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머리를 묶는다.
네가 묶어주던 긴 머리는 이제 겨우 한 손에 잡힐 만큼 짧다.
작고 볼록한 점을 만져본다.
이미 두 번이나 주었던.
공원이었나.
더웠던 기억만 남았다.
우리가 다시 연애를 시작한 그 여름,
너는 첫 데이트 때 곧장 내 점을 확인했다.
“보자. 아직 그대로 있나?”
너는 긴 머리카락과 목덜미 사이로 손바닥을 밀어 넣었다.
네 지문이 살에 닿았다.
간지러워 몸이 꼬였다.
“더워. 너 손에 땀 묻는다?”
“그래도 잠시만 기다려봐. 음. 마음이 차분해지는 거 같단 말이야.”
너는 한 손으로 내 팔을 잡고 다시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네가 내 몸의 표징을 기억하는 것이 사랑스러워
다시 한번 공약을 걸었다.
“점은 나한테 있지만 소유권은 너한테 있으니까. 언제든지 만져도 돼.”
“다 내 거라며. 점뿐 아니라. 전부.”
“내가 그랬어?”
나는 시치미를 떼었다.
“뭐야. 계약서라도 써야겠는데?”
너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내 거야. 하지만 이 점은 너한테 줄게.”
“필요할 땐 언제든지 오는 거야? 그럼? 내가 어디에 있던지?”
표정이 밝아진 너는 들뜬 목소리로 확인했다.
“응. 어차피 나는 아무 데도 안 갈 거니까.”
나는 너의 눈을 마주 보며 확언했다.
“혹시 가면?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게 되면?”
너는 내 점 위에 손을 갖다 댄 채 만약에를 가정했다.
“그럼 언제든지 내가 갈게. 택배 상자처럼.”
우리는 그 모든 만약에,를 끌어안고 웃었다.
뜨겁고 짙은 초록의 잎 사이사이로
온통 경쾌한 매미소리가 스며들었다.
지금, 거울 속에 나는 내 몸의 일부를 잃은 모습이다.
묶지 않기로 한다.
흔한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의 주말 아침은
공부하는 학생들과 드물에 보이는 연인들로 시작된다.
엄마가 사라진 집에 혼자 있는 것이 어색해
네가 하자는 대로 토요일 오전9시에 이곳으로 왔다.
'헤어진 연인과 재회하기에 좋은 시간'이란 없으니까.
“생일이라 전화했었어. 그런 일이 있는 줄은 몰랐다.”
마주 앉은 너는 여전히 곧은 시선을 숨기지 않는다.
“그래.”
“......”
“고생했어.”
'그 여자는 어디 갔어?'
라고 묻고 싶다.
수십 번도 더 했던 질문이지만 여전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다.
“계속 연락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었네.”
“.......”
커피가 담긴 컵에 맺힌 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헤어진 사람한테 뭘 연락을 해.”
"그래. 그렇지. “
너는 어색하게 웃는다.
”많이 힘들었겠다. “
네 목소리가 조금 떨린다.
”응... “
투명한 컵 아래에 흘러내린 물이 고인다.
“괜찮아”
그 모든 의미를 담은 괜찮아.
너는 한동안 멈춤없이 나를 본다.
그런 네 시선이 낯설지 않다.
“보고 싶었어.”
내 심장을 주무르던 너의 한마디.
한 번에 나를 달리게 만들었던 마법.
그 후의 말은 스스로 짐작해야만 했던 우리의 대화.
나는 묻지 못하고, 너는 미리 답하지 않았던
창과 방패의 이야기.
왜.라고 물어야 하지만
그저 조용히 매듭을 만든다.
“이제 괜찮아.”
매듭 하나.
“지나간 일에 마음 쓰지 않아도 돼.”
매듭 둘.
“너는.. 참..”
끝을 흐리는 말투.
늘 다음 순서를 넘기는 너.
물어보고 싶었다.
우리가 정말 사랑을 했던가.
그게 정말 사랑이었을까.
“난 정말 괜찮아.”
마지막 매듭.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다.
“민주야....”
네가 나를 조용히 부를 때 살아있음을 실감했었다.
네가 나를 바라볼 때 내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구나 깨닫곤 했다.
내 이름이 너로 인해 불릴 때
그 이름이 나인 줄을 알았다.
지금도 너는 나를 부른다.
엄마도 그렇게 내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마저 잃게 되기 전, 병실에서.
“민주야....”
“응?”
나는 엄마가 혹시 물이라도 마시려나 해서 급하게 다가갔다.
“너는 복 받을 거야.”
너로 인해 존재하던 나는 이제 없다.
너는 또 한 번 내 이름을 부른다.
“민주야.... 너 벌써...”
“......”
“너 혹시 벌써 누가 생겼어?”
조악한 추측에 조금 당황한다.
그리고 벌써,라는 수식어는 너와 어울리지 않는다.
벌써. 라니.
나는 내가 그날 본 장면을 잘게 씹어 삼킨다.
너의 그녀는 어디에 있냐고 반문하고 싶다.
우리의 첫 이별에도 너는 나를 책망했다.
벌써.라는 단어에 비난과 책망, 의아함과 멸시의 뉘앙스가 있다는 것을
널 통해 처음 알게 된다.
“민주야....”
이제 마지막이다. 내 이름이 너에게 불리는 일.
찬란한 시절이 빛을 잃고 스러진다.
우리는 이미 다 했다.
“잘 가.”
길 위에서 돌아선다.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
빌딩 숲 사이로 불어 드는 더운 바람에 가로수가 미세하게 경련한다.
점심을 배달하는 오토바이들이 급하게 지나간다.
가로수 아래에는 갓 벗은 매미의 허물들이 흩어져있다.
지나가는 여름의 풍경들이 귀엽다.
버스 정류장 옆 신문판매대에 주말 신문이 꽂혀있다.
2009.8.8.토요일
신문 1면에 <명랑하게 살아야 행복하다 >라는 기사 제목이 보인다.
그래. 내 다음 이야기는 조금 더 밝고 경쾌한 스토리가 되기를.
축복으로 채워진 내 이름이 가장 따뜻한 음성으로 불리우기를.
저기 버스가 보인다.
나는 명랑하게 일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