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문학동네
"아마 낙하를 막을 방법은 찾을 수 없겠죠." 소년은 말했다.
"하지만 치명적인 결과를 피할 방법이 없진 않아요."
"이를테면 어떤 거지?"
"믿는 겁니다."
"무엇을 믿는데?"
"누군가가 땅에서 당신을 받아주리란 것을요.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겁니다. 보류하지 않고, 온전히, 무조건적으로."
나는 그 정경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튼튼한 양팔을 지닌 누군가가 야자나무 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떨어지는 나를 정확히 받아준다. 하지만 그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누군가일 것이다. 나는 소년에게 물었다. p.744
여섯 명이 모였다. 대부분 20대에 하루키 소설을 접하고 이런저런 연유로 잠시 그를 떠났다가 이번 소설로 다시 사랑을 불태우게 된 진정한 하루키빠들의 모임이었다. 700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이기도 하거니와 8월이라는 특수성 때문이겠지만 소수모임만의 농밀함이 그 어느 때보다 좋았고 충만한 시간이었다.
첫 발표 이후 43년,
마음에 품어왔던 소설을 마침내 완성하다!
1980년 문예지 <문학계>에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라는 제목으로 중편소설을 잡지에 실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책으로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소설을 대폭 수정해서 발표한 것이 1985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사실. 하지만 이 소설도 결말이 마음에 안 들어 다시 쓰게 되었으니 작가의 나이 71인 2020년에 쓰기 시작해 드디어 2022년에 출간한 소설이 바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다.(국내는 2023년에 번역출간되었다.) 그만큼 작가 스스로 할 얘기가 많았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세계의 끝'부분이 바로 도시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두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도시는 비슷하면서도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데 같이 읽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세계의 끝'에서는 주인공이 도서관에서 일각수의 머리뼈를 읽는데 이번 소설에서는 달걀모양으로 바뀌었다. 일각수의 뼈는 '죽음'을 달걀은 '생명'을 상징한다면 이것 또한 큰 변화일 것이다. 세계의 끝에서는 벽이 움직이지 않는데 이번 소설에서는 벽이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총평을 간략하게 말하자면 그 어떤 하루키소설보다 쉬웠다. 잘 읽혔다. 따숩다. 등등이었다. 사실 하루키 소설은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작가가 차려놓은 세계에서 그냥 '난해한 재미'를 느끼면 그만인 것이지 그래서 그 세계가 어쨌다는 거야라고 들어가면 답이 없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느낀 점은 '첫사랑 소설을 쓰고 싶다'였다. 자기 복제라는 한계성은 있지만 (항상 누군가가 사라진다. 이중세계가 나타난다. 마술적 리얼리즘의 현상이 일어난다. 등등) 매일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작가의 성실성에, 나이 칠십에도 십 대의 사랑을 쓰는 그 소년미가 너무 좋다.
연녹색 민소매 원피스하나로 그려지는 십 대의 사랑은 그냥 그걸로 끝이지 않은가. 진녹색 안경, 쑥색약초, 초록색 방수우산으로 이어지는 초록초록한 청춘의 색이 싱그럽다.
그렇다. 그리하여 우리 두 사람은 그 지점에서 발을 멈추고, 열일곱 살과 열여섯 살의 세계에 머물렀다. 강물에 둘러싸인 흰 모래톱과 초록빛 여름풀 사이에. 여기서 더 나아갈 일은 없다. 나에게나 그녀에게나, 이 이상 시간을 거슬러오를 필요는 없다. p.693
"당신 역시 누군가를 깊이 사랑했던 강렬하고 선명한 기억을 갖고 있지요. 그리고 그 사람의 영혼을 좇아 머나먼 곳으로 떠났다가 이렇게 다시 돌아오셨고요." p.441
책 마지막까지 두 주인공의 이름과 더불어 주요 등장인물은 이름이 없다. 아니 알 수 없다. 실존 vs 본질에 대한 얘기도 오고 갔는데 철학적인 고찰까지 들어가면 일단 끝이 안 날 듯싶다.
어쨌든 '이름이 없다'는 본질이며 이름에 갇히지 않는 것, 하지만 호기심을 갖는 것은 실존의 '나',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말까지 나왔다.
그림자가 나고 나가 그림자라고 했듯이 작가는 이 둘을 두부 자르듯 이분법적인 세계로 나누지는 않고 있으니 왜 그런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고등학생 에세이 대회에서 나란히 3등 4등을 하게 되면서 우리의 두 주인공은 만나게 되고 편지왕래를 하면서 둘은 가까워진다. 현실세계에 살고 있는 자신은, 벽 너머 세계에 살고 있는 본체의 그림자라며 소녀는 소년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본체가 살고 있는 그 도시에 대해 말한다.
소설은 현실세계와 벽 너머의 도시에서 '꿈 읽는 이'의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의 시점이 교차하면서 전개된다.
도시는 가장 완전하다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문지기가 유일한 문을 지키고 있다.
주인공이 이 도시게 가게 된 까닭은 인생의 전부였던 첫사랑 소녀가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에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이었고, 그에게 남은 건 그녀의 편지와 그녀와 함께 만들었던 상상의 도시뿐이다.
"우리는 어는 정도 성장하면 그림자와 떨어져요. 갓난아기의 탯줄이 끊어지고 어린아이의 유치가 빠지듯이. 그리고 떼어낸 그림자들은 벽 바깥으로 내보내요." p.69
소년은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유통사에 취직한다. 애인을 사귀고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한 적도 있지만 매번 일은 그르치고 만다. 그의 마음속에 항상 그녀가 있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듣지 못한 채 다시 혼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시간은 23년이 지나 마흔이 되었다. 마흔다섯 살 생일이 다가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공은 구덩이에 쿵하고 빠진다.
막상 떨어지고 나면 상당히 기묘하게 보이고, 뭐 저런 걸 애지중지 달고 다녔나 싶은 그림자. 대단한 도움을 주지도 않았던 그림자를 떼어버리고 오래된 꿈을 읽는 도서관지기가 되기 위해 눈에 상처를 내고 어른이 된 소년은 그 도시에 들어간다.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그림자가 죽어버리면 현실세계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찌름으로써 운명의 희생자로 주저앉지 않고 스스로 벌을 준 뒤 운명을 받아들이는데 주인공 역시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영웅 같은 미장센을 보인다.
오래된 꿈은 달걀처럼 생겼는데, 크기와 색깔은 하나하나 다르다.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낳고 간 알 같다. 정확히 말하면 달걀모양이라고 할 수 없다. 손에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래쪽 절반이 위쪽에 비해 더 불룩한 것을 알 수 있다. 진녹색 안경을 벗고 오래된 꿈의 표면에 양손을 얹는다. 손바닥으로 그것을 감싼다. 오 분쯤 있으면 오래된 꿈이 깊은 잠에서 차츰 깨어나 표면이 엷게 빛나기 시작한다. 양 손바닥에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온기가 전해진다.
책의 표지가 이 부분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진녹색 부분은 주인공이 쓰고 있는 안경을, 달걀이 내뿜고 있는 색감은 안 쪽 표지에 나타나 있다.
"오래된 꿈이란, 이 도시가 성립하기 위해 벽 바깥으로 추방당한 본체가 남겨놓은 마음의 잔향 같은 것 아닐까요. 본체를 추방하더라도 송두리째 모조리 들어낼 순 없고, 아무래도 뒤에 남는 게 있어요. 그 잔재들을 모아 오래된 꿈이라는 특별한 용기에 단단히 가둔 겁니다. " p.177
실은 반대일지도 모르거든요. 어쩌면 바깥세계에 있던 것이 진짜 그녀이고, 이곳에 있는 건 그림자인지도 몰라요. 만약 그렇다면 모순과 가짜 이야기로 가득한 이 세계에 머무른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당신은 확신합니다까, 이 도시에 있는 그녀가 진짜라고? p.152
자신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매일 그녀가 끓여주는 약초를 마시고 일이 끝나면 그녀를 데려다주며 살 것인가? 아니면 벽 바깥의 세계에서 경험한 그녀의 추억을 간직한 채 살아야 할 것인가?
그림자의 설득으로 주인공은 탈출하기로 결정한다. 유일한 탈출구인 남쪽 웅덩이를 통해서.
주인공은 그림자를 바깥세계로 탈출시키고 자신은 남기로 한다. 전작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는 소녀가 감정을 갖기 시작하고 둘은 숲 속으로 탈출해서 살아간다는 설정으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소설에서는 끝까지 소녀는 감정을 갖지 않는 걸로 그려지고 그래서 주인공은 탈출할 마음을 먹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인간은 때때로 자신의 세계로 침잠하고 싶을 때가 있다. 마음의 동요가 없는 세계로. 그리고 그런 세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계속 그 도시에 남기를 선택한 주인공이 결국 현실로 돌아오는 걸로 다시 결론을 낸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쪽저쪽을 왔다 할 수 있어야 한다. 바깥세계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웅덩이 또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이 때문에 두려움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희망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
2부에서는 현실로 돌아온 그림자(?)의 삶이 그려진다. 그는 그동안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회사 후배의 도움으로 작은 지방도시의 도서관에서 일하게 된다.
시네마현 ***군 Z**마을 도서관 관장 고야스 다쓰야의 사연도 범상치 않다. 그는 한순간 어린 아들을 사고로 잃고 아내마저 자살한다. 그는 양조장을 개조해 그의 오랜 꿈이었던 도서관을 만들고, 베레모와 스커트를 입고 다니는 기행을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의 사정을 알기에 그냥 받아들인다.
"첫째로는, 이렇게 스커트를 입고 있으면, 네, 왠지 내가 아름다운 시의 몇 행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랍니다." p. 268
관장은 아들과 아내를 잃고 심장마비로 이미 죽은 영혼이었고 사서인 소에다씨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왜 죽은 영혼이 나타나는지 궁금해하지 말자. 그는 너무 급작스럽게 죽었고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도서관에서 할 일이 남아있으니 할 일을 다하고 나면 자연히 사라질 것이다.
주인공은 월요일마다 관장의 묘에 안부차 인사를 하러 다니고 마을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와 블루베리머핀을 먹는 반복된 일상을 산다.
카페여사장과 주인공은 친밀한 사이가 되고 코르셋으로 자신의 몸에 벽을 치고 살고 있다고, 성행위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자신의 약점을 이야기한다.
학교를 다니지 않고 도서관에 출석도장을 찍는 마린보이 소년이 등장한다.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소년은 무덤가에서 혼잣말로 얘기한 그 도시의 이야기를 듣고 도시 지도를 그려서 준다. 그리고 소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바로 도시의 도서관으로 가 주인공의 일을 계승한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도시를 나가라고 권유하면서 이 소설은 끝이 난다.
상실을 겪은 인물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자신의 본체는 도시에 있고 지금 현실에 있는 건 본체의 그림자라는 소녀.
2. 부상병들을 치료해 주는 요양소로 쓰인 여관에서 현실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여자 망령을 본 노인.
3. 시곗바늘이 없는 오래된 손목시계를 차고, 늘 스커트를 입고 다니는 도서관 관장 고야쓰 다쓰마.
4. 옐로서브마린보이,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소년 M**
5. 코르셋으로 자신의 몸에 벽을 치고 사는 카페여사장.
6. 마지막으로 첫사랑을 못 잊는 우리의 주인공.
상실을 경험했을 때 필요한 안전지대는 어디일까? 무의식의 세계? 도시?, 도서관?, 카페?, 숲 속?...
첫사랑을 아들과 아내를, 언어를 잃은 이들이 모이는 곳.
도서관은 과연 어떤 곳일까.
도시의 도서관에는 책이 없다. 인간의 감정이 담긴 달걀모양의 알이 있을 뿐. 역병의 씨앗 같은 인간의 감정, 즉 슬픔, 망설임, 질투, 두려움, 고뇌, 절망, 의심, 미움, 곤혹, 고뇌, 회의, 자기 연민...... 그리고 꿈, 사랑
생각해 보면 이런 역병의 씨앗이 가장 많은 곳이 도서관이 아니겠는가. 인간 감정의 대 서사물이 담긴 곳, 그러니 그 도시의 도서관에는 책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편안한 분위기의 특별한 장소를 마련하고, 그것이 고야스 씨가 생각한 이상적인 소세계였습니다. 아니, 소우주라고 해야 할까요. p.406
잃어버린 마음을 받아들이는 특별한 장소인 도서관을 당신은 가지고 있는가? 누군가 땅에서 나를 받아줄 이가 있다는 믿음 하나면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명백한 소설.
한결같이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는 것이 이번 모임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불쌍한 인물로 도서관장 고야쓰가 선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는 죽어서 아이와 아내와 같이 무덤에 묻혔는데도 그들을 볼 수(?)도 만날 수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영혼이 되었는데도 소통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에 정말 끝까지 상실의 삶을 살았던 그가 1등을 차지했다. 그러니 그런 그가 건네는 위로가 찐 위로라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올 수 있다는 말. 소중한 분신인 그림자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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