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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밀란쿤데라/ 민음사

by 자몽커피

그렇다, 틀림없이 그렇다고 나는 문득 깨달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중으로 잘못된 신념에 의해 속고 있다. 그들은 인간, 사물, 행위, 민족의 영속적인 추억이라든가, 행위, 과실, 범죄, 부정의 속죄를 믿고 있다. 이런 것은 모두 허위의 신념인 것이다.

실제로는 정반대여서, 모든 것은 잊혀지고,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할 것이다. 속죄(복수 그리고 용서)의 과제를 대행하는 것은 망각이다. 누구 한 사람도 이미 행해진 부정을 보상하는 자가 없으며, 모든 부정이 잊혀지고 마는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리수도, 테이블도,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점심 식사의 시중 들기에 지친 웨이터도, 잘 뻗은 포도 넝쿨로 둘러싸인 쾌적한 레스토랑도 잊혀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p.399 문학사상사



책도 옷처럼 딱 맞는 때가 있는 것 같다. 이번에 다시 읽은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 그렇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믿었던 순간들이 나의 착각이나 오해였음을 인식하는 순간 세상에 버림받은 느낌이 든다. 이번에도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모두가 이 책이 400~500페이지가 넘는다고 할 때 나 홀로 '얇은 책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당연하게도 나는 이 책을 잘~ 안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대학 때 내가 사랑했던 세 남자 중의 하나였으므로 (카프카, 카뮈, 쿤데라) 당연히 이 책은 펼쳐볼 이유도 없었다. 보통 연말 연초에 독서모임 책들이 결정되는데 유일하게 확인하지 않고 패스했던 책이 <농담>이었다. 왜냐? 책이 당연히 집에 있었고 예전이지만 읽은 책이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쿤데라의 파란 표지의 <느림>을 <농담>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나 또한 이책의 인물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이런 사소한 일들조차 내가 보고 믿은 것만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산다고 생각하니 처연하게 줄지어 가는 개미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에 진지한 마르케타도, 허세와 치기의 끝판왕인 루드비크도, 자식 속을 일도 모르는 야로슬라프도, 사랑에 웃고 사랑에 우는 헬레나도, 루치에의 육체 앞에 종교적 신념을 무너뜨린 코스트카도, 루드비크를 떠나 낯선 도시에 정착한 루치에도 모두가 농담 같은 인생을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체제에 잘 순응해 교수가 된 제마네크가 결국 승리자인 것일까?




체코슬로바키아에 태어났다. 1975년 프랑스에 정착하였다.


민음사에 실린 작가 소개다. 민음사 책을 보면 작가 연보나 작가의 말, 번역가의 말이 일절 없는데 그 이유가 있다. 쿤데라에게 소설은 소설로서만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명성이 자신의 소설을 능가해서는 안 되며, 또 소설을 쓰는 철학자들은 자신의 사상을 밝히기 위해 소설이라는 형식을 이용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민음사의 밀란 쿤데라 전집이 15권인 이유가 있는데 그동안 자신이 쓴 작품 중에서 본인이 인정한 소설 11편, 희곡 1편, 평론집 4편의 번역만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와 쿤데라를 성사시키다니! 이건 민음사가 자랑할 만하다.






문학사상사와 민음사 책을 비교하며 읽다 보니 재미있는 부분이 있어서 소개한다. 우선 차례가 다르다. 민음사는 각 장을 이끌어가는 인물의 이름으로 되어있지만 문학사상사는 각 장을 대표하는 단어나 문구로 되어 있다. 문학사상사의 차례는 편집부의 결정이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번역은 문학사상사가 훨씬 깔끔하고 좋았다.

쿤데라는 작가가 자신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거북해하고 난처해했다고 한다. 프라하의 봄과 러시아의 침공이 잊혀진 지금이야말로 <농담>은 역설적으로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말하는 쿤데라! 장편소설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농담> 속으로 들어가 보자.



민음사 문학사상사





밀란 쿤데라는 1929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피아니스트이자 음악원교수였던 아버지는 쿤데라가 어린 시절 피아노 훈련을 고되게 시켰다고 한다. 재미있는 건 이 소설의 주인공 루드비크가 바로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부자 사이가 좋지 못한 것을 이런 식으로 복수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쿤데라도 25세까지는 음악인의 삶을 살았으나 작가로 삶을 마감했으니 아버지의 꿈대로 살 생각이 전혀 없었음을 보여준다.

<농담>은 1967년에 발표한 밀란 쿤데라의 첫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로 유럽 전역에서 인정받는 작가가 되었으며 결혼을 한 것도 이때이다.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상황을 알 필요성이 있다. 독일의 지배를 받던 체코슬로바키아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해방군으로 들어온 소련군의 인기에 힘입어 공산당이 정권을 잡게 된다. 주인공 루드비크는 자연과학 대학을 다니는 학생이자 공산당원이다. 지적이고 유머도 있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은 루드비크에게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연애다.

마르케타는 예쁘고 다 좋은데 매사 너무 진지하다. 자신과의 시간보다 공산당 교육 연수를 만족해하는 마르케타에게 심통이 난 루드비크는 농담이라는 허울을 쓴 복수의 엽서를 보낸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루드비크 p.59




교수와 친구들 100여 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마르케타에게 보낸 이 엽서가 공개되었고 루드비크는 만장일치로 당과 대학에서 제명당한다. 마르케타를 놀리려고 한 개인의 농담이라는 루드비크의 변명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루드비크는 반동분자로 몰려 오스트라바의 탄광촌에서 3년간 강제 군사 복무를 하게 된다.

지팔지꼰이라는 표현이 있다. 엽서 한 장으로 본인의 인생을 나락으로 끌고 간 남자 루드비크. 잘나가는 자신의 인생을 시험하고 싶은 마음이 반은 있지 않았을까 싶다. 편지도 아니고 모두가 볼 수 있는 엽서라니!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독일로부터 독립하고 공산당이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정권을 장악한다. 새 시대와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다. 공산주의는 역사와 삶을 새롭게 건설하는 낙관주의를 의미했고, 낙관주의는 건전한 정신을 의미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패러디한 루드비크의 글은 공산주의에 찬물을 끼얹는 표현이었다. 게다가 트로츠키 만세라니!

트로츠키는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10월 혁명의 주역으로 레닌과 함께 소련 건설에 큰 공을 세웠지만 스탈린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다. 공산당에서 제명되고 소련에서 추방당해 망명지를 떠돌며 스탈린 체제를 비판한 사회주의의 적으로 몰린 인물이다.

젊은 날의 치기는 이처럼 위험하다. 소설은 15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루드비크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호텔이 실망스러웠던 루드비크는 옛 친구 코스트카의 독신자 아파트를 빌린다. 친구가 소개한 이발소에 들른 루드비크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옛 연인 루치에를 보고 당황한다.


나는 어쩐지 아쉬운 심정으로 이발소를 나왔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곤 무엇이 무엇인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다는 사실 뿐이었다. 옛날에 그처럼 사랑했던 여자의 얼굴에서 확실한 특징을 하나도 발견할 수 없다니, 얼마나 엉터리 같은 이야기인가! p.30 문학사상사



묘하게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나는 이발소를 나왔다. 내가 아는 것, 그것은 다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었고, 한때 그토록 사랑했던 이의 얼굴이 맞는지 머뭇거린다는 것이 참으로 야비하기 이를 데 없다는 사실이었다. p.22 민음사




15년이 흘러 과학 기술자로 연구소에서 일하는 루드비크에게 방송국 기자인 헬레나가 방문한다. 헬레나는 엽서사건으로 추방결정에 앞장섰던 제마네크의 아내였던 것이다. 루드비크는 제마네크에 대한 복수로 헬레나를 유혹한다. 그 당시 마르케타를 제마네크도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제명에 앞정 섰다고 루드비크는 생각한다.

알고 보니 헬레나와 제마네크는 이미 오래전에 애정이 끝난 사이였고 젊은 대학생 애인이 있는 제마네크는 헬레나가 이혼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 이건 복수가 아니라 제마네크를 도와준 셈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헬레나를 추앙하는 어린 조수도 있었으니 루드비크 넌 무엇을 한 것이냐?


강제 군사 복무 중 루드비크의 유일한 빛이었던 소녀 루치에에 대한 스토리도 인상적이었다. 편지대신 묘지에 있는 꽃을 꺾어 주는 루치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루드비크. 끝내 자신을 거부하고 떠나버린 루치에의 과거 이야기를 코스트카에게 듣는 장면도 비극이라고 해야 할까? 희극이라고 해야 할까? 코스트카와 루드비크가 친구사이란 걸 몰랐던 루치에도, 루치에의 첫사랑이 루드비크라는 걸 몰랐기 때문에 코스트카는 루치에의 과거를 루드비크에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항상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그때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용서도 사과도 복수도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희석해지기 마련. 모든 기억은 내 좋을 대로 왜곡되고 만다.




그렇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사람들 대부분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 p.493 민음사



마지막장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했다. 각 장을 담당했던 모든 인물들을 모라비야 광장에 집결시킨다. 음악의 화성을 쌓듯이 개별적인 음계들이 모여 하나의 화음을 만들어낸다. 그 매개체는 '왕들의 기마행렬'이라는 민속예술이다. 하지만 민속예술은 이미 순수성을 잃고 당의 선전용으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다.

올해의 왕으로 뽑힌 야로슬라프의 열다섯 살 된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 때문에 자신이 왕이 된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오토바이 경주를 구경하러 가버린다. 마을 순례가 진행되는 동안 왕은 얼굴을 가린 베일을 써야 하는데 말도 해서는 안된다. 그러니 자신의 아들인지 확인도 확신도 할 수 없다.

야로슬라프는 아내와 아들이 자신을 속였음을 알고 허탈해하며 집을 나온다.

이쯤 되면 사랑도 우정도 자식도 모르겠고 종교도 사상도 모두 허깨비 같다.

변비약에 무너진 헬레나를 묘사하는 장면은 사실 웃어야 하나 싶기도 했다. 최고의 반전을 똥이야기로 승화시키다니!



나의 아들, 가장 가까운 존재. 나는 왕 앞에 서 있지만, 이것이 나의 아들인지 아니지 알 수 없다. 이런 것조차 모른다면, 도대체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만약 이런 일에 자신을 갖지 못한다면, 이 세상의 무엇을 믿어야 좋단 말인가? p.377 문학사상사



"그녀는 당신이 구역질이 난대요! 당신은 그녀에게 똥을 싸게 한대요! 진저리가 난다는 거죠. 그녀가 나한테 그랬어요! 정말이에요. 똥을 싸게 한대요.!" p.509 민음사




가증스런 제마네크를 때려눕히기 위해 찾아온 고향에서 루드비크의 품 안에 안긴 건 첫사랑 루치에도 아니고 불륜녀 헬레나도 아니었다. 자식과 아내에게 뒤통수 맞은 거대한 몸뚱어리의 야로슬라프였으니, 이 또한 농담이 아닐 수 없다.




함께 읽은 책들

<농담> 밀란 쿤데라 문학 사상사

<농담> 밀란 쿤데라 민음사

<밀란 쿤데라를 읽다> 김지용 휴머니스트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질문하는 소설들> 조현행 이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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