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팡/문학동네
딩쯔타오는 이미 눈물이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가장 처참했던 그 일로 인해 오래전에 감각을 다 잃어버렸다. 시부모님을 직접 묻었고 부모님도 이미 돌아가신데다 오빠 부부는 시신마저 찾지 못했다. 그런데 자신은 왜 아직도 살아 있을까?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왜 살아야 할까? 무슨 이유로 죽지 않았을까? 그런 것들을 그녀는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열다섯번째 층에 도달했음을 알았지만 아무 의미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것들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또 누구를 더 알아야 할까? 심지어 그들의 그런 죽음이 더 나은지, 자신의 이런 삶이 더 나은지 딩쯔타오는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p.340
세상이 뒤바뀌는 격변의 시대에 개인은 얼마나 고독하고 미약해지는 걸까? 시대의 한줄기 미풍이 어쩌면 그들 인생의 배를 완전히 전복 했을지도 몰랐다.
칭린은 절박한 심정으로 아버지의 기록을 읽어나갔다. p.300
과거를 잊는 건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기능이다. 망각이 없었다면 딩쯔타오와 우의사는 편안히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우의사는 훗날 아들이 읽게 될 자신의 일기장에 자신의 뿌리인 고향과 집안에 대해 무시하고 살라고 말한다. 다만 어머니 신분에 대해서는 알아보라고 말하지만 그것도 섣불리 알아보지 말고 흔적을 따라가다가 참혹한 일을 발견하면 중단하거나 포기하라고.
칭린도 눈 앞의 삶에 충실한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과거를 돌아볼 게 아니라 미래를 봐야 하며, 시간을 거슬러갈 게 아니라 앞으로 따라가는 게 옳았다.
누구나 감추고 싶은 비밀은 있기 마련이고 망각이든 기억이든 제 살길을 찾기 마련이다. 과연 칭린은 어떤 선택을 할까?
젊은 시절 우의사는 쓰촨에서 물에 빠진 처녀를 치료해 주었는데 강한 충격 때문인지 처녀는 이름도 과거도 전혀 기억을 하지 못했다. 피붓결과 머릿결로 보아 가난한 집 출신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책을 보는 모습을 보고 나서는 이 일대에 토지개혁의 대상이 아닌가 속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사실 우의사의 집안도 지주라는 이유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 자신도 간신이 빠져나와 산속에서 약초를 캐며 사는 우노인에게 발견돼 목숨을 건진 과거가 있었다.
우의사는 처녀에게 딩쯔타오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서로 신세를 지고 있던 류정치위원의 집에 가정부로 일할 수 있게끔 소개를 한다.
둘은 결혼을 하고 아들도 낳았다. 우의사가 사고로 일찍 죽자 딩쯔타오는 오로지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힘들게 살아왔다. 사회적으로 기반을 다지자 칭린은 어머니를 위한 새집을 마련하고 어머니를 모셔온다. 이제 편안히 노후를 즐기기만 하면 되는데 이사 온 다음날부터 어머니가 이상하다.
그동안 집도 절도 없이 살던 딩쯔타오는 새집으로 이사오자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고 하룻밤만에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 육체는 아무 이상이 없으나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처럼 아들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한다.
소설은 딩쯔타오의 과거를 따라가며 그녀가 겪은 고통에 대해 말해준다. 그녀가 한발 한발 내딛는 층은 지옥으로 표현된다.
칭린이 일하고 있던 회사의 사주는 알고 보니 어머니가 가정부로 일했던 류정치위원의 아이들 중 하나였으며 사주의 아버지 류진위안은 아버지 우의사와 각별한 사이였던 것. 칭린은 건축학 교수인 친구와 사라진 장원을 연구하던 중에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을 마주하게 되고 어머니의 뿌리를 알게 된다.
어머니의 과거를 앍 된 칭린은 시간이 어서 모든 것을 풍화해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건축학 교수인 친구 룽중융은 역사는 진실이 필요하다며 기록을 선택한다.
기억과 망각 중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각자의 몫이며 감당할 수 없다면 풍화돼 먼지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을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만 우리는 책을 일고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이니까. 아마 나는 기록을 선택하지 않을까.
진실이 언어와 글로 표현될 수 없다는 칭린에게 해주고 싶은 말. 그럼에도 우의사가 남긴 일기가 있기에 진실의 끄트머리에라도 접근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보다는 진실도 거짓도 밝힐 수 없는 것이라고.
아무 기대 없이 읽은 소설인데 독서모임을 하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봉쇄된 우한의 참상과 생존기를 담은『우한일기』를 출간한 작가로 본명은 왕팡이다.
에필로그에 보면 친구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을 썼다고 한다.
"나는 연매장되기 싫어!"
<연매장>은 중국에서 출판된 뒤 사회 각계에서 강력한 반향을 일으키다가 얼마뒤 시장에서 자취를 감춘다. 1950년대 중국의 토지개혁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며 중국 정부에서 금서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요청으로 대만에서 다시 출간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너무도 당혹스러웠다. 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 역시 사랑한 그 사람이 가버리자 마음이 오히려
편안해졌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p.33
기억을 잃은 뒤 잠재의식 제일 밑바닥에 남는 건 가장 사랑했던 곳일까, 아니면 가장 증오했던 것일까? p.352
칭린은 알기 싫은 일을 알려 하지 않는 것도 강함의 또다른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긴 시간이 진실의 모든 것을 연매장했다. 설령 안다고 해도, 그게 진실의 모든 것이라고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p.437
사람이 죽은 뒤 관이라는 보호막도 없이 곧장 흙에 묻히는 것이 연매장이다. 그리고 살이 있는 사람이 과거를 단호하게 끊어내고, 이를 봉인하거나 내버린 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억을 거부하는 것도 시간에 연매장되는 것이다. 일단 연매장 되면 영원히, 대대손손 누구도 알 수 없다. p.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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