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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쪼가리 자작

이탈로 칼비노/민음사

by 자몽커피

"악한 반쪽보다 착한 반쪽이 더 나빠."

버섯 들판에서는 이런 말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문둥병 환자들 사이에서만 착한 반쪽에 대한 칭찬이 줄어든 게 아니었다.

"대포 포탄이 그를 두 쪼가리로 만든 게 천만 다행이지 뭐야. 자작이 만약 세 조각이 났다면 우리는 무슨 일을 겪었을지 알게 뭐람."

모두들 이렇게 말했다. 위그노들은 이제 착한 반쪽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교대로 보초를 섰다. 위그노들은 이미 그를 조금도 존경하지 않았다. 착한 반쪽은 매번 그들의 곡창에 곡식이 얼마나 있는지를 감시하러 와서는 곡식의 매매 가격이 너무 높다고 설교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여기저기 하고 다녀 위그노들의 장사를 망쳐 놓았다. 그렇게 테랄바에서의 나날들이 흘러갔다. 그리고 우리들의 감정은 색깔을 잃어버렸고 무감각해져 버렸다. 비인각적인 사악함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비인각적인 덕성 사이에서 우리 자신을 상실한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p109



2025년 첫 독서모임 책은 이름에서 이미 나라이름이 들어간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입니다. 작가의 부모는 조국을 잊지 말라며 쿠바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이탈로란 이름을 지어줬는데 2년 만에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왔다고 하네요. 농업학자인 아버지와 식물학자인 어머니는 아들에게 종교교육을 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레지스탕스에 참가해 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전투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첫 소설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을 발표합니다. 그 후 현실을 기록하고 고발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비슷한 글들을 썼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고 해요. 그 당시 자신이 쓴 글이 너무 무거워 돌로 변하는 기분이 들었고, 그 후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방법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는 방법을 택합니다.

그의 작품으로는 '우리의 선조들' 시리즈인 <반쪼가리 자작>, <나무 위의 남작>, <존재하지 않는 기사> 3부작과 <우주 만화>, <보이지 않는 도시들> 등이 있습니다.



요즘 대한민국의 정치상황과 자꾸 대입해서 책을 읽게 되었다는 총평이 많았던 책입니다.

갓 성인이 된 메다르도 자작은 투르크인들과의 전쟁에 참여합니다. 17세기 터키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전쟁이 모티브인 이 전쟁에서 메다르도는 가슴에 대포를 맞고 반쪼가리가 된 채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태어난 순간 종교가 정해진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듯이 나와 다르면 그냥 '적'이 되어 버립니다.

처음으로 투르크인을 본 메다르도는 둘을 보았으니 전부를 보았다고 합니다. '우리 선조들'의 첫 책인 이 소설에서 닫힌 사고의 위험성을 몸소 보여주려는 듯 보입니다.


투르크인들을 둘 보았으니까 투르크인들 전부를 본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투르크인들을 보아야 한다는 점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메다르도는 이미 그들을 보았다. p.16




인간이 가슴에 대포를 맞으면 즉사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이탈로 칼비노는 인간 본성을 쪼개진 두 몸뚱어리에 반반씩 나누어 줍니다. 오른쪽 몸은 사악한 자작으로 왼쪽 몸은 덕성을 지닌 자작으로 말이죠.

그리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악한 것은 반드시 나쁜가? 선한 것은 다 좋은가? 실제로는 둘 다 똑같이 나빠, 아니면 선한 것이 더 나쁠 수 있어라고 대답한다면 여러분은 여기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까요?



큰 부상을 당하고 돌아온 자작은 자신을 운반한 사람들에게 '반값'을 지불하며 돌려보냅니다. 전쟁에 나간 사이 자작의 아버지인 아이올포 자작은 성안에 아주 커다란 새장을 만들어 놓고 새들을 기르고 있었어요. 아들대신 새들을 기르며 위안을 얻고 있었던 자작은 밥도 새와 함께 먹고 잠도 함께 자며 도통 방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죠.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아버지에게 인사말도 하지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리고 맙니다.


유모 세바스티아나가 굳게 닫힌 두 방 사이를 왔다 갔다 했지만 어떻게 도와야 할지 알지 못했어요. 아이올포 자작 나름의 관심과 사랑의 방식일까요? 아들 방 창문으로 때까치를 날려 보내지만 돌아온 건 잔인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때까치였어요. 아이올포 자작은 그날 밤 몹시 앓았고 다음날 죽은 채 발견이 됩니다.


아버지가 숨을 거둔 후 메다르도는 성 밖으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생겨요. 그가 지난 자리엔 하나같이 반쪽만 남아있어요. 배나무도 반쪽, 개구리도 반쪽, 식용버섯, 독버섯도 정확하게 반으로 나뉘어 있어요.



"메다르도의 사악한 반쪽이 돌아왔어. 오늘 재판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구나." p.31



산적들이 자작의 영토에서 밀렵하는 기사들을 가로막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자작은 모두에게 교수형을 내립니다.

산적일당에겐 약탈죄로, 밀렵꾼에겐 밀렵죄로, 수비대에겐 너무 늦게 현장에 당도하여 밀렵꾼도 산적도 막지 못했다은 이유로 교수형을 내린 것이죠.

이일로 교수형을 받은 사람은 스무여 명이나 되었고 약탈자와 수비대의 대다수는 호감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어요. 살인의 현장은 너무도 끔찍해 쳐다볼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학살장면도 무뎌지듯이 마을사람들도 그렇게 변해버립니다.


즉사한 기사들의 시체와 고양이들의 시체는 사흘 동안 매달려 있었다. 처음에는 그 누구도 그것을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으나, 곧 그들이 만들어 내는 장엄한 광경을 발견했다. 우리들의 판단력도 여러 감정들로 잘게 부서져 그 시체들을 떼어 내거나 그 커다란 기계가 분해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p.33




사악한 자작에 부역하는 목수 피에트로키오도와 의사 트렐로니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기가 맡은 일이면 그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는 믿음직하고 이해력이 뛰어난 일꾼 피에트로키오도가 교수대를 만듭니다. 한 번에 여럿을 처형할 수 있는 독창적인 기계였어요. 기술적인 면에서 완벽의 경지에 이를 정도였지요. 무고한 사람들을 사형시키는 기구를 만들었다는 괴로움이 항상 마음속에 있었지만, 더 멋지고 가능한 한 독창적인 장치를 만드는데 생각을 집중할 뿐이었죠.

유대인 집단학살 정책자였던 아이히만은 사악하거나 악의에 찬 인물이 아니라 명령과 체제에 순응한 관료적 인물이었음을 강조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해요. 피에트로키오도도 악의 평범성을 지닌 관료일 뿐일까요?


"넌 이게 어디 사용될 건지 생각하면 안 된다. 기계로만 생각해야 돼.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렴." p.41



마을사람들의 기부물품으로 사는 문둥병마을이 있습니다. 문둥병 환자를 돌보려는 의사가 고장에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의사 트렐로니가 이 마을에 왔을 때 사람들은 희망을 품게 되었죠. 그런데 트렐로니는 동물과 돌과 자연 현상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인간 존재와 그들의 질병에 대해서는 혐오감과 공포심을 보일 뿐이었어요.

난파당한 후 테랄바에 남아 자작 가문의 의사가 되었지만 환자는 돌보지 않고 자신의 과학적인 발견에 몰두해 밤낮없이 들판과 숲을 돌아다니는 인물입니다.

자작은 문둥이 마을에 가서 불을 지릅니다. 그 불은 자신이 사는 성까지 미쳐 유모인 세바스티아나도 화상을 입게 되죠. 그리고 얼굴의 흉터를 문둥병이라고 우겨 쫓아냅니다. 자작의 강압에 못 이겨 트렐로니는 거짓 진단을 내립니다.


마을에는 프랑스의 박해를 피해 도망쳐온 위그노인들이 있습니다. 작은 행동에서라도 불경스러움이 드러나지 않도록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신앙의 박해를 받아 이곳으로 왔지만 종교적 의식은 희미해져 버렸어요. '페스트와 기근'을 입에 달고 살았고 농사일에 진심이 그들은 유일하게 가뭄과 기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어요.

위그노의 집에 각각 사악한 자작과 착한 자작이 방문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마도 나그네를 소홀히 대접하지 말라는 성경말씀이 모티브인 것 같습니다. 이방인에게 환대를 베풀었던 롯은 천사의 도움으로 소돔과 고모라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위그노들도 그들을 구원해 줄 이방인을 기다리고 있었죠. 그래서 천둥번개가 치고 벼락으로 불이 난 밤에 찾아온 사악한 자작을 죽이지 않고 오히려 지켜줍니다. 한 명은 말을 타고 왔다면 착한 자작은 노새를 타고 위그노마을에 들어옵니다. 위그노인들은 찬송가를 부르면서 그를 맞이했죠. 메시야가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장면이 떠오르네요.

자작을 대하는 태도는 그야말로 불경스럽기 그지없어요. 이름대신 절름발이, 병신, 애꾸눈, 반쪼가리로 불렀고 말을 타고 온 자작에겐 안장에 달려 있던 금장식을 훔치고, 병든 노새를 타고 온 자작에겐 여물 한 줌도 주지 않았으니까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크리스찬의 덕목은 전혀 보이지 않고 도둑질과 사기꾼인 막내아들인 에사우를 통해 이들도 반쪽짜리 인간들임을 보여줍니다.



얘야, 넌 온전한 두뇌들이 아는 일반적인 지식 외의 사실들을 알게 될 거야. 너는 너 자신과 세계의 반쪽을 잃어버리겠지만 나머지 반쪽은 더욱 깊고 값어치 있는 수천 가지 모습이 될 수 있지. 그리고 너는 모든 것을 반쪽으로 만들고 너의 이미지에 맞춰 파괴해 버리고 싶을 거야. 아름다움과 지혜와 정당성은 바로 조각난 것들 속에만 있으니까. p.60


그러던 어느 날 메다르도 자작은 양치기 소녀 파멜라를 사랑하기로 합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당찬 캐릭터 같아요. 사악한 자작은 그녀를 성으로 데리고 가 가둬 놓고 싶지만 파멜라는 숲에서만 자신을 자신을 가질 수 있다며 계속 회피하죠. 착한 자작 또한 파멜라를 사랑하게 됩니다. 거친 소녀를 고상하게 만들겠다며 <해방된 예루살렘>이라는 책을 읽어 주는데 파멜라는 책에는 일도 관심이 없어요. 둘 다 자기만의 방식을 고집합니다. 나쁜 남자는 위험해서 싫고 착한 남자는 지루해요.



드디어 착한 반쪽이 마을에 나타나고 마을사람들 또한 두 명의 자작 때문에 혼란스러워요. 독거미에 물린 자작을 사악한 자작으로 오해해 트렐로니는 최초로 의료 행위를 해요. 이것을 계기로 트렐로니는 인간해부학 논문을 읽게 됩니다. 여전히 문둥병 환자들 근처에는 가까이 못 가지만 메다르도 때문에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죠.

자작은 여기에 멈추지 않고 문둥병 환자들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치료하려고 해요. 그들이 병을 잊으려고 했던 유희와 방탕한 생활을 금지시켜요. 도덕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착한 자작에겐 그저 타락한 행동으로 보일 뿐이었죠. 떠들고 놀면서 자신들의 감정을 발산해 내지 못한 문둥이 여자들은 밝은 태양 앞에서 자신들의 병을 발견하고 밤이면 밤마다 절망의 눈물을 흘렸어요.

목수 피에트로키오도에겐 오르간이면서, 밀가루를 빻는 물방아인 동시에 빵을 구울 수 있는 오븐을 만들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형대와 고문대 같이 해로운 것을 만들 때와는 달리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요. 착한 자작이 도면을 들이밀자 창의성이 발휘되지 않는 것이죠.


"혹시 내 영혼에 사악함이 있기 때문에 잔인한 기계밖에 만들 수 없는 게 아닐까?" p.103



위그노들도 착한 반쪽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교대로 보초를 서기 시작했어요. 착한 반쪽이 매번 그들의 곡창에 곡식이 얼마나 있는지를 감시하러 와서는 곡식의 매매 가격이 너무 높다고 설교해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녀 위그노들의 장사를 망쳐놓았죠. 기근으로 굶어 죽어가는 이들에게 여전히 비싼 값을 받는 위그노들이 착한 자작의 눈에는 모두 도둑놈처럼 보였죠. 이쯤 되면 사악한 자작이나 착한 자작이나 그놈이 그놈이 됩니다. 선과 악의 구분이 과연 있을 수 있는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답은 바뀔 수 있다는 것이죠.

이 소설에서 착한 자작의 선행에 감동을 받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 나옵니다. 바로 문둥이마을로 쫓겨난 유모 세바스티아나뿐이었죠. 다른 반쪽이 한 나쁜 짓을 이유로 이 반쪽을 꾸짖었고 다른 반쪽이 들어야 할 충고를 이 반쪽에게 하기도 했어요. 비록 몸은 문둥병마을에 있지만 그들의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간직한 인물입니다. 깨어있는 지식인, 언론인을 대변한 것 같은데 문제는 재야에 숨어있다는 점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메다르도를 키웠기 때문에 가장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걸까요?


"그건 내가 한 짓이 아니에요."

"아, 그래. 네가 아니지?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말한다. 그렇지만 항상 똑같은 자작이란 말이야."p.107



이제 다시 파멜라의 결혼이야기로 돌아가보죠. 사악한 자작과 착한 자작은 각자의 이유로 서로와 결혼해야 한다고 파멜라의 부모를 설득합니다. 파멜라는 교회에 제시간에 도착한 착한 자작과 결혼식을 올립니다.

반쪼가리 자작은 결투를 하게 되고 서로의 몸에 상처를 입게 되죠. 트렐로니는 모든 내장기관들과 동맥을 서로 결합해 자작을 치료해 줍니다. 그리고 파멜라는 기뻐서 소리를 치죠.


"마침내 난 완전한 신랑을 얻었어." p.119




그렇게 자작은 사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사악하면서도 선한 인간으로 돌아오면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아직 선과 악이 정립되지 않은 어린 소년을 화자로 내세운 저자의 의도가 읽히시나요?


우리는 모두 반쪽짜리 표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악한 자작, 착한 자작을 만났을 때 보인 의사 트렐로니, 목수 피에트로키오도, 위그노, 문둥이들의 이중성을 보면서 나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만 저는 유일하게 양 극단을 경험하면서 그나마 발전한 캐릭터가 의사 트렐로니라고 생각해요. 누구는 이걸 기회주의자 같다고 하지만 다시 쿡 선장의 배를 탄 트렐로니는 카드놀이만 하던 예전의 트렐로니는 절대 아닐 거니까요.

모임 도중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양 극단은 결국 파멸을 불러올 뿐이라는 걸! 살아있는 역사 공부를 하는 요즘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반쪽이 되기 전과 달라진 점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겐 두 반쪽이 재결합된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주 현명해질 수 있었다. 그는 행복한 생활을 했고 많은 자녀를 두었으며 올바른 통치를 했다. 아마도 우리는 자작이 온전한 인간으로 돌아옴으로써 놀랄 만큼 행복한 시대가 열리리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세상이 아주 복잡해져서 온전한 자작 혼자서는 그것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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