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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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MBY



혜정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 지 2년이 지났다.


그 사이 그녀의 전남편은 회사에서 제공하는 주상복합 아파트에 입주했다.

명품에 굶주렸던 사람처럼 그의 옷장과 신발장은

각종 로고가 범벅된 셔츠와 스니커즈들로 채워졌다.


그의 신축 주상복합 아파트에 초대될 만한 친구들은 내 친구이기도 했다.


검은색 반팔 티셔츠에 옅은 색 청바지를 입은 혜정은

그의 새 아파트 이름이라던지

그가 최근에 장만한 독일산 세단이 파란색이라는 따위의 정보를 들으며 앉아있다.

나는 혹여 그 자동차의 보조석에 어떤 여자가 앉아있었다거나

그의 신발장에 여성용 명품구두가 들어앉아 있다는 뻔한 이야기가 나올까

조마조마하다.


혜정은 말이 없다.

그녀의 조금 뭉툭한 손끝이 테이블에 놓인 냅킨을 길게 접었다 폈다 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다행히 여자에 대한 이야기는 없이, 그의 근황 브리핑이 힘을 잃는다.


혜정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저녁에는 중학생들을 상대로 과외 수업을 하고 아침이면 학원으로 향한다.

고교 시절 그녀는 제법 명석하고 성실했다.

그래서 좋은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멈추었다.


당시에 혜정에게는 진로에 관한 조언을 해줄 선배가 없었고

방문 앞에는 매달 내야 하는 월세와 생활비 청구서가 쌓였다.

엄마는 떠났고 아버지는 실업자가 되었다.

그녀는 21살에 대학로에서 받은 신용카드 덕에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그 후로, 제법 긴 시간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녀의 20대에는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라던가,

연애라는 달콤한 사치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버텼다.

나는 그녀가 말수가 적은 만큼 변덕도 적어서

신용불량에서 벗어나고 학자금 대출을 다 갚고 나면,

그 삶이 그럭저럭 평탄하리라 믿었다.

외모 외에는 크게 내세울 것이 없는 전남편과 결혼할 때도

그녀의 묵직한 품성이 가벼운 그를 잘 묶어둘 것이라 생각했다.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두 성질은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없는가.

가벼움과 무거움은 공존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일까.

그녀의 무거운 입술에서 나온 어떠한 말들이

혹은 그녀의 어떠한 침묵이 가벼운 그를 날아가게 했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결국 피고를 만든다.

죄를 물을 이유를 찾는다.

너는 이런 것을 잘못했고 그는 이렇게 틀려먹어서 너희는 끝이 났다고.

그리고 그것은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로 제 아이라 주장하는 여인들에게

아이를 반으로 나눠 주려는 왕처럼

나는 기어코 잘잘못을 가려내 각자에게 죄의 몫을 부과한다.

그것은 목적 의식 없는 과정이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반성이라거나

더 나은 시도를 위한 자기 성찰, 과는 무관한. 관습 같은 것이다.

나의 뇌는 잘잘못을 가려 상호 비참함을 이끌어내는 자판기 같다.


탁자 위는 혜정이 접은 냅킨 조각들이 하나둘 늘어간다.

무목적의 대화들이 오간다.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구별할 계획이 없는 듯

본 것과 들은 것들은 쏟아낸다.

너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냅킨을 접고 있는 혜정의 앞에 누군가는 휴지 조각을 쏟아내고

누군가는 죄의 정도를 가늠한다.


불행은 각자의 몫이다.


그녀가 입을 연다.

“잘 살겠지. 나도 잘 살 거야.”

그녀는 테이블 위에 널린 냅킨 조각들을 한손으로 쓸어모은다.

그리고 깨끗하게 빈 종이컵에 털어넣는다.


누구나 불행 앞에 무릎을 꿇는다.

우리는 모두 불행을 앞둔 채 오늘을 산다.

내가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는 동안 그녀는 바닥을 짚고 일어선다.


떠들던 소리가 잠잠해진다.



나의 머릿속도 짐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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