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엄마가 사라진 집은 새롭다.
엄마와 집이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아빠와 나는 느지막이 일어나 함께 라면을 끓여 먹는다.
창너머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집안의 적막이 집 밖의 소음으로 흐려진다.
"아빠, 출근은 언제부터세요?"
"응. 내일 출근하려고. 너는?"
"아 네. 저는 사흘 더 쉬어도 되요."
"그래."
묵묵히 자기 몫을 먹고 각자의 공간으로 향한다.
나는 방으로, 아빠는 거실로.
방에 앉아 거실의 TV소리를 듣는다.
영화 채널이 여러번 바뀌는 듯, 효과음이 다양하게 들려온다.
서랍을 뒤지다 엄마의 머리핀이나 귀걸이 같은 것을 발견하면
또 한 번 펑펑 울 수 있나 생각한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우는 편이 덜 슬프다.
화장대 서랍을 열어 둘러본다.
립스틱과 매니큐어. 여행용 화장품들.
주소나 전화번호가 적힌 포스트잇.
뒷면에 내 이름이 있는 편지 봉투.
엄마의 소지품은 딱히 보이지않아 한편으로 안도한다.
대신 작은 종이상자가 눈에 들어온다.
작고 납작한 금색 상자에 푸른색의 작은 비닐 꽃이 달려있다.
“이거.”
네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사귄 지 백일.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기념일을 다른 사람과 보내었기에
새삼스레 그런 날을 기념하는 것이 서로에게 미안했다.
아니 적어도 너는 그러지 않았을까.
첫 결혼식, 첫 결혼기념일. 첫 아이의 탄생. 첫 아이의 백일.
너에게 모든 처음은 내가 아니기에,
여러 개의 고리가 달랑거리며 내 손 위에 올라앉았다.
“이게 뭐야?”
“응. 반지.”
너는 쑥스러운 듯 눈을 맞추지 않고 답했다.
“반지? 그냥 고리들 같은데?”
“이게 퍼즐 같은 거라 잘 맞추면 반지가 되거든. 네 손가락 사이즈에 맞을지 모르겠다.
최대한 작은 걸로 고르긴 했는데.”
“이런걸 어디서 사? 신기하네..”
“응 호주에 있을 때 여행하다가 산 거야.”
그가 이혼 후에 도망치듯 호주로 떠났었다는 걸 기억해내곤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호주에서? 그때 날 만날 걸 알고 있었어? 대단한데?”
그의 도피성 유학이 안쓰러워 나는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너 손이 너무 작아서... 거기 애들 사이즈에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더라고.”
“뭐야. 거기서 내 손가락 사이즈를 기억해냈단 말이야? 나랑 헤어진지가 언젠데?”
내 설렘은 네 진지한 표정을 만나 더욱 가벼워졌다.
살랑살랑 떠오른 심장소리를 가려보려 한 번 더 웃었다.
“대체 날 얼마나 좋아한 거야? 흥, 이놈의 인기란.”
마음 안에 작은 공이 통통 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밝고 경쾌하게.
물어보고 싶었다.
정말 날 생각하며 산 거냐고
질문과 답변 사이.
나는 언제나 그 간극 사이에서 망설였다.
너는 이리저리 고리들의 방향을 맞추었다.
“잘 봐. 이게 순서가 있어. 이렇게..”
나는 숙였던 상체를 일으키며 네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몰라. 풀리면 네가 다시 맞춰주면 되지. 언제까지나.”
너는 고리들을 맞추던 손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언제까지나? 평생 맞춰 달라구?”
“응. 나 죽을 때까지. 그러니 나는 절대 안 배울 거야.”
나는 네 오른팔에 내 왼팔을 밀어 넣으며 나지막이 웃었다.
“곤란한데. 숨넘어가는 순간에도 나보고 이걸 맞추라고 하겠다는 거야? 내가 먼저 죽으면 어쩌려고.”
“그럼 맞춰놓고 가. 내가 몇 년 더 끼고 있다가 따라갈게.”
네 앞의 내가 새삼 아름답다, 여겼다.
그래서 감히 너와 죽음 앞에서도 함께 할 거라 확신했다.
우리는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귀가 잘 맞추어진 고리들이 반지의 형태를 갖추었다.
내 가운데 손가락에도 살짝 큰 반지는 자꾸만 흐트러지려고 안달을 냈다.
“역시 크구나.”
살짝 힘이 빠진 목소리.
“괜찮아. 예쁘다. 세상에 이런 반지는 처음 봤어.”
나는 그저 반지로 모양을 갖춘 고리들이 신기하여
오른손가락으로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쓰다듬었다.
“응. 나도 신기하다고 생각했어. 너는 좋아할 거 같았어. 근데 은이라 색이 변할 거야.”
너의 이유는 다정했다.
‘너는 좋아할 거 같아서.’
너의 그 이유가 나에게 필연성을 부여했다. 단단하게.
“매일 끼면 되지.”
나는 야무진 다짐을 내밀었다.
“응. 풀리면 내가 다시 맞춰줄게.”
기억으로부터 돌아온다.
작은 종이상자 안으로.
나는 반지나 귀걸이, 시계 같은 것을 착용하지 않아서
한동안 헐렁한 반지를 끼다가
이내 화장대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이미 여러 방향으로 풀어진 고리들은 제각각 자유롭다.
색은 이미 검게 변해있다.
이리저리 맞추어보려 애를 쓰지만
고리들은 서로 맞아볼 생각이 없다.
컴퓨터를 켜고 검색창을 열어본다.
'퍼즐형 반지' '고리 여러 개 반지'
검색어를 입력한다.
퍼즐 반지.
15세기 터키에서 남성이 아내에게 선물하던 웨딩링에서 유래됨.
아내의 정절과 영원한 사랑을 상징함.
이제 맞출 수 없는 고리들이 그저 고리로 뒹군다.
나는 어떤 기술로도 이 반지를 맞출 수 없다.
그리고 이미 이 반지를 맞출 열정도 인내도 갖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