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 민음사
그리고⸳⸳⸳⸳⸳⸳ 죽었다.
체호프 소설의 서평은 이 한 줄이면 족하다. <관리의 죽음>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이다. 나이가 들어서 좋은 건 딱 한 가지! 이제는 체호프식 유머를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점.
요즘 읽고 있는 밀란 쿤데라의 <농담>에 보면 썸을 타고 있는 두 인물, 루드비크와 마르케타가 나온다. 매사 진지한 마르케타에게 루드비크는 자기 딴엔 농담이랍시고 공산당 체제를 비웃는 내용의 엽서를 보낸다. 마르케타는 루드비크를 피하고 루드비크는 이 엽서 때문에 학교와 당에서 제명당한 채 쫓겨난다.
스무 살 때의 나도 마르케타와 비슷했다. 헤픈 농담을 지껄이는 선배들이 그저 한심해 보였다. 마음에 여유가 없던 시절이니 더 그랬을 수도 있다.
체호프식 농담과 유머를 그때는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으론 러시아 작가라고 너무 과대평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일종의 반발심도 있었다.
그 당시 대하소설에 빠져 살던 때라 단편소설을 쓰는 작가보다는 장편소설을 쓰는 작가를 더 인정했던 것도 사실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
보르헤스를 통해 단편소설의 위엄을 느낀 이후로는 그저 소설가는 다 위대한 걸로^^
세월이 나를 이렇게 변화시킨 것일까? 너~무 재밌다. 그리고 왜 체호프를 '단편소설의 거장'이라 부르는지도 알게 되었다.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1860~1904. 44세)
체호프의 집안은 대대로 농노였다. 1861년 체호프 출생 1년 뒤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 해방령'이 발표된다. 그의 할아버지는 농도해방령이 발표되기 20년 전에 모은 돈으로 자유 시민권자가 되었으며 잡화상을 운영한다. 아버지는 그림과 예술에 조예가 깊어 러시아 정교회 성가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보수적인 종교적 강요는 작품 속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1876년 아버지의 가게가 파산하면서 안톤을 제외한 가족들이 모스크바로 이주한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학비를 벌어 공부했고 고학으로 중등학교를 마친 뒤 1879년 모스크바 의학부에 입학한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푼돈이라도 벌 목적으로 단편소설을 쓴 것이 후에 거장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근성과 아버지의 예술적인 피는 삼 형제에게 골고루 갔으니 첫째 형 알렉산드르는 평론가 및 기자가 되고, 둘째 형 니콜라이는 화가로 활동하며 동생의 작품에 삽화나 표지를 그려주었다고 한다.
당시 하층민이 의대를 나온 것도 상당히 의외인 일인데 심지어 귀족들의 직업으로 여겨진 작가의 길을 택한 것은 매우 파격적인 케이스였다. 냉전 시절까지는 러시아 제국 시대의 역사가 외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서방의 문학가와 사학자들은 당연히 체호프가 귀족 출신일 것이라고 확신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 소련붕괴 후 러시아혁명 이전의 역사가 대대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후에야 비로소 체호프가 하층민 출신의 문학가였다는 것이 알려졌다.
작품에 의사들이 많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그가 의사였기 때문이며 인물의 심리적, 신체적 변화를 병리학적으로 정확히 포착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작품세계
단편소설 약 600편, 희곡 17편, <사할린 섬>1895 같은 르포르타주 총 700편 내외.
1) 유머 작가 시기 (1879~1886): 생업으로 작가- 그의 초기 단편들은 쉽게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작품들이 대부분.
2) 본격 문학 활동 (1887~1891) : 현실적 부담에서 벗어나 전업 작가로서의 길 - <광야>, <지루한 이야기>, <등불>, <내기>
3) 멜리호보 시기 (1892~1898) : 본인의 특징을 드러냄 - <6호실 >, <문학 교사 >, <로스차일드의 바이올린>, <대학생>, <다락방이 있는 집>, <우리의 인생>, <갈매기>, <농부들>과 같은 후기 걸작들을 집필
4) 얄타 시기 (1899~1904) : 1898년 지병인 결핵이 악화되어 크림 반도의 얄타로 이사. 모스크바 예술극장 여배우 올가 크니페르와의 결혼으로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 <용무가 있어서>, <귀여운 여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바냐 아저씨>, <골짜기>, <세 자매>, <약혼녀>등을 발표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황금시대에 단편 문학을 주도한 체호프. 10편의 작품들은 다양한 인물 군상을 통해 사소한 일상사를 재현함으로써 삶의 본질과 아이러니를 포착해 낸다. 한편으론 유머를 통해 웃음을 유발하하지만 그 이면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비애감이 녹아들어 있다.
그의 소설에 엉뚱하고 어리석고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귀족이거나 관리들이다. <양반전>에서 양반들의 위선적인 가면을 폭로하듯이 말이다. 농노집안의 의사라는 그의 출신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그의 유머가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차례
관리의 죽음 1883 회계원 이반 드미트리치 체르뱌코프, 브리잘로프 장군
공포 1892 나, 친구 드미트리, 친구의 아내 마리야, 40명의 순교자라 불리는 남자 가브릴라
베짱이 1891 올가, 올가의 남편 오시프, 올가의 불륜 남 랴보프스키
드라마 1887 작가 파벨 바실리치, 작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무라슈키나
베로치카 1887 이반 아그뇨프, 이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베라 가브릴로브나
미녀 1888 나, 아르메니아인 미녀 마샤, 기차역사의 여인
거울 1885 아픈 남편을 위해 왕진을 요구하는 넬리, 의사 스테판 루키치
내기 1889 사형제와 종신형으로 내기를 하는 두 남자 변호사와 은행가
티푸스 1887 젊은 중위 클리모프, 사촌 누이동생 카차
주교 1902 표트르 주교, 어머니
어쩔 수 없이 나온 재채기를 가지고 다섯 번이나 사과하는 주인공 체르뱌코프도 그렇고 시원하게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 장군 브리잘로프도 이해가 되진 않았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인 '⸳⸳⸳⸳⸳⸳ 그리고 죽었다'에 대한 재밌는 해석이 나왔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생계형 작가였기 때문에 마감에 쫓겨 나온 결론이다.
둘째, 그당시 관리와 장군은 비호감 직군이었다.
셋째, 진짜 죽은 것이 아니라 '사회적 죽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불안 강박이 심한 사람일수록 상상력은 커지게 마련이다. 사회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상사나 직급체계, 위계질서에 대한 위축을 경험했을 것이다. 나는 세 가지 모두 그럴듯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죽이고 사는 현대인들을 생각해 보면 '사회적 죽음'이라는 해석이 가장 적절하다. 초단편이지만 요즘시대의 코드와 딱 떨어지는 명쾌한 소설이 아닌가? <관리의 죽음>은 반드시 읽어보시길.
체호프의 소설을 읽다 보면 죽음에 대해 별다른 감정표현이 없다. 그냥 '죽었다'로 끝나는 소설이 많다. 왜 그럴까? 단지 의사여서? 아니면 극 T여서?
의사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 또한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하나일 뿐이다. <공포>를 보면 죽음이 공포가 아니라 삶이 공포라는 얘기를 한다. 삶에 자신을 맞춰서 살고 있는 것이 진부로 다가올 때 느끼는 공허함이 잘 드러나 있다.
오늘날로 치면 연예인 기질이 농후하고 인플루언서인 올가는 시대적 상황 때문인지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는 여인이다. <보봐리 부인>과 <안나 카레니라>가 떠오르는 <베짱이> 속 인물.
체호프 소설 속 남녀들은 썸 혹은 사랑을 할 때 일정한 패턴이 있다. 양쪽이 호감 혹은 썸을 타다가도 누군가 적극적으로 다가가면 그 관계가 빠르게 사그라들거나 주저하게 된다. <공포>에서 주인공과 그의 친구 드미트리의 아내와의 관계, <베짱이>에서 여주인공 올가 이바노브나와 화가 랴보프스키, <베로치카>에서 아그뇨프와 베라가 그렇다.
올가는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을 답답해하며 바람을 피우는 인물이다. 결국 개미처럼 일만 하던 의사 남편은 허망하게 죽는다. 예전에는 놀고먹었던 베짱이가 욕을 먹었지만 요즘엔 그러다 월드투어하는 연예인이 되었다는 버전이 나오는 시대다. 와이프의 사치를 지원하기 위해 개미처럼 일한 의사남편이 죽었다는 설정은 정말 요즘시대 코드 아니던가!
모든 작품이 다 좋았지만 특히 사형제도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작품 <내기>는 아주 걸작이다.
<내기>는 사형제도를 종신형으로 대체하는 것에 대한 논쟁을 하다가 독방생활 15년에 200만 루블을 거는 내기로 시작한다. 내기의 당사자인 20대 변호사와 중년의 은행가. 15년 후 이들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관전 포인트. 책모임이다 보니 15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을 읽은 변호사가 부럽다는 의견도 있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단지 밖에 나가는 것만 금지된 상태에서 읽고 싶은 어떤 책이라고 읽을 수 있으니 말이다.
결말이 정말 최고였다. 약속한 돈을 주기 싫은 은행가는 변호사를 죽이기로 마음먹는다. 당신이 변호사라면 어떻게 살아 나올 수 있을까? 15년 동안 책을 혼자 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게 해주는 소설, <내기> 강력 추천이다.
체르뱌코프의 뱃속에서 무언가가 터져버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로 그는 문을 향해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흐느적흐느적 밖으로 걸어나갔다. 기계적으로 걸음을 옮기며 집에 돌아온 그는 관복을 벗지도 않은 채로 소파에 누었다. 그리고.⸳⸳⸳⸳⸳⸳ 죽었다. p.12_ 관리의 죽음
우리 인생이나 저승 세계나 매한가지로 불가해하고 무섭습니다. 유령을 두려워하는 자라면 나도, 저 불빛들도, 그리고 저 하늘도 두려워해야 마땅하지. 왜냐하면 이 모두가 잘 생각해 보면 저승의 망령들만큼이나 불가해하고 환상적이니까. p.19_공포
선하고 순수하고 사랑을 담은 영혼이었지. 사람이 아니라 유리였어! 학문에 봉사했는데 그 학문 때문에 죽었지. 황소처럼 낮이나 밤이나 일했지만 아무도 그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어. 이 젊은 학자가 미래의 교수가, 과외 진료 일거리를 찾아다니고 밤마다 번역을 해서 돈을 댔던 것이 이 따위⸳⸳⸳⸳⸳⸳ 이 따위 형편없는 넝마 조각이라니.! p.77_베짱이
무라슈키나는 또다시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파벨 바실리치는 난폭하게 눈을 희번덕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가슴속으로부터 치솟아나오는 듯한 괴기스런 비명을 지르더니 묵직한 문진을 집어들고 그것으로 무라슈키나의 머리통을 힘껏 내리쳤다.
『날 잡아가라. 내가 그녀를 죽였다!』
잠시 후 뛰어들어온 하인에게 그가 말했다.
배심원들은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p.88_드라마
나는 그대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경멸을 표현하기 위해, 내가 한때 천국을 꿈꾸듯 갈망했으나 이제는 하찮게 보이는 이백만 루블을 거부하겠다. 그 돈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박탈하기 위해 나는 약속한 기한이 다 되기 다섯 시간 전에 여기에서 나갈 것이며 그럼으로써 스스로 계약을 위반하는 바이다⸳⸳⸳⸳⸳⸳. p.145_내기
너에게 티푸스가 전염됐어. 그래서⸳⸳⸳⸳⸳⸳ 그래서 죽었단다. 장례를 치른 지 삼 일째야
이 무시무시한 뜻밖의 소식은 클리모프의 의식 속에서 온전하게 전달되었지만 그것이 아무리 무섭고
강력한 것일지라도 회복기의 중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동물적인 기쁨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는 울며
웃었고, 이내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고 투정하기 시작했다. p.157_티푸스
안톤 체호프와 올가 크니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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