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희의 <장면들>을 읽고
“미국은 위대한 나라가 아닙니다.”
한 학생의 “미국이 위대한 이유를 말해달라.”는 질문에 뉴스 앵커 윌은 조목조목 미국이 위대하지 않은 이유를 나열한다. 진보진영(민주당)으로 보이는 교육단체(NEA, National Education Association, 전미교육협회)에서 나온 패널이 답변한 ‘다양성과 기회’에 대해서는 결국 돈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꼬집으면서 비판하고, 보수진영(공화당) 패널의 ‘자유’라는 답변에 대해서는 전 세계 207개국 중 180개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며 일갈한다. 이어 미국이 통계적으로 최고의 위치에 있는 단 3개의 항목(인구당 감옥에 가는 비율, 천사가 진짜라고 믿는 성인 비율, 국가 방위비)을 언급하며, 미국이 위대하지 않다는 주장에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미국이 과거의 위대함을 찾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까지가 미국드라마 <뉴스룸(The News Room)>의 오프닝 시퀀스다. 그렇게 드라마 <뉴스룸>은 위대하지 않은 미국을 보여주며, 이 문제를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애쓰는 앵커와 뉴스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드라마가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뉴스룸>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실제로 뉴스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이 있었으니, 그게 내가 읽은 책 <장면들>의 저자 ‘손석희’다.
손석희의 책 <장면들>은 제목 그대로, 그가 언론인 시절 목격한 유의미한 ‘장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종의 회고록이다. 특히 대부분의 장면들은 그가 JTBC로 자리를 옮긴 후에 집중되어 있는데, 시기가 시기였던지라 한국의 현대사를 흔들었던 굵직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아니 정확히는 ‘세월호’, ‘국정농단’, ‘미투’ 등의 사건들을 한 언론사의 보도 부문 총책임자(사장)이자 메인뉴스의 앵커로써, 마침내 시청자의 눈과 귀 앞에 그 결과물을 내놓기 전까지의 고민과 논의의 과정을 담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스튜디오를 떠나 현장(ex. 팽목항)에서 뉴스를 진행하고, 사실관계에 천착해 <팩트체크>를 정규코너로 매일 방송한다거나, 뉴스의 제작 이면을 공개하는 <비하인드 뉴스> 코너를 통해 보도로 이어지기까지의 고민과 스토리를 공유하는 등 기존 뉴스와는 다르게 시도했던 새로운 실험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다양했던 실험의 끝은 모두 진정한 언론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과 맞닿아 있음을 밝힌다.
뉴스가 넘치는 시대다. 전통적인 의미의 언론은 물론, 유튜브를 위시한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서도 저마다 뉴스의 제작자가 될 수 있음을 뽐낸다. 그 덕에 우리는 다양한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됐지만, 반대로 그 때문에 근거 없이 뿌려지는 가짜 뉴스의 범람 속에서 살아가게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세상에서 오히려 전통적인 언론의 중요함이 빛을 발한다. 수많은 참고서와 문제집이 있지만 학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교과서이듯, 뉴스가 넘치는 작금의 시대에 전통적인 매체는 개별 뉴스의 중요도와 시각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물론, 전통적인 매체가 그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항상 문제가 되어 온 공영방송이라든지, 좌우 가르기의 엔진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주요 일간지를 보고 있노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러한 상황에서 훌륭한 대안이 되어 온 <JTBC 뉴스룸>은 손석희 사장의 퇴사 이후 많은 부침을 겪고 있다. 무엇보다 모기업인 JTBC가 구조조정을 통해 보도 부문을 대폭 축소하고 있다. 이것이 단순히 한 언론사의 존폐에 대한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책 <장면들>에서 이야기한 언론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바라왔던 언론의 모습에 가까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속해있는 모기업의 문제도 거리낌 없이 지적하고, 균형은 유지하되 필요하다면 사실에 근거한 논평을 내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역시 필요하다면 하나의 어젠다를 지속적으로 보도하는 뚝심까지, 손석희 시절의 <뉴스룸>은 분명히 의미가 있었다. 뉴스의 본질인, ‘문제를 인식시키는 것’에 충실했고, 그래서 시청자들이 ‘문제를 인식하는 것’에 쉽게 다다를 수 있게 해 주었던 시절. 그래서일까, 이 책은 단순한 회고록이 아닌, 한 편의 화양연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더더욱 고대하게 된다. 우리가 손석희를, 손석희의 <뉴스룸>을 더 이상 추억하지 않게 될 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