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느끼다
간혹 영화관 스크린에서 현실이 겹쳐 보이는 경우가 있다. 영화 <프라미스드 랜드>가 그렇다. 구스 반 산트 감독과 맷 데이먼의 조합만으로도 볼 가치가 있는 영화라 여겼고, 그 기대에 충분히 부합하는 영화였다. 벤 에플렉까지 있었다면…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들었지만, 여하튼 <프라미스드 랜드>는 현시점에서 세계 어느 곳에서나 있을 ‘개발’과 ‘보존’의 갈등을 영화 속으로 가져온다. 그리고 등장인물 누군가를 섣불리 영웅이나 악당으로 만들지 않은 채, 하지만 일정 방향으로 천천히 관객들을 인도한다. 구스 반 산트와 맷 데이먼 듀오의 전작인 <굿 윌 헌팅>에서 숀 맥과이어 교수가 주인공 윌 헌팅을 천천히 바람직한 삶으로 인도했듯이 말이다. <프라미스드 랜드>에서 관객은 윌 헌팅이 되어, 영화가 이끄는 방향으로 천천히 마음을 움직인다. 그리고 그 와중에, 스크린에 겹치는 우리네 현실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 속 스티브(맷 데이먼 분)는 세계 굴지의 에너지 기업 ‘글로벌’의 전도유망한 직원이다. 심지어 젊은 나이에 부사장으로 승진했다는 낭보를 접한 상황이다.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다는 작은 마을 맥킨리의 부지들을 문제없이 매입할 수 있다면, 자신을 믿어준 회사에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스티브에게 맥킨리의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농민들을 설득하기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마을의 존경받는 교사 프랭크(할 홀브록 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천연가스 채굴이 마을의 환경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프랭크의 반박에 결국 이는 투표까지 가게 되고, 그 와중에 환경운동가인 더스틴(존 크래신스키 분)까지 등장하며 상황은 스티브에게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님비(NIMBY) 현상. 영화를 보며 주입식 교육 덕에 두뇌에 새겨진 단어 하나를 떠올린다. 각종 혐오시설이 내 마을에 들어오면 안 된다는 지역 이기주의, 성숙한 시민이라면 응당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라고 배웠더랬다. 자연스레 스크린 속 마을 맥킨리에, 송전탑 때문에 몇 년째 논쟁 중인 밀양과 원자력 발전소를 더 짓겠다는 정부의 발표 속 여러 도시들이 겹쳐 보였다. My back yard가 아니었기에 별 관심 없던 그곳들이 내 눈 앞 스크린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프라미스드 랜드> 속 이야기만큼이나, 등장하는 인물들도 우리와 꼭 닮아있다. 냉큼 계약서를 작성하고 보상금도 받기 전에 값비싼 수입차를 뽑아버린 사람, 조상이 물려주신 땅을 팔 수 없다며 버티는 사람, 그 외에도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다양한 이해관계로 고민하는 사람들. 그들은 개발과 보존의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을 사는 우리들의 거울이나 마찬가지다. <프라미스드 랜드>는 개발과 보존 중 어느 쪽이 옳다고 선뜻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다만 열렬한 개발론자였다가, 그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이 되었다가, 이내 개발론을 포기해버리고 마는 스티브의 모습을 보여주며 넌지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네가 옳다고 믿는 것이, 어쩌면 틀릴 수도 있어.”
정답은 없다. 혹은 있지만 영원히 알 수 없다. 천연가스 개발 덕에 가난했던 마을 맥킨리가 번영을 맞이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혹은 우려처럼 치명적인 환경오염이 발생해 황폐해질 수도 있다. 그건 밀양도, 원자력 발전소 부지들도, 그리고 언젠가 개발과 보존의 논쟁에 휘말릴지도 모를 내가 사는 마을도 마찬가지다. 어디까지나 선택의 문제라고, 영화 <프라미스드 랜드>는 말한다. 영화 속 이야기처럼 논쟁 사이에 거대 기업이나 국가의 음모가 끼어든다면, 어쩌면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마저도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많이 고민하고 치열하게 논쟁해야 한다. 당장의 이익이나 불편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후손을, 그리고 우리와 후손이 딛고 살아갈 이 땅을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영화에서 프랭크는 말한다. "영혼을 팔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늙었다는 게 정말 다행이야.” 개발과 보존, 영화는 우리를 딱 그 선택의 순간 직전까지만 데리고 간다. 그리고 당부한다. 어떤 선택이든, 네 영혼을 파는 선택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그것이 <프라미스드 랜드>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단 한 가지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