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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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MBY


회색으로 산다.


혼자인 듯. 비혼인 듯. 사랑이라곤 모르는 여자처럼.

무채색의 옷을 고르고

튀지 않는 구두에. 무난한 헤어스타일을 고수하며

있는 듯 없는 듯 책상을 지킨다.


사랑의 환희로 가득 차 찬란하게 빛나는 시절에도

내 연애가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검은색 크레파스로 그 위를 덮었다.

몰래 표면을 긁으면 새어 나오는 오색찬란한 빛깔에

스스로 취했다.

행복은 비밀 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행복은 감추어야 더 아름답다고.


지나고 보면 행복은 그 자체로 빛나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컷 빛나야 그 빛이 동력을 잃을 때

다시 붓을 들고 물감을 덮을 수 있다.


나는 실패했다.

몰래 숨겨둔 곶감에 피어난 곰팜이처럼,

내 사랑은 아무도 모르게 시들어갔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사무실에 나란히 앉은 수정이 남편에게 받은 가방을 자랑했고

발렌타인 데이 초콜릿 포스터가 동네 빵집마다 붙어있었다.

하늘이 흐렸고 바람은 쌀쌀했다.


“발렌타인데이인데 약속 없어?”

수정이 헤실거리며 다가왔다.

“응. 저녁에 친구 만나려구.”

모니터를 바라보며 너와의 저녁 약속을 생각했다.

“연애 안 해? 소개팅은?”

수정에게 또 자랑거리가 생긴 거 같았다.

나는 계속 모니터를 응시하며 자판을 두드렸다.

“응 가끔.”

수정은 아예 내 책상으로 의자를 밀고 들어왔다.

손에 뭔가 들려있었다.

나는 곁눈으로 그걸 보았다.

“남편이 오늘 출근하는데 이걸 주더라구. 장미꽃이랑.”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눈웃음이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그녀는 눈이 사라질 듯 웃으며 가방을 내밀었다.

“구하기 힘든 거라던데. 매장에 가서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사 왔더라구.”

“정말 스윗하시다.”

나는 그녀의 의자를 살짝 밀면서 대답했다.

“너두 결혼해. 얼마나 좋은데.”

엉겨 붙는 의자를 확 밀어내고 싶었다.

누구라도 와서 그녀의 새 가방을 찬양해주었으면.

그녀의 완벽한 결혼생활을 칭송해주기를.

하지만 이른 오전 사무실에는 아직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수정은 가방을 제 가슴팍에 끌어당겨 안으며

무해한 나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여자는 타고난 복이 있어야 하는 거 같아.

나는 그런 말 안 믿었거든? 근데 살아보니 어른들 말이 다 맞아.

사랑받는 것도 다 사주에 있대.”

창자가 꼬였다.

뱃속이 뒤틀려 간장을 달구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원망이 너를 향해 가시를 세웠다.


06:20 pm

수정은 가죽 냄새가 물씬 나는 가방을 들고

다정한 남편이 있는 어딘가로 갔다.

그리고 나는 너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네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저녁을 함께 먹었다.

파인애플로 육질을 부드럽게 만든 두툼한 스테이크와 구운 채소를 먹고

적당히 쌉쌀한 붉은색 와인을 마셨다.

다른 연인들과 다를 것 없는 발렌타인 데이를 보내고 있었다.


"수정 알지? 오늘 남편한테 몇품가방을 선물받았다고 아침부터 자랑을 하는거야."

"아, 그 여자? 남편 의사라는?"

"응. 글쎄. 사랑받는 여자는 사주팔자때문이래. 자기 복은 다 타고난거라는거지."

"......"

너는 웃으며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그럼 내 팔자는 박복해서 이렇다는 말을 하고 싶은건가 싶었어."

고기를 씹던 네 표정이 순간 굳었다.

"너가 어때서."

"아니. 수정에 비해서...자기 눈엔 여태 결혼도 못한

내가 사랑받지 못할 여자라고 보였겠지."

너는 고기를 마저 씹는다.

순간 수정의 의기양양한 표정이 겹쳐지며

아침에 느낀 굴욕감과 조바심이 급격하게 밀려왔다.


"모르겠어. 수정 말이 맞는거 같기도해. 사주팔자가 이런걸 어쩌겠어."

나는 점점 운명을 맞추는 점쟁이가 되어 너를 몰아갔다.


"그래. 너나 나나 운이 없나보다."

너는 손에 든 포크를 탁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왜 운이 없다는거야?

나도 널 만나서 엉망이 된버린거 안보이니?"

말 꼬투리를 잡고 매달렸다.


그리고 메일 속의 여자를 다시 불러냈다.

"그 여자처럼, 나도 엉망이 되버렸어. 너때문에."


귀한 사람이고 싶다는 표현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배운적이 없었다.


네 눈이 이글거렸다.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니가 그 여자랑 호주에 남았으면 내 인생은 더 나았을거야."

과거의 여자를 잊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네가 아니라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는 더이상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가라."

나는 숨이 멎은채 앉아있었다.

"나가. 그만하자."

너는 고개를 숙인채 서늘하게 내뱉었다.


그리고 발렌타인데이는 나의 이별 선고로 마무리되었다.

"그래. 헤어져."

귓속에서 삐 - 가느다란 잡음이 들렸다.

네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 눈을 보기 두려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문옆에 놓인 케이크 상자를 지나쳐 방을 나왔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너의 번호를 차단한다.

이참에 내 인생을 바로 잡겠다 결심을 한다.

나도 수정처럼 자랑스러운 결혼생활을 해야지.

늦기 전에 정민처럼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질 거야.

평안과 충만으로 가득한 연애를 하겠어.

이만하면 된 거야.


네모난 방안에 모로 누워 분노와 원망으로 꿈을 만든다.

내 희생을 깨닫지 못하는 너에 대한 분노.

너를 선택함으로 내가 느껴온 불안에 대한 원망.


나는 마치 네가 아니었다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을 만한 사람인 양 나 자신을 포장한다.


나의 창이 너를 찔렀다.

너의 방패는 내 창 앞에 무력하구나.

나는 제대로 된 공격을 한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창을 거둔다.

창끝에 묻은 피는 누구의 것인가.

곁에 창을 누이고 잠을 청한다.

심장소리가 들려온다.

쿵쿵.

창을 쥔다.

나는 누구를 찔렀던가.

쿵쿵.

심장소리가 멀어진다.

창이 밝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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