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금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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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MBY



오랜만에 은정의 아파트로 간다.


그녀의 집에 살던 눈이 가느다란 바텐더는 베트남으로 갔다.

베트남이 요즘 한국인 관광객으로 넘쳐나 거기서 식당을 열겠다며.


오래된 아파트 정원에는 꽃들이 피어있다.

우거진 나무들이 아파트의 나잇 수 만큼 가지를 내어 깊은 그늘을 드리운다.

놀이터에는 그네를 타는 아이들과 체조하는 할머니들은 이야기 목소리가 섞여있다.

내 나이만큼 낡은 단지 안의 모든 냄새들이 낯설지 않다.


은정은 바텐더가 남겨둔 옷가지와 스니커즈 따위를 짙은 초록색 재활용 컨테이너 안에 버리고 있다.

그것들을 한꺼번에 구멍에 밀어 넣느라

그녀의 뒷모습이 무너지는 뚝방을 막고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발 한 짝이 굴러떨어진다.


함께 집으로 들어와 베트남 사람들이 삼겹살을 좋아하는지

소주도 잘 마시는지 따위의 이야기를 하며 티브이를 본다.

"바텐더도 이제 30대 중반이니 언제까지나 야간근무를 하며 살 수는 없겠지. 담에 우리 호찌민에 놀러 가보자."

은정에게 좀 궁색한 위로를 건네고 그들의 이별을 애써 유예했다.


하지만 은정은 빈틈없이 빈자리를 채운다.


“오늘 친구들 몇 명 불렀어. 너도 알지. 전에 예지랑 사귀었던 애. 걔네 헤어졌대. 걔랑 걔 친구들 놀러 올 거야.”

은정의 목소리가 가볍다. 버린 물건만큼 그녀는 다시 가벼워진다.


“뭐? 그럼 나는 왜 불렀어??”

새로운 사람들을 주말에 만나는 것은 계획에 없어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게 어색한 나는 이의를 제기한다.

“걔네랑 같이 놀자. 너랑 보기로 하고 좀 이따 걔랑 연락이 된 거야. 오랜만에 연락 온 거라 거절 못했어.”

가뿐해진 은정의 마음은 이미 내 연애의 무거움을 알아볼 수가 없다.


“그럼 나는 가고 너희끼리 보는 게 더 좋지.”

한 번 더 뒤로 물러나 본다.

“아니야. 걔만 오는 게 아니라 여자애 한 명. 남자애 한 명 이렇게 더 올 거야. 예지랑 사귀는 동안 못 만났잖아. 이제 끝났으니 다시 돌아가야지.”

‘다시 돌아간다’라는 그녀의 선언이 새삼스럽다.

‘끝이 난다’는 것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원래로 돌아가기 위한 것일까.

시간의 방향을 가늠하느라 머뭇대는 사이 그들이 들이닥친다.


은정이 말하는 걔, 는 은정의 친구 예지와 사귀다 최근 이별한 남자다.

예지는 은정의 고교 동창이다. 나도 간혹 만났던.

미술을 전공하고 예쁘장한.

그녀는 은정의 폭넓은 이성 친구들과 종종 연애를 했다.

은정은 예지를 부담스러워했지만 한편으로 동경하는 듯 보였다.

조금 엉성한 은정에 비해 예지는 야무지고 민첩했다. 그녀는 늘 은정이 마음에 두는 남자와 빠르게 연애를 시작했다.

그런 예지의 전 남자친구라니.


은정의 친구들답게 명랑하고 재미있다.

그들의 명쾌한 대화를 듣다 보면 근심이 사라지는 기분을 느낀다.


예지의 전 남자친구는 은정의 다음 연애 상대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어쩐 일인지 팝시클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칙칙한 색을 뒤집어쓴 나에게 자꾸 말을 건넨다.

예지에게도 했을 법한 칭찬과 호감 섞인 질문들을 던지고 지긋한 눈빛을 보낸다.

나는 적당히 웃으며 은정의 눈치를 살핀다.

은정은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가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든다.


은정과 내 눈이 마주친다.

“너 이제 집에 가야 하지 않아?”

“어? 어! 맞아 이제 가야지!”

나는 은정을 온몸으로 긍정하며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가방을 집는다.

키가 큰 예지의 전 남자친구가 일어선다.

“내가 데려다 주고 올게.”

모두의 대화가 일시에 멈춘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겠지.


나는 손을 내저으며 급히 은정과 집을 나선다.

은정은 급하게 나를 택시에 밀어 넣고 손을 흔든다.

숨이 차서 그만 웃음을 터뜨린다.

은정의 뒤로 늘씬하고 잘생긴 예지의 전 남친이 손을 흔든다.

나는 큰소리로 웃고 고개를 돌린다.

편안히 족발이나 뜯을 것으로 알았던 나의 토요일 저녁은

유쾌하고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경쾌함은 생각보다 유효기간이 짭다.

일요일 저녁 TV쇼를 보며 웃다가도 엔딩 화면이 뜨면

급하게 무거워지는 내 변덕처럼.


어두운 택시 뒷자리에 앉아 메시지를 보낸다.

- 나 이제 집에 가.- 11:23


응답없는 메시지가

나를 다시 현실로 되돌린다.


유쾌했던 나의 토요일 저녁은

다시 어둡게 잠금화면으로 전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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