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우 연작소설/자이언트북스
어디선가 바퀴가 끌리는 듯한 소리가 났지만, 현정은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무언가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일 뿐이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다 움직였다. 살아 있는 이상,
얼마든지 다른 선택지를 고를 수 있었다.
이전에 했던 일이든 해본 적 없는 일이든. 현정은 그중 하나를 골랐다.
이제는 화해할 차례였다. p.270
이 소설은 발레학원 입시반에서 만난
정서, 현정, 연우의 이야기다
이들의 삶에는 인공지능 '포나'가 깊숙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
포나는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에서 따온 이름이다.
단 하나의 정답이나 최고의 답을 제시하는 기존의 AI와
다른 점은 사용자에게 여러 선택지를 제시한다는 점이다.
결국 이를 선택하는 건 인간의 몫이고 책임도 인간이 져야 할 부분이다.
물론 선택지를 보고 선택하느냐 마느냐 두 가지겠지만.
0. 내일의 서정
교과서 예시로 써도 좋을 만큼 자세가 탁월했던 정서는 예고를 나와 대학에서 발레를 전공했지만
지금은 은행 5년 차 직업인의 삶을 살고 있다.
포나가 분석한 정서의 신체 적합도는 24.75%, 활동 가능 연수는 10년. 정서의 장단점을 고려했을 때 단순 사무직보다는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서비스직이 어울린다며 준비 방법까지 알려주었다.
연우는 포나 때문에 정서가 발레를 그만두었다고 생각한 반면 현정은 포나 덕분에 정서가
은행원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포나는 정서에게 발레를 포기하라고 하지 않았다. 포나가 준 정보를 바탕으로 정서가 발레를 그만둔 것이었다.
초등학교 이후 발레를 그만둔 현정이나 계속 발레를 한 여우 그 누구도 정서를 이해하지 못한다.
고등학교 때 편입으로 들어온 한사라는 모두의 선망과 질시를 받을 만큼 항상 1등을 차지한 친구다.
그녀의 마니또가 된 정서는 친해지려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사라가 영국 로열 발레단에 장학생이 되었다는 소식 이후로 둘은 접점이 없었다.
사회복지사가 된 한사라를 은행에서 만나게 된 정서는 그녀가 발레를 왜 그만두었는지, 자신을 기억이나 하는지 궁금하다.
제희의 부모는 시설에서 독립을 앞두고 받는 딸의 자립지원금을 갈취하려고 했고 이를 안 한사라가 막아낸다. 정서는 사라 곁을 맴돌다가 제희의 아버지가 사라에게 복수를 하려는 장면을
목격하고 몸을 날려 대신 칼을 맞는다.
포나가 아무리 유능해도 위급한 상황에서 나오는 본능적인 행동들은 예측할 수 없다.
병원에서 마주한 두 사람의 서정은 포나가 절대 알 수도 알려줄 수도 없는 장면을 보여준다.
정서에게 현정, 연우 말고 그 시절을 나눌 친구가 생겼다는 것!
포기하는 건 곧 실패였다. 성공할 때까지 계속해야 했다. 인간이 어떻게 날 수 있을까? 날 수 없다고 포기하는 순간 인간은 날 수 없었다. 날기 위해 시도하는 이상 인간은 날 수 있는 존재였다. 끔찍하리만치 단순한 진실이었다. 그래서 정서는 발레를 사랑했다. p.125
0. 내일의 헌정
현정은 할머니 평화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면서 발레를 포기한 케이스다. 부모님이 불편한 몸을 가지고 태어난 여동생 현미를 케어하느라 현정의 돌봄을 평화가 도맡아 했었던 것. 콩쿠르에 한 번도 오지 않은 엄마를 믿고 발레를 할 수는 없는 현실이니까.
인공지능 연구원이었던 평화는 죽기 전 인공지능 '시라스'에게 발레 입시정보를 모두 담아놓았고, 연우엄마나 학원원장도 현정을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할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내일의 헌정'에서는 그동안 떨어져 살던 동생 현미가 대학원진학을 위해 현정의 집에 들어오면서 갈등을 빚는다.
결혼 준비 중이었던 현정은 동준이 새를 연구하겠다며 호주로 가겠다는 말을 듣고 파혼을 결정한다.
모의 연인 테스트를 통해 만난 세 번째 남자 동준과 3년의 연애를 마치고 둘은 결혼 준비를 진행 중에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에 포나가 관여되어 있다.
sns, 유튜브 채널, 좋아요 수까지 공유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잘 맞는 짝이라고 선택해 고른 남자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꿈을 좇겠다는 인간의 변덕이라는 변수를 포나도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현정은 사소하게 듣고 넘길지언정 포나는 그 변칙적인 정보를 저장했어야 했다. 소소한 변수들을 고려하여 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한 후 위험을 예방하는 것, 그게 포나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p.189
현정은 여동생 현미와 함께 살게 되면서 그동안 묵혀두었던 감정이 올라온다. 또다시 포나의 도움으로 남자를 만나려고 했던 현정은 '헤파이 102'가 현미라는 사실을 알고 대폭발. 온갖 물건을 던지고 싸우는 장면이 너무 좋았는데 이 둘은 이렇게 푸닥거리를 해서라도 그동안의 앙금을 풀었어야 했다.
피는 물모다 진하다는 걸. 치즈 듬뿍 떡볶이가 필요한 이유다.
0. 내일의 우연
연우는 셋 중에 유일하게 발레를 하고 있는 친구다. 이 소설에서 그려지는 엘리트코스를 나오지는 못했지만 그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발레는 정답이 있는 춤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정답이 있는 춤을 추기 위해 딱 맞는 몸이 있다는 것. 유럽인에 맞는 체형을 만들기 위해 관절을 늘리고 꺾는 과정이 나오는데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고문 같다고 할까?
발끝으로 서야 하는 발레리나의 발이 얼마나 혹사당하는지는 강수지 발레리나의 발 사진 한 장에서 모든 걸 말해주니까.
그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았는데 문제는 몸의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
지지 않으려면 새 무릎뼈가 필요했던 연우는 결국 단원들을 속이고 수술을 받는다.
의사는 신세대 인공관절이 인공지능 프로그램과 연결되어 있으니 활용해 보라고 권한다.
누적된 피로도나 회복이 얼마나 되었는지, 염증이나 부상 예방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연우는 자신의 몸은 자신이 제일 잘 안다며 도움을 거부한다.
이전보다 무릎 힘이 좋아졌다며 코치에게 칭찬을 받은 연우. 그런 연우에게 우연처럼 주연 자리가
주어진다.
삶에도 정답이 있다면, 연우는 발레가 자신의 답이길 바랐다. 끔찍한 짝사랑이었다.
발레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발레는 다 열려서 턴아웃이 저절로 되는 골반과 큰 키, 긴 팔다리와 아치가 높은 유럽계 백인을 위한 춤이었다. 원장은 그 역시 편견이라고 했다. 해외 발레단에서 활동하는 동양의 무용수들을 보면 그들 못지않은 신체 조건을 뽐내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 역시 소수였다. p.330
연우의 풀네임은 주연우다. 작가가 의도하고 짓지 않았을까 싶은데 기회는 그렇게 찾아왔다. 동료들의 부상, 무릎수술로 인한 실력향상, 겸손한 듯 자신의 뜻을 내비치는 처세술. 아마 운도 따랐겠지만 백조의 호수 '지크프리트' 역할을 따낸 건 순전히 연우의 실력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딱 하루 무대에 서는 게 조건일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무대 당일 날, 무릎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인공지능을 이용하라는 의사의 말을 무시한 채 자신의 감각만을 맹신했기 때문일까.
과연 연우는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연우는 기다렸다. 커튼 사이로 야트막한 길이 나 있었다. 환하게 빛나는 길. 그 위로 조심스럽게 한 걸음
내디뎠다. 발끝부터 발목까지 차례로 바닥을 딛고 역순으로 발을 떼는 순간, 그의 무릎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제 춤출 시간이었다. p.406
AI는 점점 우리 삶에 큰 비중을 둘 테지만 여전히 기계가 해주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고 생각한다.
감정을 나누는 일, 화해하는 일, 단 한 번의 공연을 위해 전부를 거는 일 같은.
세 명을 케어했던 평화 할머니를 기억하는 각자의 방식 또한 그렇다.
연우의 말처럼 선택지는 둘 뿐이다. 문을 계속 열고 들어가거나 더는 열지 않고 돌아서는 것.
그리고 그 어떤 선택도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것.
발레의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검색을 몇 번 했더니 발레가 계속 노출되는 부작용도 있지만.
세 명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래서 어떤 내일을 맞이하든 이들이 단단해진 건 확실하다.
꿈을 향해 달려가는 모든 이들이 존경스러워지는 소설, <포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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