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젠 이오네스코/ 민음사
현대 연극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외젠 이오네스코는 사무엘 베게트와 함께 부조리극의 대표작가로 불린다. 재밌는 점은 자신의 작품이 '부조리극'으로 분류되는 것을 꺼려했다고. <코뿔소>는 1909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작가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작품이다. 루마니아는 1933년 이후 온통 파시즘의 물결로 뒤덮였다. 젊은 문학도였던 그에게 아버지가 나치 이데올로기에 협력하는 모습은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동료들과의 불화도 겹치면서 끝내 프랑스로 귀화한다. 극작가로 데뷔한 후 1957년 발표한 <코뿔소>는 처음에는 짧은 단편소설이었으나 희곡으로 각색해 연극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인간성을 위협했던 잔혹한 전쟁과 나치즘의 광기를 풍자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고뇌하는 다양한 군중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처음 도입 부분이 힘들었던 점은 일상적인 대화형식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물들 저마다 각자 할 말만 하는 형태라고 할까!
일상 언어의 무의미함, 소통의 부재, 전통적인 대화 구조 파괴가 이오네스코 작품의 특징이다.
이런 형식이 그때는 꽤나 파격적이었던 모양인데 지금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상이 되어 버렸으니...
1막
어느 지방의 작은 도시에 있는 광장. 식료품 가게, 카페테라스의 탁자와 의자는 무대 중앙까지 나와 있다.
잠시 후, 장과 베랑제가 카페테라스 의자에 와 앉을 것이다.
장 : 산뜻한 정장 차림이다. 밤색 양복에 붉은 넥타이. 빳빳이 세운 칼라에 밤색 모자를 쓰고 있다. 노란색 구두는 광택으로 반짝인다.
베랑제 : 면도하지 않은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 모자도 쓰지 않았다. 그는 구겨진 옷을 입고 있다. 베랑제는 모든 게 귀찮고 피곤한 듯하다. 아직도 잠에서 덜 깬 듯, 이따금 하품을 한다.
어느 평범한 소도시에 갑자기 코뿔소가 등장하면서 광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 등장인물들을 대표하는 대사를 가지고 왔는데 이런 소란 속에서도 장사꾼들은 돈돈 거리고, 늙은 노신사는 주부에게 환심을 사려하고, 논리학자의 삼단논법은 엉망이며, 그 와중에 친구사이라는 장과 베랑제의 대화는 짜증을 유발한다.
고양이의 죽음이라는 명백한 사실은 묻힌 채 정말 코뿔소였는지, 뿔이 하나인지, 둘이었는지, 아시아 코뿔소인지, 아프리카 코뿔소인지, 한 마리인지, 두 마리인지 하나마나한 이야기만 하다 1막이 끝이 난다.
장: 무슨 뜻인지 몰라서 묻나? 자네의 갈증에 대해 말하고 있어. 그건 마치 탐욕스러운 대지와 같단 말이야.
논리학자 : 공포란 비이성적인 것입니다. 이성으로 공포를 물리칠 수 있어요.
가게 여주인 : 저 여자 잘됐네요. 우리 집 물건은 하나도 사지 않더니⸳⸳⸳⸳⸳⸳.
가게 주인 : (주부가 건네는 돈을 받으며) 앞으로 우리 가게를 이용하세요. 길 건널 필요도 없고, 더 이상 끔찍한 일을 당할 일도 없을 겁니다. (그는 가게로 들어간다.)
노신사 : (주부를 바라보는 논리학자에게) 매력 있는 여자야⸳⸳⸳⸳⸳⸳!
베랑제 : (계속 말을 잇는다.) 매 순간 몸이 무거운 납처럼 느껴져. 마치 다른 사람을 등에 업고 다니는 기분이야. 나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거지. 내가 정말 나인지 모르겠다고. 그런데 술을 조금만 마셔도 그 짐이 사라져 버린단 말이야. 즉 나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거지.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기분이야.
카페 주인: (카페 여 종업원에게) 그렇다고 유리잔들을 깨면 어떡하나? 엉⸳⸳⸳⸳⸳⸳.
주부 : (같은 태도로) 내 고양이는 매우 깨끗했어요! 똥, 오줌을 가렸으니까요.
2막
공공기관의 행정실 혹은 법률 서적 출판사 등과 같은 개인회사 사무실이 배경이다. 막이 오르면, 잠시 동안 등장인물들은 부동의 모습으로 있다가 첫 대사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즉 '살아 움직이는 장면'으로 변할 것이다.
파피용 부장 :50세가량으로 정장차림이다. 검푸른 양복에 국가 유공 훈장을 달고 있으며, 풀 먹여 세운 칼라, 검은 넥타이, 얼굴엔 갈색 큰 콧수염이 있다.
뒤다르 : 35세. 회색 양복을 입고 있다. 큰 키에 안경을 쓰고 있으며, 장래가 유망한 사원이다. 보타르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보타르 : 60대. 은퇴한 전직 교사다. 다소 거만한 태도에 얼굴에는 자그마한 콧수염이 있다.
데이지 : 금발의 젊은 아가씨.
뵈프 부인 : 눈물을 머금은 채, 숨을 헐떡거리며 사무실로 들어올 것이다. 40~50대 뚱뚱한 여자.
코뿔소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신문으로 본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은퇴한 전직교사인 보타르는 코뿔소를 보았다는 증거를 내놓아도 비이성적이라며 조롱하거나 인신공격을 마다하지 않는다.
눈앞에 코뿔소가 나타나자 자신은 부인한 적도 없고 사건의 배후까지 알고 있다며 발뺌한다. 노동조합소속으로 언론을 불신하는 가장 보수적인 인물로 나오는데 파피용 부장이 코뿔소로 변하자 바로 따라서 변신한 인물이기도 하다. 출근할 수 없다는 남편의 전보를 가지고 온 뵈프부인이 등장한다. 집에서부터 줄곧 따라왔다는 코뿔소는 사무실로 들어오려다 계단을 망가뜨리고 만다. 그 코뿔소가 자신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뵈프부인은 남편을 방치할 수 없다며 계단을 뛰어내린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제각각 흩어지고 베랑제는 장의 집으로 향한다.
장은 목소리도 변하고 차츰 피부도 변하더니 결국 코뿔소로 변하고 만다. 사방에 코뿔소가 깔린 걸 본 베랑제는 공포에 질린 채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한다.
3막
베랑제의 방. 장의 방과 놀라운 정도로 흡사하다. 베랑제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의자에 엎어져 잔다. 그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듯하다. 자면서 몸을 심하게 뒤척인다. 그의 집에 뒤다르가 찾아오고 자신은 끝까지 사람으로 남을 거라며 왜 그토록 불안하냐고 묻는다.
카프카의 <변신>에서는 인간이 다른 종으로 변해버린 상태에서 시작한다면 <코뿔소>에서는 심리적 결심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코뿔소가 되고 말고의 문제는 바로 나의 결정이 주요하다는 점.
그것이 누군가의 강요일 수도, 나의 안전과 이익을 위한 선택일 수도, 다수의 힘에 휩쓸려 가는 군중심리일 수도 있다.
공격성, 복종성, 집단성을 동시에 지닌 특성 때문에 파시즘을 코뿔소로 표현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소수였던 코뿔소가 다수가 되는 상황이 되자 뒤다르는 중립을 지키거나 개방된 생각을 해야 한다며 베랑제를 설득하는 장면이 나온다. 중립을 앞세워 폭력을 설명하거나 방관하는 모습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데 특히 언론의 행태이기도 하다.
뒤다르 : 어쨌든 처음엔 호의적인 예측을 하는 게 좋고, 적어도 중립을 지키거나 개방된 생각은 하는 게 좋아. 그게 과학적 사고의 특징이니까 말이야. 모든 게 논리적이지. 이해하는 것. 그건 곧 정당화하는 것이지. p.149
데이지가 베랑제의 집에 오고 뒤다르는 데이지가 베랑제를 사랑한다고 오해하면서 결국 코뿔소 무리에 합류해 버린다. 단 둘이 남은 베랑제와 데이지 또한 앞에서 언급한 대로 각자 할 말만 하다가 끝이 나버린다.
베랑제는 데이지에게 일방적인 사랑을 표현하지만 데이지는 받아주지 않는다.
물론 데이지에게 급발진 하는 모습을 두고 경쟁자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베랑제는 데이지에게 갑자기 인류를 구원하자며 아이를 낳자고 한다.
하지만 데이지는 그런 베랑제에게 자신이 왜 세상을 구해야 하냐며, 귀찮다는 말을 남기고 코뿔소 대열에 합류한다.
베랑제 : 이봐, 데이지, 우린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아이를 낳을 수 있고, 그 아이들은 또 다른 아이들을 낳고⸳⸳⸳⸳⸳⸳ 시간은 걸리겠지만 우리 둘이서 인류를 소생시킬 수 있을 거야.
데이지 : 인류를 소생시킨다고요?
베랑제 : 이미 있었던 일이야.
데이지 : 그 옛날⸳⸳⸳⸳⸳⸳ 아담과 이브 말이죠⸳⸳⸳⸳⸳⸳. 그들은 용기가 대단했어요.
베랑제 : 우리도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어, 더구나 그렇게 많은 용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야. 시간과 함께 인내만 있으면 모두 해결되지.
데이지 : 난 아이를 원치 않아요. 귀찮아요.
베랑제 : 그럼 이 세상을 어떻게 구하려고?
데이지 : 세상을 왜 구해야 되죠?
베랑제 : 아니 무슨 그런 말을⸳⸳⸳⸳⸳⸳! 나를 위해 그렇게 해야 해, 데이지. 세상을 구하자.
데이지가 베랑제를 버리고 떠난 것이 십분 이해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내가 볼 때는 베랑제도 구제불능, 공감능력 제로의 인간이었을 뿐.
데이지가 떠나자 베랑제도 엄청난 갈등에 휩싸인다. 이제부터 진정한 1인극이 시작된다. 그들처럼 되고 싶다, 뿔이 없는 반들반들한 이마가 추하다면서 자신을 창피해하기도 한다. 심지어 코뿔소로 변할 수 없는 자신을 괴물이라며 부끄러워하기까지.
갈등이 9였던 그가 갑자기 인간으로 남겠다는 말이 약간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베랑제 :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맞서서 나를 방어하겠어! 난 최후의 인간으로 남을 거야. 난 끝까지 인간으로 남겠어! 항복하지 않겠어!
계엄사태와 맞물려서인지 외젠 이오네스코의 <코뿔소>가 남다르게 다가온 건 사실이다. 독서 모임이 바로 12월 3일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인간이 코뿔소로 변하는 이런 광기는 매번 나타날 수 있으며 주변에 눈만 돌리면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니까. 베랑제가 끝까지 인간으로 남고 싶어 했던 그 인간성에 대해서는 사실 확실한 답을 찾지 못했다. 다윈의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해 보자면 베랑제는 그저 '돌연변이'였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논제가 베랑제의 다음날 아침은 어땠을까였는데 이 부분을 다 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코뿔소들이 강하게 질주하는 소음이 들린다. 이 소음은 음악적이다. 안쪽 벽에 양식화된 코뿔소 머리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그 숫자는 막이 내릴 때까지 증가할 것이다. 코뿔소 모습은 점점 긴 시간 동안 그곳에 머물 것이다. 마침내 벽면이 코뿔소 머리들로 가득 채워진다. 이 머리들은 무서운 양상을 띠지만, 점차 아름다운 느낌으로 변해 가야 한다.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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