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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최은미외 6명/문학동네

by 자몽커피


제10회를 맞이한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수상작가와 작품

최은미 I 김춘영

강화길 I 거푸집의 형태

김인숙 I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김혜진 I 빈티지 엽서

배수아 I 눈먼 탐정

최진영 I 돌아오는 밤

황정은 I 문제없는, 하루


김승옥 문학상은 2013년 김승옥작가의 등단 오십 주년을 기념하여 KBS 순천방송국에서 제정한 상이다. 2015~2018년에 경영상의 문제로 중단되었다가 2019년부터 문학동네에서 주관하고 있다.

등단 10년 이상이어야 하고 지난 일 년 동안 발표된 단편소설 중에서 선정한다고 한다. 7명을 선정하여 그중에서 대상을 뽑으며 나머지 6명에게 우수상을 수여한다.

<불안의 서>를 읽고 있어서인지 배수아 작가의 이름만 봐도 반가웠다. 강화길 작가의 <거푸집의 형태>는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인데 최종 리스트에 올랐던 작품이라고 한다. <음복>을 읽고 바로 팬이 되었는데 이번 작품을 읽자마자 역대급 작품이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 가족 스릴러'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이라는 평가가 전혀 부족하지 않은 작품이다.

작품은 7편이지만 작가 노트와 리뷰글까지 하면 21편의 글이 담긴 셈이다. 최윤, 강지희, 구효서, 조경란, 김미정, 김화영, 소영현 등의 문학평론가와 소설가들이 써놓은 리뷰를 읽는 것도 큰 재미다.

정선 사북항쟁, 이스라엘 가자지구 집단 학살, 12.3 계엄, 가족, 사기, 친절, 선의 등을 묵직하고 원숙하게 풀어낸 7편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김춘영

1980년 정선 사북항쟁이 모티브인 소설이다. 구술자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 구술문학이 가진 한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던 작품이다. 화운령 사건의 목격자인 김춘영은 전형적인 면담의 틀에 갇힌 원하는 답을 해줄 생각이 전혀 없다. 면담자인 주인공 나는 김춘영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진실을 듣기를 소망한다.

마지막 면담만이 남은 상태. 4월에 내린 폭설로 등산객 부부와 대민지원을 나온 군인 2명이 흘러들어오고 그들이 나눈 대화 속에 피.아.식.별 이란 말을 들은 김춘영은 하룻밤새 머리가 다 세어버린다.

광부의 아내나 여성광부가 아닌 술집을 운영한 유흥업소 종사자라는 직업 설정에 감탄사가 나오는 작품.


소변이 흘러오는 동안 나는 어둑한 방안에서 김춘영과 비스듬히 마주앉아 있었다. 괜찮으시냐고 묻지 않았다. 그가 생의 어느 지점에 있는 기억의 습격을 받았는지 되짚지 않았다. 김춘영한테서 흘러나온 소변이 김춘영의 무릎을 지나 내 무릎에 와서 고일 때까지, 나는 그냥 그대로 앉아 있었다. p.33





2. 거푸집의 형태

친밀한 애착관계를 지닌 이모와 주인공은 자매라 불릴 정도로 똑 닮았다. 둘 사이가 틀어진 건 팔백사십만 원 때문이다. 집안의 천덕꾸러기였던 막내 이모를 10년간 엄마가 돌봐주었는데 주인공의 모자란 전셋집 비용을 엄마가 막내이모에게 받아냈던 것. 그러나 그 돈은 막내이모의 전재산이었다. 그 일 이후 이모는 주인공을 멀리하고 자신을 천대했던 큰 언니와 큰 언니의 조카들과 친하게 지낸다. 이모의 집에 유품을 정리하러 간 주인공은 낯선 여자의 방문에 당황하는데 자신이 이모의 유품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얘기에 폭발하고 만다. 자매들의 잔혹사는 겉 포장지일 뿐. 가족이란 원래 이런 거지, 작가가 작정하고 그린 얄밉고 짜증 나는 아이를 만나보시길.


나는 차의 시동을 걸었다. 출발했다. 빗속으로 달려나갔다. 멈추지 않았다. 아마 내가 계속 되새기고, 그때마다 분명히 후회할테지만, 절대로 잘못했다는 말을 꺼내지 않을 이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하면서.


백미러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조용히 읊조렸다.


못생긴 게. p.105




3.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남편과 이혼 후 국숫집을 하던 유자는 최에게 사기를 당해 집과 가게를 잃고 1.5 룸형 오피스텔 딸 집에 얹혀사는 처량한 신세다.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은율은 이런 엄마를 한심하다 못해 징그러워한다. 그녀가 맡은 전시회의 제목이 바로 <스페이스 섹스올로지>다. 유자의 성과 우주의 성은 그저 망측할 뿐일까?


이건 혹시 유에프오 따위를 믿는 사람들에 관한 건가. 그렇다 해도 그렇지⸳⸳⸳⸳⸳⸳ 외계인의 성관계 따위를 알고 싶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망측하기도 해라, 유자가 유자의 엄마였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니면 혹시 외계인이란 하는 성관계인가⸳⸳⸳⸳⸳⸳ 망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p.137




4. 빈티지 엽서

남편과 자전거 대리점을 하는 여자는 헬스장에서 만난 남자를 통해 오래전 잃어버린 자신을 자각하는 순간을 맞는다. 대학에서 영어와 스페인어를 전공한 여자는 남자가 외국에서 사 온 빈티지 엽서를 함께 읽으며 삶의 활력을 느낀다. 하지만 이런 친절과 선의는 타인에게 그저 부적절한 행위로 오해를 받을 뿐이다.

친절과 선의는 있는 그대로 주고 있는 그대로 받을 수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과 같은 삶을 살게 된 건 사소한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에요. 그걸 알아야 해요.

그건 그녀가 가끔 떠올리는 말이었고, 언젠가 그 남자에게 털어놓고 싶던 말이었고, 엽서에 적힌 글과는 무관한 말이었지만 그렇게 내뱉고 나자 정말 그런 문장이 적혀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p.180




5. 눈먼 탐정

죽은 자들의 행방에 집착했다는 작가는 엠마오로 가는 길, 필리핀 여자가 들려준 살인사건, 마르틴 루터의 잉크병에서 이 이야기를 탄생시킨다. 범죄라고 불린 만한 사건이 없어 눈먼 탐정은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 고향집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파헤치고자 한다. 그런데 설정부터 말이 안 된다. 말도 안 되는 이 이야기를 작가는 어떻게 끌고 나갈까?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나 그가 내 눈을 통해서 보고자 한 것, 영혼의 자작나무 위로 떠오르는, 내가 마침내 보게 된 그것을, 죽은 자의 숨이 거슬러올라와 생명과 섞이는 것을 보았노라고 나는 눈먼 탐정에게 쓸 것이다. p.219





6. 돌아오는 밤

계약직 회사원 조은빛은 사장 은사의 대리 조문을 하러 영국 에든버러로 향한다. 장례식을 마치고 귀국 한 날 이 12월 3일이다. 그녀는 비상계엄 속보에 하차할 역을 지나치고 결국 막차를 놓쳐 지하철 밖으로 나오게 된다. 핸드폰 전원이 나가 패딩 3인방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돌아온 건...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계엄령 우울증이 다시 도질 뻔했다. 원 제목은 '환승역'이었다고 한다.


이해 못하겠지? 괜찮아. 우리가 상황을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것만 기억하면 돼. 그러니까 왜냐고 묻지 말고, 알려고도 하지 말고, 넌 그냥 닥치고 당하면 되는 거야. p.264





7. 문제없는, 하루

나는 이미 끝난 이야기인데 누군가는 여전히 ing 중이라면? 나에겐 정말 중요한 일이 다른 사람에겐 진부하고 지루한 이야기가 되는 순간을 황정은식 문법으로 포착한다. <연년세세>의 두 자매가 떠오르기도. 동생은 모든 폭력에 민감하게 감각하는 한편 언니는 일상을 살기에도 버겁다. 그러나 날씨 하나에도 물류가 끊기고 터널에서 일어난 사고 차량을 목격하면서 언니는 자신 역시 폭력의 연쇄 고리에 놓여 있음을 직면한다. 문제없는 하루는 꿈꿀 수 없는 꿈이 되어 버렸다.


너도 내 삶을 몰라. 내가 어떻게 일하고 무엇을 견디며 살아가는지 너도 몰라. 내게 보복하지 마. 영인은 인범을 향해 그런 메시지를 적었다가 지웠다. 인범을 향한 걱정과 원망으로 뒤죽박죽인 마음을 견디기 어려울 때에는 참지 못하고 이렇게 적었다. 너는 그 일들 때문에 죽지 않아. 너는 그 일들로 죽을 수 없어.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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