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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지 말 것을. 다시 보지 말 것을.
나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네 집 앞에서 한창 사랑에 빠진 여자의 모습을 본다.
얼마 후 네가 나온다.
너는 무심한 듯 웃으며 다가간다. 나에게 한 것처럼.
어색한 듯 한걸음 물러서 그녀가 내미는 봉투를 받고
그녀와 함께 안으로 들어간다.
함께.
내가 수없이 여닫았던 문을 열고 그녀가 들어간다.
겨우 두 달 만에.
뭐. 헤어진 지 두 달인데.
그럴 만도 하지.
혼잣말로 툭 쳐본다.
머릿속을 채우던 연기들이 걷힌다.
우리가 헤어진 이유.
네가 고독을 못 이겨 연애를 시작하는 것과
내가 불안을 견디지 못해 이별을 반복하는 것이
어딘가 서로 닮아있다.
나는 언제나 이별을 말하고
너는 여전히 더욱 차가운 복수를 하는구나.
내가 던진 창은 모질고 강하지만
네가 든 방패 앞에 무력하다.
나는 졌다.
천지에 흐드러진 벚꽃도 졌다.
새 잎이 찬란한 가지 위에 갈 길 잃은 새가 운다.
거리 위에 나뒹구는 꽃잎이
우리가 내팽개친 약속인 듯
사뭇 아름답고 또 연약하다.
꽃이 지듯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점심시간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사람들을 피한다.
여자가 어떤 외모였는지. 너의 표정이 진지했는지.
두 사람의 뒷모습이 얼마나 살가웠나.
언제부터였나.
의미 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바람에
그녀와 네 뒷모습을 본 날 후로
내 일상은 정말로 엉망이 되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이 내 의지대로 되지 않은지
1주일이 지났다.
이제 정말 수면제가 필요한 순간이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병원에 간다.
엘리베이터 버튼 옆에는 3층 내과와 8층 정신과가 표기되어있다.
함께 탄 남자는 5층 정형외과 버튼을 누른다.
나는 그만 3층을 누른다.
연세가 지긋한 의사 선생님은 내가
회사 일로 요 며칠 불면이 심하다.라고 하니
며칠 분 줄까요. 짧게 질문한다.
나는 그만 당황해서 오일분만 주셔요. 답한다.
약을 기다리며 두리번거린다.
감기약을 받으러 온 사람처럼 일회용 밴드를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발뒤꿈치에 바르면 보들보들해진다는 크림을 들었다 놓기도 한다.
수면제 다섯 알이 든 종이봉투를 대충 구겨 주머니에 넣고 다시 회사로 돌아간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몇 달째 잠을 못 잔다거나. 남자와 헤어졌다거나.
아니면 그 남자가 다른 여자를 금세 만난다는 그런걸 들킬까 봐.
그냥 누구나 하는 이별을 한 것뿐이야.
배신당한 게 아니야. 이별을 한 거야.
주머니 속 약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점심을 먹고 돌아온 사람들의 옷에서 짙은 양파 냄새가 난다.
완벽한 결혼생활을 하는 수정이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한다.
“얼굴이 왜 그리 안 좋아. 누렇게 떴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얼굴을 바라본다.
확신과 도취에서 깨어난 민낯이다.
수정이 헤실거리며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얼굴은 밝고 환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다섯 알이 든 약봉투를 오른손으로 움켜쥔다.
이 정도로 되겠나.
신이 나에게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