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장편소설 /창비
그는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그렇지 않은가. 이곳은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니다. 여기는 사람이 거처하는 공간이 아니다. 이 좁은 원둘레는 지상의 일상과 시간을 벗어난 우주선의 조종실 같은 곳이다. 그는 죽지 않고 여기 살아 있으나 세상은 그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남들에게는 언젠가 돌아올 여행 중에 있는 사람과 같았다. 아내조차도 그와 통화를 할 적에는 해외에 있는 사람에게 측근들의 소식을 전하듯 말했다. 이진오는 차츰 지상에서의 시간을 벗어났고 굴뚝의 일상은 이미 현실이 아니게 되었다. p.33
한국의 '포레스트 검프'란 별명을 지닌 황석영 작가의 <철도원 삼대>를 읽었다. 1943년 만주 장춘에서 태어났으니 올해로 81세. 동국대 철학과 졸업. 고교 재학 중 단편소설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60년 이상 문학인의 삶을 산 살아있는 전설 같은 분이다. 작년에 열린 군산 북페어를 다녀온 분이 있어서 황석영 작가의 별명이 '황구라'라는 것을 알았다. '유구라'는 유홍준 작가라고.
황석영 작가의 책을 읽은 건 대학에 들어가서이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우리나라 대하소설을 모두 섭렵하는 것이 당시 유일한 목표였다. 9권에서 16권으로 끝나는, 박경리, 최명희, 홍명희, 조정래, 김주영, 이문열, 황석영 작가들의 작품이다. 제목은 너무 유명하니 적지 않겠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아~ 나는 소설은 못쓰겠다. ^^
2020년에 <철도원 삼대>가 나왔을 때 바로 손이 가지 않은 이유는 실망하지 않을까라는 염려 때문이었다. 스무 살 문학도의 순정이랄까? 그런데 역시 대가는 대가. 필력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30년이란 세월의 묵은 힘에 드디어 탄생한 소설은 100년의 한국 노동사를 오롯이 담고 있었다.
1989년 방북 때 만난 어느 노인과의 이야기에서 이 소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서울 영등포라는 공통적인 추억이 둘 사이의 공감대를 일으켰고 노인은 자신의 아버지와 본인, 그리고 자기 아들이 철도원으로 살았던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들의 증손자로 나오는 이진오의 모델은 408일 고공 농성의 주인공인 금속노조 전 지회장 차광호 씨다.
한국 문학이라는 탑의 한 부분에 돌 하나 끼워 넣는 작업이 되기를 바란다는 작가님의 표현은 너무 겸손하다.
연재 당시의 제목은 <마터 2-10>이었다. 산악형 기관차로 지금은 통일공원에 분단의 화석처럼 놓여 있는 기관차의 제작번호이다.
산업노동자가 전면에 등장하는 장편소설이니 만큼 분량이 꽤 된다. 노동운동이 곧 항일운동의 출발점이라는 것, 하지만 해방 이후 분단되면서 생존권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빨갱이' 또는 '빨갱이 운동'으로 매도당한다. 이 긴 역사를 한 권에 실으려니 얼마나 하고 싶은 얘기가 많겠나. 그 주축에 '철도'를 넣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식민지에 가장 먼저 깔리는 철도의 쓰임새는 분명하다. 제국주의의 상징물인 철도가 조선의 근대를 앞당겼다는 뉴라이트 역사관을 볼 때마다 한심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번에 그 논리를 완벽하게 깨부수는 문장이 있어서
너무 좋았다.
'식민지 근대화는 도둑놈의 사다리일 뿐'
"도둑이 내 집의 재물을 훔치러 들어오면서 담에다 사다리를 걸치고 들어왔네. 일본이 조선 사람을 위해서 철도를 놓았겠나. 일본은 처음부터 대륙으로 나가는 반도의 철도를 군용철도라고 정했다네. 그래서 마음대로 강압적인 징발 징용을 할 수 있었던 거지."
"이런 난세에 일자리를 얻었은깨 우리는 그래두 운이 좋잖아유?"
김군의 말에 일철은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구먼. 하야시 상의 촌지도 받고 있으니. 다만 내가 하구 싶은 말은 우리가 주인이란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그 말일세." p.234
철도 공작창에서 기술자로 일한 이백만, 조선인 최초 기관사 가 된 첫째 아들 이일철, 적색노조의 연락책 역할을 한 둘째 아들 이이철, 해방 이후 기관사가 되는 이일철의 아들 이지산, 그리고 현재 굴뚝 위에서 고공농성을 벌이는 이진오까지, 한 가족의 계보를 통해 100년의 한국 노동운동사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 책을 읽는 중간에 한국 옵티칼 하이테크에서 부당해고를 당한 박정혜 씨의 뉴스를 접했다. 600일 만에 땅으로 내려왔다는 기사였다. 책에서도 나오지만 100일 200일 정도의 농성은 언론에서도 다루지 않는다고 한다. 1년은 넘게 해야 그나마 기사로 볼 수 있다니. 이런 극단적인 방식 (굴뚝, 크레인 농성)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 하는 한국 노동사회의 문제점을 직관할 수 있는 소설이었다.
집회에서 헤어지면 그들은 모두 혼자가 되었다.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도 그들 각자가 혼자가 되었다. 세계란 원래가 우주처럼 무심하다. 괴괴하고 적막하고 고요하다. 무료하고 가치 없는 일상이 그들 모두를 무너뜨렸다. 해고는 살인이다. p.202
작가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개인의 일상적 일화들로 줄거리를 만들고 영등포를 중심으로 한 민담적 세상을 그려낸다. <백년의 고독>에서 보이는 마술적 리얼리즘이 <철도원 삼대>에서는 주로 주안댁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키도 크고 힘도 센 주안댁은 뗏목을 만들어 남편을 구하러 가고 홍수에 내려온 돼지를 잡는 등 영웅서사에서나 봄직한 여성으로 나온다. 그녀는 죽어서까지 가족들을 돌보는 가택신으로 나오는데 이런 점을 민담으로 풀어낸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중심축은 철도원 삼대와 이진오로 풀어가지만, 그 서사에 웃음 한 꼬집을 담당하는 건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그 흔한 고부갈등도 없고 민폐캐릭터도 없다. 여러 가지 전설의 주인공인 주안댁부터 올케의 빈자리를 채워준 막음이 고모, 앞일을 정확하게 내다보는 신통방통 신금이, 고공투쟁을 하는 아들을 지지해 주는 윤복례, 아들이 죽자 자신의 길을 찾아 만주로 떠난 한여옥, 용접 기능사 영숙까지 단순한 조력자를 넘어 삶을 당당하게 살아내는 여인들이다.
주안댁은 돼지를 끌어올리는 활약을 보여주고 나서, 건져올린 잡동사니들 중에 부서진 집들의 부산물인 판자며 서까래 등속을 모아서 새끼줄로 묶어 뗏목을 만들었다. 그녀는 뗏목을 물에 띄워 긴 장대로 삿대를 삼아 남편의 공장 방향으로 저어 갔다고 한다. p.87
삼삼오오 모여서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것이 노동운동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대부분 노동자의 삶을 사는데도 노동법이나 노조에 대해 배우지 못했다. 그것이 당연한 권리임에도 인식조차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역사도 학교에서 근현대사는 거의 배우지 않는다고 하니 안타깝다.
일제 강점기 시대를 다룬 소설에서 항상 나오는 밀정과 독립운동가들의 사례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구조적 강제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과, 단순히 권력에 편승한 기회주의자로서의 선택을 똑같이 보아야 하는지, 다르게 보아야 하는지도 이 소설을 통해 생각해 보았다.
극 중 최달영은 밀정으로, 공장 노조를 이끄는 거물급 인물들을 잡아넣으며 경찰까지 되는 인물이다. 당시 20대 1의 경쟁률이었다니 실로 놀라웠다.
헌병과 경찰 한 사람당 두명의 개인밀정을 합치면 전국적으로 그 수는 어림잡아서 이만 오천여명이 되었다. 이러한 직임이라도 얻어보려고 해마다 이십 대 일의 경쟁을 통과했으니 들지 못한 자들까지 잠재적인 앞잡이로 본다면 그 숫자는 수십만이 될 것이다. 한쪽에서는 가산과 가족까지 버리고 목숨을 바쳐 일제와 싸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적의 앞잡이가 되어 몇푼의 생활비와 작은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그렇게나 많았던 것이다.
밀정의 종류는 대개 네가지로 분류가 되었다. 첫째는 최달영의 경우처럼 고용밀정이라 하는데 월급이나 상여금에 혹해서 직업적으로 개인이나 기관의 정보원 노릇을 한다. 둘째는 어느 사건이나 정보를 위해서 필요한 기간만큼만 밀정질을 하는 임시적인 촉탁밀정이 있다. 셋째는 밀고자인데 말하자면 준밀정이다. 이해관계나 원한 때문에 자발적, 능동적으로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제보자와 구별된다. 넷째는 순사나 헌병이 수사나 탐문의 필요에 따라 직책으로 밀정질을 하는 경우이다. p.306
그래도 응징을 당하는 장면에서 조금 마음이 풀렸다. 일제강점기 때 밀정이 미 군정 때 경찰로 둔갑해 또다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일제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점이 두고두고 아쉽다. 24시간 법칙이라고 고문을 견디는 최대한의 시간이라고 한다. 양쪽 다 모두 사활을 걸고 창과 방패처럼 찌르고 막아야 하는 시간. 고문으로 죽거나 병신이 되는 극단의 선택지임에도 왜 그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을까?
그 당시 요구했던 노동시간이 지금과 같다는 점은 충격이었다. 노동자들의 삶은 시대마다 다른 얼굴로 나타났지만 그 근본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것이 없다. 학력에 따른 차별, 값싼 노동력, 비정규직, 하청의 하청문제.
다만 노동자들은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고 싶었을 뿐이다.
마지막에 "다시 올라가자. 이번에는 내가 올라가겠어."란 대사가 먹먹해지는 이유다. 그럼에도 변화는 반드시 일어난다고 믿는다. 너~무 느려서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기관사가 노동부장관이 되는 정부이니 더욱 기대가 크다. 내년부터는 5월 1일이 근로자의 날이 아니라 '노동자의 날'로 바뀐다. 대다수의 노동자가 편하게 하루쯤 쉴 수 있는 날이 만들어지기까지 참으로 오래 걸렸다.
"같이 좀 살자, 못된 것들아. 같이 좀 살아."
이진오는 그녀가 말하려던 충분한 한마디가 바로 이 말이라는 걸 알아들었다. p.410
"네, 여기는 열병합발전소의 굴뚝입니다. 높이는 사십오 미터, 이 굴뚝의 지름은 육 미터구요. 굴뚝 둘레에 있는 이 공간은 폭이 일 미터입니다. 그냥 작은 걸음으로 한 열댓걸음쯤 될 겁니다. 이 바깥쪽 퍼런 천막은 바람벽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밧줄로 난간에 튼튼히 붙들어맸습니다. 안에 등산용 일인 텐트를 쳐두었구요. 침낭과 그 안에 또 담요가 이렇게 있습니다. " p.429
#철도원삼대 #황석영 #창비 #독서토론 #책서평 #도서비평 #자몽커피 #철도원삼대가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