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 민음사
이제 그는 벽에 그려진 그림들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온통 야릇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이 그림들엔 이상하게도 그를 감동시키는 무엇이 있었다.
방바닥에서 천정에 이르기까지 사방의 벽이 기이하고 정교하게 구성된 그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이 기이하고 신비로웠다. 그는 숨이 막혔다. 이해할 수도, 분석할 두도
없는 감정이 그를 가득 채웠다. 창세의 순간을 목격할 때 느낄 법한 기쁨과 외경을 느꼈다고 할까.
무섭고도 관능적이고 열정적인 것, 그러면서 또한 공포스런 어떤 것, 그를 두렵게 만드는 어떤
것이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감추어진 자연의 심연을 파헤치고 들어가, 아름답고도 무서운 비밀을
보고 만 사람의 작품이었다. 그것은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신성한 것을 알아버린 이의
작품이었다. 거기에는 원시적인 무엇, 무서운 어떤 것이 있었다. 인간 세계의 것이 아니었다.
악마의 마법이 어렴풋이 연상되어다. 그것은 아름답고도 음란했다. p.293
나이 마흔, 증권 브로커라는 안정적인 직업,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그림을 그리겠다면 집을 나온 남자, 찰스 스트릭랜드. 이야기는 줄곧 그의 이름처럼 강인하고 엄격한 남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 글을 이끌어가는 작중 화자는 이제 막 문단에 발을 들여놓은 작가이며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스트릭랜드의 아내인 에이미는 예술가를 초대해 오찬회를 즐기는 사교적인 성격이다. 그런 그녀에게 워낙 말이 없고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도 없다는 남편이 자랑거리는 되지 못했던 것. 스트릭랜드는 그저 선량하고 따분하고 정직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주변을 늘 우아하게 꾸밀 줄 알았다. 그녀의 집은 언제 봐도 깔끔하고 상쾌했으며, 병에 꽂힌 꽃은 늘 명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응접실의 사라사 커튼은 디자인은 간소했으나 밝고 아름다웠다. 예술적인 정취가 있는 그 조그만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 기분이 좋았고, 식탁도 훌륭해 보였다. 하녀가 둘 있었는데 모두 단정하고 예뻤으며, 음식 솜씨도 좋았다. 누구라도 스트릭랜드 부인이 훌륭한 주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p.29
그런 그가 결혼 17년 만에 편지 한 장 써놓고 집을 나간 것이다. 그의 증발은 회사는 물론 지인, 가족 누구도 알지 못했다. 모두들 여자와 바람이 난 것이라며 에이미는 작가에게 남편을 설득해 데리고 와달라는 부탁을 한다.
에이미 보시오.
집 안은 다 잘 정돈되어 있으리라 생각하오. 앤에게 당신이 말한 대로 일러두었으니 돌아오면 당신과 아이들 식사가 준비되어 있을 것이오. 하지만 나는 당신을 보지 못하오. 당신과 헤어지기로 마음 먹었소. 내일 아침 파리로 떠날 작정이오. 이 편지는 그곳에 도착하는 대로 부치겠소. 다시 돌아가지는 않소. 결정을 번복하진 않겠소.
찰스 스트릭랜드 p.51
부인의 부탁을 받고 파리로 떠난 작가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낡고 허름한 호텔에 있는 스트릭랜드를 만나고 그가 정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작가는 스트릭랜드의 결정이 단호하고 결코 영국으로 데리고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부인에 대한 애정도 없고 아이들도 그동안 편안하게 살았다며 여차하면 이모네가 도와줄 거라고 말한다.
그는 타인에 의한 자신의 해석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한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라면 인간의 도덕적 잣대 따위는 아무렇지 않다고 말한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p.69
영국으로 돌아온 작가는 여자 때문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그림 때문에 가족을 버렸다는 말에 부인도 더 이상 남편에 대한 미련을 버린다. 차라리 나이 마흔에 가족을 버리고 그림을 그리겠다는 이유가 여자가 생겨서 집을 나간 이유보다 더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다. 워낙 재주가 있었던 에이미는 아가씨들을 고용해 타자를 치는 사무실을 냈는데 사업이 아주 잘 되었다.
5년 후 작가는 영국생활이 지겨워 파리에서 한동안 살기로 결심한다. 예전부터 알고 지낸 네덜란드 화가 더크 스트로브를 통해 스트릭랜드가 천재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더크는 잘 팔리는 그림을 그리는 그렇고 그런 화가지만 그림을 보는 눈만은 명석해서 그 당시 유일하게 스트릭랜드의 그림을 알아본 인물로 나온다.
어느 날 소식이 끊긴 스트릭랜드를 찾았더니 병에 걸려 다 죽어 있었다. 더크는 그를 자신의 화실로 데리고 와 병간호를 하고 싶었으나 그의 부인이 완강하게 거부한다.
더크의 아내인 블란치가 스트릭랜드에게 빠져 남편을 버리겠다고 선언하자 왜 그제야 이렇게 반대했는지 이해한다. 병세도 점점 호전되자 스트릭랜드는 더크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같이 못 그리겠다며 주인을 쫓아낸다. 그럼에도 순순히 쫓겨나주는 더크 스트로브. 이런 호구가 또 있을까?
자신에게 없는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는 사실 하나로 스트릭랜드의 모든 것을 감내한다. 아내가 그를 따라 집을 나가겠다고 하는데도 아내가 스트릭랜드의 그 지저분한 집에 있는 것이 더 괴로워 집과 화실을 남기고 스트로브가 오히려 집을 나온다.
결과는 뻔했다. 스트릭랜드는 여자에게 안주할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블란치는 음독자살을 시도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가 그린 아내의 누드화를 보고 분노로 들끓지만 이내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한번 사실대로 말해 볼까요? 당신은 다 죽어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더크 스트로브가 당신을 자기 집에 데려다 놓고 어머니처럼 간호했습니다. 시간과 안락과 돈을 희생해 가면서 말예요. 그래서 죽음의 아가리로 막 들어가려던 당신을 구해 냈어요."
스트릭랜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 그 이상한 친구는 남을 돕는 걸 즐기는 사람이오. 그게 그 친구 생활이지. p.199
스트로브의 호의도 결국엔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라는 스트릭랜드.
스트릭랜드에게 사랑은 그저 쾌락을 충족시키는 한순간의 수단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예술에 영혼을 팔수만 있다면 스트릭랜드는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가족도 친구도 사랑도 필요 없을 만큼 내 영혼을 모두 바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고.
난 사랑 같은 걸 원치 않아 그럴 시간이 없소. 그건 약점이지. 나도 남자니까 때론 여자가 필요해요. 하지만 욕구가 해소되면 곧 딴 일이 많아. 안 그 욕망을 이겨내지는 못하지만 그걸 좋아하진 않아요. 그게 내 정신을 구속하니까 말야. 나는 언젠가 모든 욕정에서 벗어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내 일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는 때가 있었으면 하오. 여자들이란 사랑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사랑을 터무니없이 중요하게 생각한단 말야. 하지만 사랑은 병이야. 내게 여자들이란 쾌락을 충족시키는 수단에 지나지 않아. 나는 여자들이 인생의 내조자니, 동반자니, 반려자니 하는 식으로 우기는 것을 보면 참을 수가 없소. p.202
야간 숙박소, 빵 급식소, 마르세유 항구의 밑바닥 생활을 전전한 스트릭랜드는 배를 탄지 6개월 만에 타이티에 도착한다. 플뢰르 호텔 주인 티아레의 주선으로 스트릭랜드는 타이티 소녀 아타와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는다. 타히티에 도착한 작가가 티아레, 부뤼노 선장, 쿠드라 의사 등의 이야기를 조합해 스트릭랜드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이 책에서는 중간중간 스트릭랜드처럼 '달'을 쫓아 새롭게 인생을 개척한 인물들이 나오는데 의사 아브라함과 선장 부뤼노의 삶이 그렇다.
아브라함은 실력 있는 의사로 미래가 보장된 인물이었다. 연수입, 예쁜 아내, 저명한 외과의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그가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안주할 것을 결심하기 때문이다. 어부지리로 성 토마스 병원의 자리를 차지한 알렉 카마이클이 아브라함을 한심하게 보지만 실상은 그 덕을 보고 살고 있는 인물이다.
부뤼노 선장은 파산한 뒤 섬을 통째로 사서 개척한 인물이다.
토론 중에 딸 셋을 두고 출가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의외로 이런 인물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트릭랜드에게 세 여인은 어떤 의미였는가가 원래 논제였는데 질문을 반대로 하자 굉장히 재미있는
대답들이 많이 나왔다. 에이미, 블란치, 아타 세 여인에게 과연 스트릭랜드는 어떤 의미여을까?
뭐든지 다 해주지만 간섭은 하지 않는 상태를 가장 이상적인 관계로 본 스트릭랜드에게 에이미나 블란치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으로, 연인으로 역할을 원했던 에이미와 블란치에게 스트릭랜드 또한 부족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타는 정말 위대해 보인다.
고갱이라는 화가를 모티브로 했을 뿐, 디테일한 설정들을 모두 가짜로 표현한 작가의 의도를 찾는 것도 재미 포인트다. 특히 책의 아랫부분에 있는 원주(각주)까지 실제처럼 보이기 위해 허구로 만들어 놓은 부분이라든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책을 쓸 수밖에 없어노라고 계속 자기변명을 늘어놓은 부분들이
스파이였던 작가의 전적이 보이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니 속지 말자. 작가가 파놓은 함정에.
불속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태우고 간 남자, 찰스 스트릭랜드.
대리만족이 되는 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