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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색으로 해.”
흰색 폴로셔츠를 입은 혜정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쇼핑가이드를 준다.
“오렌지나 연두색이 낫지 않아? 여자아기는 핑크, 이런 거 촌스러워.”
핑크색 시폰 블라우스를 입은 은정이 보편적 색 관념에 반론을 제기한다.
“어허. 촌스럽다니. 너 옷 핑크색 젤 많지 않아?”
희색, 검정, 회색으로 옷장을 채울 거 같은 혜정이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고 은정의 옷장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 말한다.
“그럼 두벌 사. 원피스랑 슈트로.”
나는 둘의 옷장의 극명한 색 대비를 떠올리며 절충안을 제시한다.
회색과 핑크.
검정과 연보라
두 사람의 옷장은 각자의 취향을 극명히 드러내고 둘의 취향은 말의 구조, 생각의 흐름, 표정의 미세한 변화에도 영향을 미친다.
옷장을 열어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을지도.
내 옷장은 무채색 옷들 속에 간간이 단색의 명랑한 셔츠들이 자리하고
더 깊은 곳에는 반짝이고 매끈한, 혹은 섬세하고 취약한 소재의 옷들이 숨어있다.
결혼을 한 번씩 해본 두 여자는 제법 아가들의 취향을 아는 듯 실랑이를 한다.
은정은 아가 옷을 선물 받아 본 적이 있으니 더욱 익숙한 기운이 흐른다.
그녀는 아가를 품고 5개월 만에 유산했다. 결혼하고 한 달 후였다.
그때 나는 연두색 내복을 선물했다.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파란색과 연두색 사이에서 잠깐 망설였었다.
그 연두색 내복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은정에게 묻지 못했다.
제법 큰 쇼핑백을 들고 세 여자는 호텔로 향한다.
정민의 아가는 건강하게 자라, 탄생 100일을 맞이했다.
금은색 풍선과, 르네상스식 액자들, 오방색 떡과 짙은 초록빛 한복을 입은 아가가 함께 어우러져 소위 요즘 유행하는 백일상의 모습을 연출한다.
아가는 몸을 가누지 못해 삐뚜름하게 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사진을 찍는 남자가 아가를 웃겨보려 애쓰지만 소용이 없다.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정민은 초록색 한복을 입은 아가를 들어 안고 달랜다.
저기 한쪽에 정민의 통통한 남편이 어색한 듯 서 있다.
종잇장처럼 여윈 그녀가 아가를 안고 웃는다.
하얀 피부가 검은 드레스와 대비를 이루며 더욱 창백한 모습이다.
우리는 정민의 부모님과 짧게 인사를 나누고 정민의 남편에게도 축하의 인사를 건넨다.
저 남자도 아빠가 되는구나.
모든 아버지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는 않구나.
내가 아는 아버지는 잠든 폭풍을 품은 바다와 같았다.
정민의 아가는 연못 같은 아버지를 두었나.
흐르지 않고 고요하여 시간을 멈춘 듯한 오후의 연못.
아가는 결국 잠이 들었다.
“사진 촬영은 식사 후에 마저 하겠습니다.”
사진을 찍던 남자는 테이블 사진 몇 장을 더 찍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정민이 테이블에 앉는다.
“좋아?”
은정이 장난스럽게 정민의 어깨를 툭 친다.
정민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응 좋아.”
“뭐가 좋아. 지금도 벌써 난리구만.”
은정은 가느다란 정민의 팔뚝을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감싸며 눈꼬리를 내린다.
우리는 모두 눈썹을 아래로 내리며 정민의 가느다란 팔을 본다.
미간에 주름이 진다.
정민이 소리 내어 웃고는 말한다.
“정말 좋아. 해봐야 알아.”
삶은 결국 경험으로 채워진다.
정민은 지금 36.5도다. 딱 봐도 체온에 맞는 사랑을 하고 있다.
해봐야 아는 그 무엇을 너는 결국에 찾았구나.
이 파티는 아가를 위한 것이기도, 그리고 너를 위한 것이기도 하구나.
“정민아 축하해.”
나는 진심을 다해 축하를 건넨다.
너의 그 기쁨 앞에서 나는 문득 엄마를 떠올린다.
젊었던 당신도 나를 안고 따뜻하게 웃었겠지.
“고마워.”
정민이 웃는다.
그녀의 인사가 따뜻한 물결이 되어 가슴에 닿는다.
찰랑찰랑.
가득 차오른 그녀의 마음이 조용히 스며든다.
아가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정민이 일어선다.
아가를 향해 달려가는 그녀의 목소리가 힘차다.
“사진 찍자. 온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