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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트릭스가 한국 아이돌인가요

내가 한국을 사랑하는 이유 7

by ZAMBY




어렸을 때 토크쇼를 많이 보고 자랐다.


내가 어렸을 때는 콩트로 구성된 코미디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었는데

유머 1번지에는 그 유명한

띠리리리리리(양 엄지를 치켜세우며 춤을 춰야), 잘되야 할 텐데(이마를 주먹으로 때리며), 움메 기죽어 움메 기 살아(장구로 박자를 맞추며) 같은 유행어를 하루에도 열두 번 들을 수 있었다.


조금 더 자라서 일요일일요일밤에라는 프로그램에서 토크쇼 비스므리한 코너가 있었는데

주병진이라는 MC와 노사연이라는 가수가 진행을 아주 잘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부터었나.

밤이면 부모님이 틀어둔 채널에서 한국어 발음이 어눌한 자니윤이라는 아저씨가 유명인을 앉혀놓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왔다.

이후로 이승연, 김혜수, 노영심, 이소라, 등등 센스 있는 여성 MC들이 종종 야밤에 토크쇼를 진행했었다.


나름 성인이 된 후로는 그런 토크쇼를 잘 안 보게 되었고

부채도사를 재밌게 본 이후로는

연예인들이 주로 나와서 사는 이야기를 하는 프로그램에는 시큰둥했던 기억이다.


미국에는 장수하는 토크쇼 프로그램이 있는데

지금 가장 유명한 토크쇼 진행자는 지미팰런(투나잇 쇼)과 코난 오브라이언(코난쇼), 또 한 명 더 있는데 이름을 못 외운다. 투나잇 쇼와 코난 쇼는 우리나라 유튜브에도 종종 나온다.

며칠 전 지미 팰런의 투나잇 쇼에 헌트릭스가 출연했다.

토크만 한 게 아니라 빌보드 싱글 차트 연속 8주 1위에 빛나는 Golden을 라이브로 불렀다.


지난여름.

아마도 아이들이 방학을 시작할 즈음이었던 것 같다.

한국 애니메이션이 넷플릭스에서 1위를 하고 있다며 아이들이 케이팝 디몬 헌터스를 틀었을 때

나는 좀 시큰둥했다.

오징어 게임 같은 건가.

이제 드라마를 넘어 애니메이션도 먹히는구나.

그 정도 자부심 같은 감정을 느낄 뿐

그래봐야 만화영화지 뭐. 하곤 지나쳤다.


귓가에 들려오는 ost가 뭔가 범상치 않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그래도 그 '만화영화'를 나도 봐야겠다는 생각은 못했다.


그리고 여름이 한창인 8월.

내가 사는 미국의 어느 동네를 가나 헌트릭스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아이들은 떼창을 불러댔고

넷플릭스 메인화면에는 여전히 보라색 드래건 머리를 한 소녀가 보였다.


그제야 나도 이걸 봐야 하는 건가. 싶었다.


아이들은 이미 예닐곱 번은 반복 시청한 덕에

노래뿐 아니라 대사까지 모두 외우고 있었다.

애들이 이렇게 좋아하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겠지 싶어

오늘 같은 토요일 밤. 함께 아이들에게는 9번째, 나에게는 첫 번째 시청을 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이 만화영화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여러 소문과 추측이 난무했다.


그러던 중에 이 애니메이션은 메이드 인 코리아가 아니라 소니뮤직이라는 것.

이재.라고 하는 한국계 미국인이 작사작곡을 했다는 것. 정도를 알게 되었다.

아이들에게는 어설프게 조사한(?) 지식으로

"어쩐지. 한국 애니가 이 정도로 잘 만들 단계는 아니야. 한국 거 아니래." 라거나

"작곡가가 한국서 아이돌 연습생이었대. 음악심리학을 전공했다네. 공부를 많이 해서 그런가 야. 가사가 고급지다야."

이런 소리를 해댔다.


그러던 중에 한국의 대표 토크쇼 유퀴즈에

이 영화의 디렉터인 메기 강 감독이 출연한 영상을 보게 되었고

참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솔직히 감독에 대해서는 검색도 안 해본 무관심한 한국 아줌마인 나는

한국계 미국인 여성이 저런 굉장한 영화를 만들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었다.

그리고 4살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 한국 문화에 대해 전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그녀가

끈질기게 한국을 알리고 싶어 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넘어 의아하기까지 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계 미국인에게 그런 애국심(?) 같은 것이 자리한다는 것이

토종 한국인인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주변의 이민가족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공통적으로 돌아온 답은 이랬다.


이민 2세대의 부모가 영어를 못할수록 이중언어를 사용하기 유리하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극심한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결국 내 뿌리가 한국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내 오리진에 대한 강한 애착을 느낀다.


역설적으로 부모님이 영어를 못하면 가정에서 한국어를 주언어로 사용하므로

두 언어를 모두 사용하게 되고

유년기를 큰 이질감 없이 친구들과 어울리다가도

사춘기를 지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고민하게 된다고 했다.

그 계기가

다른 국적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문화와 정체성으로 인한 것인지

우리의 DNA에 새겨진 것인지.

아니면 다른 외모로 인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많은 한국계 미국인들이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고 했다.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나 역시 미국에서 내 나라에 대한 애정이 커지니까.

내 나라가 잘 살았으면 싶으니까.

뭐라 뭐라 욕하고 미워해도 별 수 없다는 걸 안다.

내가 내 가족을 버릴 수 없듯이 내 나라도 비슷한 존재다.

K-Pop이 뉴욕 한복판에서 들려오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제니 얼굴이 라스베거스 거리 광고판에 보이면 한참을 서서 바라본다.

한글을 설명하면서 우리나라에 엄청 훌륭한 왕이 있었다고 자랑하고

김밥이며 잡채, 호떡을 소개할 때 열과 성을 다한다.


미워하고 욕하고 한숨 쉬고 조롱해도

그게 다 애증이 아닌가.

그렇게 미워서 다퉈대던 내 동생도

누가 와서 괴롭히면 눈이 뒤집어져서 함께 치고받던 우리라서.

야속한 부모를 일기장에 원망해도 아픈 부모 앞에서 마음이 아파오는 자식처럼.

니가 잘되야. 나도 잘되니까.

니가 좀 날 헤아려 주었으면.

그런 마음이 조금씩은 있지 않을까.


요즘 한국을 표현할 때

내가 만난 미국인들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단어는

trendy. 다.


트렌디하단다.

우리 한국이.

하긴. 그래서 소니가 영화를 만들었겠지.

그러니 한국계 감독이 한국계 영화인들을 모아서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만들어도

전 세계가 먹어주는 거 아니겠나.


토크쇼에서 헌트릭스가 어린 시절 김밥을 숨겨서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찡했다.

멋지게 라이브를 소화한 후에 한국식으로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을 보며

고생했다고 등을 두드려 주고도 싶었다.


알고 있다.

그들은 미국 시민권자다.

하지만 때로는 내 나라에 살고 있는 나보다 더 내 나라를 자랑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감사하다.

내 나라에 사는 나도 별 생각이 없는데

이제 남의 나라일지도 모르는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진심으로 해줘서.


유퀴즈를 함께 보던 아이가 물었다.

"엄마 저 감독은 어떻게 한국어를 저렇게 잘해?"


순간 '종이 동물원'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그래서 아이에게 답했다.


아마도 집에서는 한국어를 사용한 게 아니었을까.

이민 온 부모님들이 모두 영어가 능숙하진 않았을 테니까.

적어도 집에서는 한국어를 사용했으니 저렇게 자연스럽게 두 개의 언어를 사용하게 된 걸 거야.


종이 동물원에서 작가 켄 리우가 어떤 메시지를 주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정말 '뿌리'라는 것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유산. 혹은 헤리티지.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정체성이라고 불러야 할까.

세계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에게서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인간이 왜 그 뿌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지.

떼려야 뗄 수 없는 근원적인 그것.


지극히 미국적인 미국 토크쇼를 보고도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생각을 하는 나는

정말 뼛속까지 한국 사람인가 보다.

그리고 정말 늙어 가는가 싶다.

나는 종이 동물원의 아들이 아닌 엄마에게 마음이 기우는 걸 보면.

그리고,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20년 전에 내가 여기서 아이를 키웠다면

내 딸도 그 예쁘고 맛난 김밥을 한알씩 숨겨 먹었을 테지.


아직은 그들에게 완전히 인정하기 어려운, 그저 유행스러운, 문화일지 몰라도

언젠가 세계사에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세계 문화의 판도를 흔든, 변방의 이단아로 대한민국이 기록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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