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문학과 지성사
나는 그만 어지러워서 게가 그냥 나둥그러졌다. 그랬더니 아내는
넘어진 내 위에 덮치면서 내 살을 함부로 물어뜯는 것이다.
아파 죽겠다. 나는 사실 반항할 의사도 힘도 없어서 그냥 넙죽
옆뎌 있으면서 어떻게 되나 보고 있자니까 뒤이어 남자가 나오는
것 같더니 아내를 한아름에 덥석 안아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다소곳이 그렇게 안겨 들어가는 것이
내 눈에 여간 미운 것이 아니다. 밉다.
아내는 너 밤 새워가면서 도적질하러 다니느냐, 계집질하러 다니느
냐고 발악이다. 이것은 참 너무 억울하다. 나는 어안이 벙벙
하여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p.296
오늘은 문제적 작가 '이상'의 <날개> 편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가 마음만 잔뜩 무거워진 책이었다.
1910년 태어나서 1937년 동경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 불운의 천재를 어디에서부터 다뤄야 할까?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 3살 때 자식이 없던 백부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신명학교, 보성고보,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를 나와 스무 살에 조선총독부 기수로 일했다. 졸업생 12명 중 11명이 일본인, 유일한 조선인이었던 이상이 수석졸업한 이야기는 너무 유명해서 패스~
21살 첫 중편소설인 <12월 12> 일 발표, <조선과 건축> 표지 디자인 현상 공모에서 1등과 3등을 차지한다. 22살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자상>이 입선. 글, 그림, 건축에 소질이 있었던 멀티아티스트였다.
23살 결핵 치료차 배천온천에서 금홍이를 만나고 카페 '제비'를 개업한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 발표했던 시기는 그의 나이 스물다섯에서 스물일곱이다.
<날개>는 1936년에 발표한 작품이니 그가 죽기 1년 전이다. <오감도>로 쓴 맛만 보다가 드디어 문단의 총아로 인정받자마자 사그라졌으니 불운한 예술가의 숙명을 타고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품의 주인공은 아내에게 기생해서 사는 무능력한 지식인이다. 좋게 말해 기둥서방인데 포지션이 애매하다. 역시 경제권을 가진 자가 권력자라는 건 동서고금 불문율이다. 그는 하루종일 아내의 윗방에서 잠만 잔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방에 누워 머릿속으로 발명도 했다가 논문도 썼다가 시도 쓴다. 하지만 잠이 드는 동시에 사념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아내가 외출할 때마다 주인공은 아내방에 가서 돋보기로 불장난을 하고, 아내의 손거울로 얼굴을 비춰보고, 화장품 냄새를 맡으며 아내의 체취를 찾는다.
돈도 못 버는데 친구도 없는 아싸 중에 아싸다.
아내방에 내객이 들어오면 그는 소리 없이 조용히 잠을 청한다. 내객들은 그의 존재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좀 하기 어려운 농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전이 좀 지나면 그들은 집으로 돌아간다. 주인공은 혼자 먹어야 하고 혼자 자야 한다. 아내는 한 번도 그를 자기 방으로 부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돈없는 천재 남편과 미모와 경제력을 지닌 아내의 고단수 싸움이 시작된다.
33번지 18 가구는 일렬로 쭉 늘어선 구조를 하고 있다. 그중에 7번째 칸이 아내의 방이다. 그런데 이 방은 장지로 두 칸으로 나뉘어 있는 구조다. 해가 전혀 들지 않는 윗방이 주인공의 방, 해가 잘 드는 아랫방이 아내의 방이다. 주인공이 외출을 하려면 반드시 아내방을 경유해야 한다.
자궁 속의 아이처럼 먹고 자는 삶, 뒹굴뒹굴하면서 유유자적하는 주인공은 어린아이도 아닌 아예 태아처럼 퇴행을 선택한 것 같다.
제대로 듣지 않고, 똑바로 보지 않는 건 양수 속의 태아라면 면죄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회피라는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내객이 돌아가면 아내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그의 방으로 와서 조소도 고소도 홍소도 아닌 웃음을 짓는다.
일말의 애수인지, 그리고 주인공의 머리맡에 50전짜리 은화를 놓고 간다. 아마도 내색 없이 조용히 있었던 아이에게 주는 사탕 같은 것인가?
돈을 모으라고 저금통을 주지만 열쇠는 가져가버리는 아내. 보란 듯이 모아둔 저금통을 화장실에 버리는 남편. 둘다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왜 내객들이 아내에게 돈을 주는지, 아내는 또 나에게 은화를 주는 것인지, 주인공을 그것을 쾌감이라고 정의 내린다.
그리고 그의 첫 외출이 시작된다. 균열의 시작이다. 첫 술에 배부를 순 없겠지만 위대한 발걸음의 시작은 모두 이러했으니까~
오랜만의 외출이 힘이 들었는지 돈 한 푼도 못쓰고 피로를 이기지 못해 그는 자정 전에 들어온다. 내객이 있던 아내의 매서운 눈초리를 못 본 체하며 그는 아내방을 지나 그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전까지 어떤 사람과도 소곤거리는 법이 없던 아내의 목소리가 작아진다. 어쨌든 그동안 눈치 보지 않던 아내도 남편의 귀를 의식하는 장면이다. 그날 밤 주인공은 아내방으로 비칠 비칠 달려가 5원을 아내 손에 쥐여주며 의식을 잃는다. 이튿날 그는 아내방에서 눈을 떴고 삼십삼 번지에 살기 시작한 이래 맨 처음 일어난 일이었다. 유레카! 할렐루야다!
드디어 아내방에서 잤어!
두 번째 외출 후 아내 손에 2원을 쥐여주니 이번에도 아내는 자기 방에 재워주었다.
이제 아내는 남편을 다른 방법으로 꼬시기 시작한다. 옷 한 벌 안사준 이유도 그동안은 방에서 죽은 듯이 조용히 잠이나 자고 있으면 만사 오케이였는데 아예 밖으로 내보내는 방법을 선택한다.
지폐를 쥐어주며 이번에는 아주 늦게 들어오라고 속삭이는 아내. 세 번째 외출은 아내 말대로 하려고 했다. 경성역 대합실에 있는 티룸에서 커피도 마시고, 메뉴도 여러 번 읽고, 어렸을 때 동무도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가게문이 닫을 시간이라 11시가 되어서 나와야 했다. 그런데 비가 온다. 우산도 없는데, 옷도 얇은데
아~ 너무 춥다. 그냥 집에 가고 싶다. 역시나 아내방에는 내객이 있었다. 이번에는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축축한 발자국을 남기며 방으로 들어간다. 정말 이 인간이 장난하나!
룰을 깬 건 항상 우리의 주인공이다. 그의 반항이 너무 좋다. 그런데 아내도 이번에는 만만치 않다. 아예 재워버리는 수법을 써버린다.
감기에 걸린 그는 한 달 동안 수면 상태로 있었다. 감기가 다 나았지만 아내는 자꾸 약을 먹인다. 왜 자꾸 졸릴까? 한 달 만에 들어간 아내의 방에서 그는 아스피린과 아달린(수면제)을 발견한다. 복잡한 심경으로 외출을 한 그는 이번에는 산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달린 여섯 알을 털어 넣고 깊이 잠이 든다.
혹시 예전에도 수면제 먹였던거 아니었니?
역시 사람은 잠을 제대로 자야 머리가 돌아간다. 눈이 맑아진다. 일주야(24시간)만에 눈을 떠 부리나케 집에 들어갔더니 절대 보아서는 안 될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그런데 이런 적반하장도 없다. 도적질과 계집질을 하다 날을 새웠냐며 아내가 발악을 한다.
음 제발 저린 거지. 이번에야 말로 주인공 승이다.
다시 집을 나온 그는 경성역을 찾아간다. 여기저기 쏘다닌다. 스물여섯 해를 회고해 본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이유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한다. 어항 속 금붕어가 자신이었다고,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관계도 없이 아내가 주는 모이를 먹으며 사육된 남자.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p.299
주인공의 방탈출은 그와 아내 모두에게 윈윈이다.
박제된 새에서 살아있는 새가 되기 위해서는 날개가 돋아야 한다. 그에겐 돈과 사랑 이전에 글이 있었다. 펜을 들 시간이 된 것이다. 작가는 글을 쓸 때 인간으로서 자격을 얻는다.
각자의 이유로 작품활동을 하지 못하는 작가들에게, 슬럼프를 겪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각성제가 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상하고 이상하고 이상한 작가 李箱.
태어났으면 나갈 것, 반항할 것, 그리고 글을 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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