존재치 않는 과거 슬림 셰이디의 전시행정처럼 느껴지게 한다.
또한 자신이 PC 경찰들에 의해 캔슬(Cancel)당했다는 주장에도 크나큰 모순이 존재한다. 에미넴은 자신의 거친 농담과 디스 때문에 헤이터들이 그를 캔슬하려고 한다 주장하지만, 이는 그가 2024년에도 Slim Shady라는 캐릭터에 대중들이 열광할 것이라 착각을 해 발생하게 된 논리적 허점이다. Slim Shady라는 캐릭터는 2002년 에미넴의 전성기 때는 분명 독보적이고 신선한 캐릭터였다. 화려한 래핑과 라이밍을 통해 끊임없이 논란을 불러 모으던 캐릭터 Slim Shady는 2024년, 에미넴의 기량과 유머 감각이 당시에 비해 한참 쇠퇴한 시점에는 그저 불쾌하게만 다가올 뿐이다. 애석하게도, 이제 셰이디는 전혀 흥미롭지 못하다.
이러한 외부적인 요인뿐 아니라, <The Death of Slim Shady>에는 음악적으로도 굉장히 큰 결점이 존재한다. <The Slim Shady LP> / <The Marshall Mathers LP> / <The Eminem Show>로 에미넴이 탄탄한 디스코그래피와 전성기를 쌓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Dr. Dre가 프로듀싱에 큰 힘을 보태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에미넴이 어떤 비트와 가장 잘 어울릴지를 알고 있었고, 에미넴 역시 Dre의 비트 위에서 말 그대로 날아다녔다. 그러나 <The Death of Slim Shady>에서 Dr. Dre의 참여곡은 "Road Rage" 하나뿐이고, 에미넴이 대부분 수록곡의 프로듀싱을 맡았다. 셰이디 시절의 느낌을 어느 정도 살리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지만, 2000년대 초반의 걸작들과 비교하게 되어 아쉬움을 남긴다. 정력적이었던 과거의 모습을 재현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Recovery> 때부터 계속되었던 진부한 스타일을 다시금 상기시키기만 한다.
본문에선 <The Death of Slim Shady>를 단점만이 가득 찬 앨범처럼 표현해 놓았지만, 본작에는 그래도 주목할 만한 트랙들이 몇 군데 분포하고 있다. 슬림 셰이디와 대화하며 말다툼을 나눈다는 내용의 "Habits"와 유사한 컨텐츠로 앨범 최고의 순간을 주조한 "Guilty Conscience 2", 수많은 라임들을 빼곡히 채운 JID와의 콜라보 트랙 "Fuel"는 비교적 지루하던 앨범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한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즐길 수 있는 선공개 싱글 "Houdini"와 "Tobey", 약에 의존했던 나날들과 가족에 대한 진심 어린 헌사를 담은 "Somebody Save Me" 역시 각각의 방식으로 큰 여운을 남긴다.
그러나 "Breaking News", "Guess Who's Back"과 같은 스킷 트랙들은 청자들로부터 하여금 머리 위 물음표만을 띄우게 만들고, "Road Rage"나 "Head Honcho" 같은 트랙들의 피처링 벌스는 애석하리만큼 모자라기에 큰 실망만을 안겨준다. "Brand New Dance", "Antichrist", "Bad One" 등의 경우는 장황한 곡의 러닝타임이나 벌스에 비해 에너제틱한 순간이 존재치 않다. 앞선 문단에서 언급한 트랙들처럼, 그나마 다들 즐길 수 있을 트랙들이 존재하는 반면 대부분의 트랙들이 끊임없이 올라가기만 하는 롤러코스터와 같은 꼴을 띄고 있어 앨범에 전반적으로 '지루하다'라는 인상을 남기게 한다.
"<The Death of Slim Shady>는 컨셉 앨범입니다. 따라서 앨범을 꼭 트랙 순서대로 들어주셨으면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이해가 잘되지 않을 겁니다. 즐겨주세요." 에미넴은 앨범 공개 하루 전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본작에게 조금의 관심을 가진 상태로 글을 읽어나가는 독자라면 아마 알고 있겠지만, <The Death of Slim Shady>의 주된 컨셉은 자신의 얼터 에고인 슬림 셰이디를 완전히 죽이고 온전한 개인 Marshall Mathers가 될 것임을 공표하는 것이다. 에미넴은 사실 <Relapse>와 <Recovery>를 발표했을 때부터 슬림 셰이디라는 자아를 내려놓고 싶어 했다. 그러나 수 장의 앨범을 발매하고, <Kamikaze>와 같이 자신의 오랜 팬들이 원하는 앨범을 발매해도 그의 팬덤 Stan들은 그에게 계속해서 '슬림 셰이디 스타일의 앨범'을 요구했다. 결국 이들을 위한 마지막 앨범이자 슬림 셰이디라는 캐릭터의 마침표가 본작 <The Death of Slim Shady>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Stan들을 위한 에미넴의 마지막 헌사는 가지는 의의에 비해 성공적이지 못했고, 대중들을 비롯해 그에게 관심을 갖고 있던 이들에게마저 실망을 안겨준 모양새이다. 그의 농담은 더 이상 재미있지 않으며, 랩과 가사 역시 예전 같지 않다. 에미넴은 PC 경찰들이 자신을 캔슬 하려 한다고 여러 차례 주장했지만, 그럴수록 그가 잠재적으로 가진 캔슬 컬처에 대한 공포와 한물 간 늙은이의 옹고집을 은연 중 노출하는 꼴로밖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의 은퇴작이라 공표된 본작 후 혹시라도 에미넴의 다음 앨범이 언젠가 발매된다면, 본작의 아쉬운 평가를 반면교사로 삼아 이젠 Marshall Mathers다운 작품을 발매해 주기를 바란다. 처음부터 자신의 곁에 있던 소중한 동료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