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멜빌/현대 지성
'잡힌 고래'와 '놓친 고래'에 관한 두 원칙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 사회에 있는 모든 법률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법의 전당은 복잡한 그물무늬로 장식되어 있지만, 블레셋 사람들의 신전과 마찬가지로 단 두 개의 기둥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소유가 법의 절반'이라고 다들 말하지 않는가? 어떻게 얻었느냐 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일단 수중에 들어온 물건은 법적으로 절반은 차지한 것이 된다. 더 나아가 소유는 법의 전부가 되는 경우도 많다. 러시아 농노나 공화국 노예의 근육과 영혼이 '잡힌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과부의 마지막 한 닢이 탐욕스러운 지주에게 '잡힌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아직 죄가 발각되지 않은 악당의 대리석 저택, 표지기 대신에 문패가 달려 있는 저 큰 집은 '잡힌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비통한 파산자가 가족이 굻어죽는 것을 막기 위해 돈을 빌리러 왔을 때, 고리대금업자 모르드개가 무지막지하게 떼는 선이자가 '잡힌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저 가공할 작살잡이 존 불에게 가엾은 아일랜드는 '잡힌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저 사도 같은 창잡이 조나단 형제에게 텍사스는 '잡힌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 모든 경우에서 '소유는 법의 전부'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p.491
강렬하고도 유명한 첫 문장 '나를 이슈메일이라 불러다오'로 시작하는 책, <모비 딕>. 책을 읽고 나서 느낀 점은 딱 하나였다. '왜 이제야 읽었을까.'
향유고래 중에서도 가장 포악한 흰 고래 모비 딕. (일반적으로 향유고래는 검은색이다.) 모비 딕에게 다리를 잃은 에이해브 선장의 복수극이라는 한줄평이 무색할 만큼 너무도 많은 것을 담고 있어서 토하고 토해도 죽을 때까지 토할 수 있는 책이라고 하겠다.
또라이는 또라이를 알아본다고 나는 몇 번이나 이 책을 펼쳤다 덮었다를 반복했다. 정말 고래에 미치지 않고서야 이 많은 자료를 모을 수가 있나? 글을 쓰려면 사랑해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건 사랑을 뛰어넘는 광기 그 자체가 아니던가!
13살부터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허먼 멜빌은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은 인물이다. 선실 급사로, 말단 선원으로 생활했던 그 경험은 그에게 예일이자 하버드가 되어 주었다.
1841년 1월 허먼 멜빌은 어커시넷호를 타고 출항한다. 주인공 이슈메일이 돈도 없고 육지에는 딱히 흥미로운 일도 없어 배를 타고 바다를 둘러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처럼 당시 멜빌도 공황으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자 배를 탄 것이다.
출항하고 곧 멜빌은 20년 전 향유고래의 공격으로 침몰한 에식스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포경선이 바다에서 만나는 일을 갬gam이라고 하는데 리마호에서 일등항해사이자 에식스호의 재앙을 글로 남긴 오언 체이스의 아들을 만나게 되고 책을 빌리게 된다. 그 책에는 25미터나 되는 향유고래가 에식스호의 뱃머리를 들이받아 박살내버려, 선원 스무 명이 8 미터 짜리 보트 세대로 탈출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들은 식인종이 사는 마르키즈 제도보다 50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지만 문명화된 항구로 가는 게 낫겠다고 결정을 내린다.
석 달 뒤 단 다섯 명의 생존자가 남았고 그들 손에서 발견된 사람 뼈가 입증하듯이 그들은 가장 두려워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19개월 뒤 멜빌은 항해 중 마르키즈 제도에 도착하자 오언 체이스와 정 반대로 행동하겠다고 결심한다. 즉 신인종과 같이 산 것이다.
이 경험은 이슈메일과 퀴케그의 만남에 잘 그려지는데 문명과 야만의 인위적인 구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다.
맨해튼을 떠나 낸터킷 섬으로 가는 길에 배가 끊겨 물보라 여관에 머물게 된 이슈메일은 낯선 작살잡이와 한 침대를 쓰게 된다. 온몸에 문신이 있고, 뉴질랜드 원주민의 두개골을 팔러 다니는 퀴케그를 보고 이슈메일은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기독교적 예배와 우상숭배자의 기도 역시 하나라는 것을 인식하고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술 취한 기독교도보다는 정신 멀쩡한 식인종이 낫다며 이슈메일은 퀴케그와 영혼의 베프가 된다.
이제 퀴케그는 내 이웃이다. 퀴퀘그가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일이 무엇인가? 나와 함께 장로교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그의 예배에 동참해야 한다. 우상숭배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대팻밥에 불을 지폈고, 그 무해한 작은 우상이 넘어지지 않도록 도왔고, 퀴케그와 함께 우상에게 구운 건빵을 바쳤고, 우상 앞에 두세 번 절을 한 뒤 우상의 코에 입을 맞췄다. p.94
포경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면 우울감을 떨쳐 버릴 수 있을까? 고래잡이들은 출항하기 전에 교회를 간다. 일명 고래잡이 예배당인데 고래잡이를 하다가 실종되거나 사망한 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대리석이 걸려있다. 분명 경고다. 고래잡이=죽음이라는 공식을 전시하는 곳이다. 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배를 타는 사람들의 이야기.
인생이라고 부르는 기이하고 뒤죽박죽인 현상 속에서 어떤 기묘한 순간이나 사건이 벌어진다. 그러면 우리는 우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농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농담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는 것은 아니며, 그 농담이 다름 아닌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하게 된다. p.298
낸터킷에 도착한 이슈메일과 퀴케그는 펠레그선장과 빌대드 선장이 공동선주로 있는 피쿼드호에 이름을 올린다. 그들은 될 수 있는 한 적은 돈으로 선원들을 고용하려고 한다. 모두의 자유를 위한 나라이면서 노예제를 허락하는 나라, 독실한 신자인 빌대드 선장은 고래잡이들을 착취하는데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
이슈메일은 경험이 적다는 이유로 777번 배당을 받았다가 300번으로, 퀴케그는 작살솜씨를 인정받아 90번으로 배당을 받게 된다. 777 왠지 행운의 기운이 듬뿍 담겨있다.
초반부터 휘몰아치는 피쿼드호의 불행이 아마도 이 책을 끝까지 읽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해야 하나? 피쿼드는 미국인에 의해 말살된 최초의 인디언 부족의 이름이라고 하니 이 또한 재미있는 아이러니가 아닌가?
마지막장인 에필로그를 보면 퀴케그의 관으로 만들었던 구명부표를 타고 유일한 생존자가 되는 이슈마엘의 이야기로 끝이 난다. 재미있는 점은 이 마지막 장이 누락이 되는 바람에 당시에 엄청난 욕을 먹었다고.
이슈마일이 원래 퀴케그의 관이었던 구명부표를 붙든 덕분에 살아난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것은 야만인의 사랑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구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멜빌이 지향한 범세계적 민주주의 혹은 사해동포주의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즉 미국 사회가 흑인과 백인 혹은 문명인과 야만인을 구분하지 말고 다 같이 평등한 세상을 구현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피쿼드호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고 암시한다. p.727
행색이 초라한 예언자에게 피쿼드호의 선장인 에이해브에 대한 불길한 이야기를 듣는다. 기독교적 관점으로 봐도 에이해브선장은 교회 앞에서 불경을 저질렀으니 다리하나를 잃은 것은 당연하다는 얘기. 그리고 이 배의 운명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것이다. 예언자의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일라이저(엘리야). 그 또한 고래에게 왼팔을 잃었고 에이해브 선장이 다리를 잃었을 때 현장에 같이 있었던 인물이다.
"오래전에 혼곶에서 그가 사흘 밤낮을 죽은 것처럼 누워 있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지? 산타항의 교회 제단 앞에서 스페인 사람과 죽기 살기로 격투를 벌인 일도 들어본 적 없지? 그가 은제 호리병에 침을 뱉은 일이나 예언대로 지난 항해에서 다리를 잃어버린 일도 못 들었지. 그래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지. 향유고래가 한쪽 다리를 뜯어먹어 온전한 다리가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 말이야." p.139
3년을 기한으로 피쿼드호는 크리스마스날 출항을 한다. 항해사들은 작살잡이들과 한 팀을 이룬다. 일등항해사 스타벅, 이등항해사 스터브, 삼등항해사 플래스크는 각각 퀴케그, 타슈테고, 다구와 한 팀으로 움직인다.
폴리네시아 코코보코 섬에서 온 퀴퀘그, 게이헤드섬 출신의 순수 혈통 인디언 타슈테고,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다구로 이루어진 이들 세 쌍은 완벽한 합을 이룬다.
특히 키가 작은 플래스크가 거인 다구의 어깨에 올라가 있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은 작가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보이는 부분이다. 플래스크가 다구보다 지위는 높지만 삼등 항해사를 지탱하는 것은 아프리카 출신 작살잡이의 어깨가 없이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 고귀한 검둥이는 침착하고 무심하고 태평하게, 의식하지 않은 채로 야만인의 위엄을 유지하며 파도의 흔들림에 맞추어 몸을 멋지게 움직였다. 그의 넓은 어깨에 올라선 아마빛 머리카락의 플래스크는 마치 눈송이처럼 보였고, 떠받치고 있는 사람이 올라탄 사람보다 더 고귀해 보였다. 쾌활하고 소란스럽고 과시하기 좋아하는 왕대공 플래스크는 가끔씩 애타는 마음에 다구의 어깨 위에서 발을 굴렀지만, 이 검둥이의 당당한 가슴은 끄덕하지 않았다. p.293
이 흰고래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태평양으로 고래를 잡으러 떠난 항해 소설이라는 겉껍질 속에는 남북전쟁을 향해 광분하듯 치닫는 미국의 정치적인 상황이 깔려있다. 그래서 <모비 딕>은 새로운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새로 해석되곤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에이해브는 히틀러로, 2010년대는 이윤에 눈이 먼 해저 굴착에 집착하는 정유회사로, 때로 중동의 독재자로 읽힌다. 지금은? 러시아의 푸틴? 이스라엘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 이번 대선에서 다시 재개한 트럼프?
에이해브야 그렇다 치자. 그럼 고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책의 맨 뒤에 소개된 종교적, 신화적, 사회적, 심리적, 철학적 해석은 각자 읽어보시길...
두 가지 질문이 책을 덮은 순간까지 계속 되었는데, 한 가지는 일라이저 또는 이슈메일처럼 안전한 항구에 머물 것인가? 돛대를 달고 바다로 나갈 것인가? 와 집착이든 광기가 되었든 호기심이 되었든 나에게 흰 고래는 무엇인가?이다.
우리 회원 중에 아프리카에서 진짜 고래 꼬리를 보았다는 썰에 나는 너무도 흥분해 버렸다. 나는 기껏해야 제주도 바닷가에서 돌고래를 본 게 다인데 말이다. 반드시 타국에 가는 외 껍질이 아니라 도전정신이 남아 있는가에 대한 문제여서 나는 여전히 그 불씨는 남아있다고, 변화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피하지도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모비 딕은 누구는 돈이다, 절대자에 대한 신비, 경의,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덧없는 욕망의 대상이다 같은 다양한 대답이 나왔다. 그런 대상이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는 것이 나의 대답인데 나는 음악을 좋아해도 가수를 좋아한 적이 없고, 책도 마찬가지고 작가도 한 사람에게 끌린 적이 없다. 희귀본에 대한 집착도 없으며, 어떤 물건을 모으는 수집벽도 없으니 에이해브의 광적인 집착이 잠시 부러우면서도 왜 저래?라는 것이 저변에 깔려있는 채, 이 책을 계속 읽었다.
도대체 그놈의 모비 딕은 언제 나오는 거냐고?
<모비딕>을 읽는 동안 동해, 서해, 제주도를 다녀왔다.
32장부터 시작하는 <고래학>으로 넘어가 보자. 고래라는 키워드로 방대한 자료를 수록했으니 나도 한 꼭지정도는 쓰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1766년 <자연의 세계>를 쓴 린네는 고래를 물고기에서 분리하는 책을 쓴 인물이다.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다. 뭐 <물고기는 없다>가 생각나는 부분인데 인간이 연구한 고래학, 생물학, 인상학, 골상학 등등 인간이 만들어 놓은 학문의 그물에 잡히지 않는 종이 바로 고래라는 것이다.
"두 심실이 있는 온혈 심장, 허파, 움직이는 눈꺼풀, 속이 비어 있는 귀, 젖꼭지에서 모유를 분비하는 암컷의 몸에 삽입되는 수컷의 성기" ,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연법칙에 따라 정당하고 당연하게"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다. p.185
나는 지금껏 살면서 고래의 얼굴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거대한 머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눈의 크기와 위치라니. 즉 고래는 바로 뒤에 있는 물체를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바로 앞에 있는 물체도 전혀 볼 수 없다. 대부분의 동물은 두 개의 시력을 합쳐 뇌에 두 개의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그림을 제공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고래의 눈은 몇 입방미터나 되는 단단한 머리에 사실상 분리되어 있는 기이한 위치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내가 고래가 아닌 이상 사물의 피사체가 어떻게 보이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진화론적으로 눈은 그다지 쓸모가 없다는 것이 정답이려나~ 고래 입장에서 눈, 코, 입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인간이 더 이상하겠지?
따라서 고래의 두 눈 사이에는 거대한 어둠과 무(無)가 존재한다. 사실 인간은 두 개의 창틀을 연결시킨 하나의 창문으로 세상을 내다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래의 경우, 두 개의 창틀이 완전히 분리되어 서로 다른 두 개의 창을 형성하고 있어 시야에 상당한 지장을 주고 있다. p.416
정직하고 이성적인 스타벅의 만류에서 에이해브는 모비딕을 향해 질주한다. 모비딕을 미리 경험했던 다른 배들은 자신의 팔을 잃었거나 아들을 잃어다며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말해준다. 132장 <교향곡>에서 135장이 하이라이트인데 처음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는 그냥 처음부터 정독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산 정상에서 느끼는 쾌감은 산 입구부터 한 걸음씩 꾹꾹 밟아가며 올라간 그 시간에 있는 것이지, 케이블카 타고 한 번에 가는 것 하고는 비교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겹겹이 쌓여있는 에이해브라는 인물의 심층에 다다르기 위해서도 이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하겠다. 모비 딕을 잡겠다는 하나의 목표로 예비보트를 만들고 선주들도 모르는 유령선원과 주술사 페달라까지 끌어 들였으니, 피쿼드호의 운명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말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보트가 작살 나고 물에 튕겨 나가고 페달라가 없어지는 일련의 일들이 일어나고 드디어 대망의 추격 셋째 날이 되었다.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하지는 못하는 고래여, 나는 너를 향해 나아간다. 나는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고, 지옥의 한복판에서 너를 찌르고, 증오가 담긴 내 마지막 숨을 네게 뱉을 것이다. 모든 관과 관대를 한 웅덩이에 가라앉혀라! 하지만 어떤 관도 어떤 관 받침대도 결코 내 것일 수 없기에 나는 네놈에게 묶여서 갈가리 찢겨 나가더라도 여전히 너를 추격할 것이다. 이 빌어먹을 고래야! 그러니 나는 창을 던지지 않는다. p.689
클라이맥스가 바로 코 앞인데 이건 무슨 말인가? 창을 던지지 않겠다니. 처음에 오역인 줄 알았다. 다음 줄에 작살이 날아가고 그 줄에 에이해브 선장의 목이 휘감겨 밖으로 던져졌기 때문이다.
wordsworth classics 출판사의 원서를 찾아보았더니 let me then tow to pieces, while still chasing thee, though tied to thee, thou damned whale! Thus, I give up the spear!
오역이 아니었다. 그 지랄발광을 하면서 선원 전부를 죽음으로 몰아간 작자가 마지막 순간에 창을 던지지 않겠다는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래서 이 책은 사악한 책인가 보다. 갑가지 허무해지면서 이러려고 내가 이 책을 읽었구나 하는 자괴감이 드는 동시에 그 선택이 이해가 되기도 하는....
나라가 어수선하다. 크리스마스 분위기? 일도 나지 않는다. 이번 주말에는 따뜻한 아랫목에서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주술사가 비선으로 있는 한은 좌초되고 말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알려주는 책 <모비 딕>이었다.
에이해브는 갑판을 가로질러 가 반대편 바다를 바라보다가 수면 위에 비친 두 개의 움직이지 않는 눈을 보고 깜짝 놀랐다. 페달라가 미동도 하지 않는 채 같은 난간에 기대어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p.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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