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디아 피녜이로/비채
새벽 2시나 3시쯤 엄마가 화장실에 간다고 꼭 나를 깨우니까. 그럼 난 엄마를 부축하고 화장실로 가서 팬티를 내리고 볼일을 다 본 뒤 다시 올려주지만 거길 닦지는 않아. 맞아, 엄마. 그것까지는 못하겠더라고. 그건 정말 못 하겠어. 그래서 대신 엄마를 비데에 앉히고 수건을 줘. 축축한 수건을 받고 나면 변기 물을 내려. 그런 다음에 엄마를 다시 침대에 누이고 이불을 덮어주지. 엄마는 침대에 누운 채 나를 빤히 쳐다봐. 이는 다 빠져서 늘 무언가에 놀란 듯이 휘둥그렇게 뜬 채 말이야. 뺨에는 구레나룻이 철사로 된 줄처럼 자라나 얼마나 지저분해 보이는지 몰라. 그리고 엄마는 내가 방에 가려고 하면 꼭 나를 불러서 발을 가지런히 놓아달라, 이불을 바로 펴달라, 아니면 베개를 똑바로 놓아달라고 한다고. 그렇게 엄마 부탁을 다 들어주고 내 방으로 가려다 낌새가 이상해서 다시 뒤를 돌아보면 오줌 냄새가 코를 찔러. 그동안 피부에 깊숙이 스며들어서 그런지 냄새가 절대 가시지를 않아. 그러고 나면 가쁘면서도 쉰 듯한 엄마의 숨소리가 들리고 나는 침대 머리맡 탁자의 불을 끄지. p.162
<엘레나는 알고 있다> 제목부터 매력적이다. 무엇을 알고 있다는 말인지? 우선 그것이 너무 궁금하다. 목차를 봐도 도저히 감을 잡지 못하겠다.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파이널리스트에 오른 작품이다.
목차 오전 두 번째 알약
정오 세 번째 알약
오후 네 번째 알약
매일 같은 일상을 되풀이하는 모녀가 있다.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엘레나와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딸 리타의 이야기다. 산책, 독설, 멀어지기, 그리고 마침내 침묵. 싸우는 이유는 늘 달랐지만 날카로운 목소리와 말투가 그녀들의 결코 변하지 않는 일상이다. 나도 딸이지만 리타가 엄마에게 퍼붓는 말의 수위는 가감이 없다.
파킨슨병은 중추신경계의 질병으로, 주로 신경세포가 퇴행하거나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등 어떤 식으로든 변형되어 도파민이 정상적으로 분비되지 않아 발생한다. 뇌에서 도파민이 명령을 전달해야 발이 움직인다는 것. 엘레나는 도파민을 전령으로, 자신의 병은 ‘그 여자’, ‘망할 년’이라고 부른다.
엘레나의 일상은 몇 번째 약을 언제 먹었으며 약효가 얼마나 지속될지 확인하고 계산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정신은 멀쩡한데 신체적인 반응이 따라주지 않는다. 그래서 몸이 움직이고 생각할 수 있는 한정된 시간 안에 딸의 죽음에 감추어진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그날은 비가 왔고 엘레나는 미용실에서 풀 코스를 받고 있었다. 집에서 두 블록 떨어진 성당 종탑에 목을 맨 채 발견된 리타. 엘레나는 딸이 절대 자살할 리 없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리타는 어렸을 때부터 벼락을 무서워해서 비가 오는 날엔 '절대로' 교회에 가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 믿음도 벼락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그런데 비 오는 날 교회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
엘레나는 엄마의 촉으로 살인자들을 추려나가고 마침내 이사벨 만시야를 만나기 위해 기차를 타러 집을 나선다.
첫 번째 용의자 리타의 남자친구 로베르토 알마다
두 번째 용의자 건강보험 회사직원들
세 번째 용의자 후안신부
네 번째 용의자 베네가스 박사
그리고 마지막 용의자 엘레나 자신.
경찰은 리타의 죽음을 자살로 결론 내리고 사건을 종결한다. 용의 선상에 올랐던 이들은 모두 알리바이가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건을 담당했던 아베야네다형사는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엘레나를 따로 만나서 사건에 대한 그녀의 끊임없는 한풀이를 들어준다.
엘레나는 20년 전 딸 리타의 도움으로 낙태를 모면한 이사벨이 사는 수도로 떠난다. 이사벨은 매년 크리스마스 카드와 함께 가족사진을 보내 고마운 마음을 전해왔었다. 이런 호의를 엘레나는 받아야 할 '빚'으로 생각한다. 이 소설은 엘레나가 기차, 택시를 타고 이사벨의 집까지 가는 하루의 여정을 다룬 소설인데 병에 갇힌 엘레나의 걸음걸이로 같이 걷다 보니 파킨슨을 몸소 체험한 듯하다. 20년 전 산파의 집 앞에 있는 흑백체스판 무늬 블록에서 리타는 이사벨을 만났다. 이사벨은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상태였고 리타는 학교 출근길이었다. 비 오는 날은 교회를 가지 않는 나일론 기독교 신자인 리타도 산파의 낙태시술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결혼과 출산경험이 없는 리타에게 낙태는 결코 용납 할 수 없는 자신의 마지막 신념 같은 것이었다.
동성애자였던 남편에게 이사벨은 임신할 때까지 겁탈을 당해왔다. 임신중절수술을 막은 것도 모자라 리타와 엘레나는 애원하는 이사벨을 남편의 집으로 들여보낸 것이다. 남편과 남편의 남자는 9달 동안 이사벨을 감시했고 진정제를 투여했다.
이 여자는 누구니? 그런데 넌 가다 말고 왜 돌아온 거야?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났어, 엄마. 남편 병원에서 일하는 어느 간호사가 제게 주소를 알려줬거든요. 그날 오전에 검사 결과를 들고 남편을 만나러 갔을 때 제가 우는 모습을 봤던 모양이에요. 물론 고함도 들었을 거고요. 남편이 이미 알고 있더군요. 병원에서 미리 알려주었던 거죠. 그 세계는 원래 힘 있는 자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자로 득실거리니까요. 전 그이에게 사정하러 간 거였어요.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고요. 그랬더니 제 뺨을 때리더군요. p.220
20년 뒤에야 맞닥뜨린 진실 앞에서 엘레나는 혼란스럽다. 간병인의 무너진 삶을 이야기하는 듯하다가 갑자기 여성의 임신중절에 대한 간섭을 자연스럽게 들이밀기 때문이다.
자신은 자연스럽게 여성에서 어머니가 되었고 생명을 키워내고 자식을 길러내는 삶을 살아왔다. 다른 선택지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간병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딸 리타의 경우 남자친구도 있고 결혼 이야기도 오고 가지만 임신을 할 확률이 적다. 딸의 남자친구인 로베르토 알마다는 꼽추다. 딸의 나이는 40대. 이사벨은 결혼하고 임신을 했지만 성폭행에 의한 임신이었고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고 기르는 게 너무도 당연했던 엘레나,
결혼은 할 수 있지만 임신은 불가능한(생물학적인 나이 때문에), 절대로 엄마의 엄마(간병인)가 되고 싶지 않다는 리타,
절대로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성폭력으로 임신해 아이를 낳은 여자 이사벨.
지금 당신의 몸속에는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어요. 내 배 속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어린 생명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으면 당신도 생각이 바뀔 거예요. 당신도 그 아이를 원하게 될 거라고요. 당신이 뭘 안다고 이래요? 제발 그 어린 생명을 죽이지 마세요. 내 앞에서 당장 꺼져요. 배 속의 아기를 꺼내지 말아요. 아기라뇨? 내 배 속에는 아기가 없다니까요. 아뇨, 있어요. 엄마도 없는데 무슨 아기가 있다는 거예요? 당신은 임 엄마예요. 난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아요. 저 여자가 그러는데 자기는 엄마가 되기 싫대, 엄마. 넌 그 말을 믿니? p. 182
여성으로 태어나 결혼을 하면 당연히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던 시대도 살아봤고,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내가 엄청난 시대를 살아온 느낌이 든다. 지금은 결혼도 선택, 아이도 선택인 시대를 살고 있다 보니 엄마라는 개념이 이제는 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희생과 사랑으로 대표되는 명제에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엄마라는 이름이 내포하고 있는 책임감의 무게가 그 어느 때보다도 무겁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는 내 몸으로 낳든 아니든 아이라는 매개체가 있어야 성립한다. 여성에게 엄마는 당연한 수순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원치 않는 임신과 낙태문제가 종교와 만나면 여성에겐 선택지가 없다.
딸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몸이 필요했던 엘레나는 이십 년 전 도움을 주었다고 믿었던 이사벨을 찾아가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듣고 혼란에 빠진다. 당시 엘레나와 리타는 이사벨을 구해준 은인이 아니라 성폭력이 일어났던 그녀의 집으로 고스란히 돌려보낸 가해자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엘레나는 비 오는 날 절대로 교회에 갈 리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맞받아치는 이사벨의 말에 그녀 스스로 덮고 있었던 딸의 입장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리타가 죽기 전 종합병원에 갔었던 일이 생각난 것이다. 검사결과 엘레나는 파킨슨병중에서도 특이한 유형의 파킨슨플러스라는 질환이 발견된 것이다. (*파킨슨병 증상과 함께 술 취한 사람처럼 걸음을 걷는 실조증, 혈압이 불안정한 자율신경장애, 기억장애나 환시, 소변을 잘 가리지 못하는 증상 등을 등반한다.)
리타가 의사를 향해 울부짖는 이 장면이 이 책의 가장 클라이맥스이면서 앞으로 100세 시대의 부모를 둔 모든 자식들의 현실인 것 같아서 너무도 씁쓸했다. 나일론 신자지만 낙태만큼은 허용할 수 없었던 리타도 어머니의 간병 앞에서는 인류애를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냥 파킨슨 병이 아니라 끝을 알 수 없는 플러스가 붙었기 때문인지도. 신생아를 키우는 건 성장하고 끝이 보이는 일이지만 아픈 엄마의 엄마 역할을 한다는 건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예 보려고 하지도 않다가 자기도 모르게 힐끔 보고 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잖아요. 그런데도 뭐가 더 있다고요? 리타. 네 마음은 잘 알지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야. 당신은 내 마음이 어떤지 잘 몰라요. 리타가 그의 말을 반박했다. 얘야, 그건 박사님 잘못이 아니잖니. 그렇지만 내 잘못도 아니야, 엄마. p.229
가족 돌봄의 한계란 어디까지일까? 인구절벽인 대한민국에서 이 문제는 이제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될 수 없다. 이 책에서 리타는 국가의 도움을 받는 지난한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보험혜택을 받기 위해 기관을 방문해야 하고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하고 결국 아픈 엄마의 몸이 증거가 되기 위해서 시간을 내고 동행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사의 한 줄 진단명이 빠졌다는 이유로 약을 타는 과정도 쉽지 않다. 이 모든 과정을 리타 혼자서 감내해야 하는 현실. 엄마와 대화는 하지만 깊은 애정의 말은 오가지 않는다. 서로 각자가 원하는 바를 토해내는 사이일 뿐.
따님은 비가 내렸기 때문에 나갔을 거예요. 어쩌면 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그게 바로 나예요. 엘레나가 고백한다. 이사벨은 그녀를 빤히 보며 말한다. 때로 다른 이의 몸이 두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법이죠. p.245
나에 대해서도 자식(타인)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엘레나는 리타가 자신의 딸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가 오는 날은 절대로 교회에 가지 않는다는 것. 말 그대로 '절대'라는 것은 없다. 단지 내가 그렇다고 믿고 싶을 뿐.
그런 딸이 다른 곳도 아닌 교회에서 생을 마감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섣부른 이해와 호의 또한 나라는 몸 안에 갇힌 사고일 뿐이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흔한 죄가 아닐까 싶다.
엘레나는 알고 있다. 모르고 있다. 외면한 것이다. 회피다. 직면했다. 등등의 다양한 제목이 될 수 있는 책.
엘레나는 계속 살기로 한다. 인간은 자살의 욕망도 있지만 살고자 하는 욕망도 가지고 있다.
그동안 싫어했던 고양이를 쓰다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엘레나를 보면서 누구는 끔찍했다, 아파도 삶의 의지는 있는 것이다, 도망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는 의견 등이 나왔다.
나의 몸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의 몸이 두렵게 느껴진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한 오늘이다. 당장 걷고 싶어지는 소설 <엘레나는 알고 있다>였다.
p.s 2020년 아르헨티나는 임신중단에 관련된 법을 개정했다. 임신 십사 주 이내에는 임신중단을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법 개정 이전에는 성폭행으로 임신한 경우와 여성의 생명에 위협이 되는 경우에만 합법적으로 임신중단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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