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택시에서 내려 걸어가다 멈춰 선다.
집 앞에 네가 있다.
오랜만이다.
오래전 하숙집 앞 계단에 앉아 있던 네 모습이 생각나서 가슴 한쪽이 저릿하다.
아파트 입구에 있는 작은 정자에 앉아있던 너는
택시에서 내린 내 앞으로 다가온다.
“늦었네.”
너의 표정은 어렴풋이 슬프다.
“응. 은정이 집에 갔었어.”
우리는 조금 걷다가 놀이터로 들어간다.
그네에 걸터앉는다.
그네는 반들반들, 아이들의 기쁨이 스며있는 듯하다.
“미안해.”
네 시선은 자신감을 반영하는 척도인 듯
네가 초라해질 때 갈 곳을 잃는다.
“네가 선을 보는 게 조금 불편했어. 너도 힘들 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약간 힘이 빠져 그넷줄을 잡았던 손을 무릎 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여자는 정말 잠시 만난 사람이야. 한국으로 돌아올 때 완전히 끝났어.”
듣고 싶은 말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지.
네 말의 표면을 그대로 믿지 않으면 나는 버틸 수가 없어서
그냥 물러선다.
“그래. 알았어. 그리고 나도 미안해. 메일 본거.”
너는 그네에서 내려 다가온다.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입을 맞춘다.
너는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몸으로 표현하려 하지만
나에게 몸은 투박하다.
제아무리 섬세한 손과 눈, 입술이 나를 끌어안아도 내 모서리는 둥글어지지 못한다.
다만 슬픈 마음을 달래 보려 마주 안아본다.
너를 안아 이 모든 불안을 지울 수만 있다면
내 전부를 걸어 너를 안을 텐데.
“오늘 같이 있을까.”
“.......”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말로 못 해. 내가 네 앞에 오려고 뭘 했는지.”
“........”
“말로 못하는 게 있어. 내가 말하는 순간 너무 별거 아닌 일이 될 거 같아서.
내가 너한테 온 게. 니가 나한테 어떤 사람인지...”
내 어깨를 쥐어뜯듯 잡은 너는 전에 본 적 없는 표정이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다.
결국에 나는 체념한다.
무엇으로든 진심을 느낄 수만 있다면.
이성이 아닌 내 전부로 너를 이해할 수 있다면 기꺼이 해보겠다.
나는 너를 안고
너의 불안은 내 안에서 소멸된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서 이 밤도 결국에 내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