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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이민진/인플루엔셜

by 자몽커피

선자가 가벼워진 마음으로 희망에 차서 웃음을 지었다. 한수가 선자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노아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다 잘됐십니더. 다음 주에 요코하마로 온다 캅니더. 모자수가 억수로 기뻐할 기라예."

한수가 운전사에게 출발하라고 지시하고 선자가 두 사람의 만남이 어쨌는지 이야기하는 것에 귀를 기울였다.


그날 저녁, 노아에게 전화가 오지 않자 선자는 노아에게 요코하마 집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음날 아침, 한수에게 전화가 왔다. 선자가 사무실에서 나가고 몇 분 후, 노아가 총으로 자살했다. p.221



토지 이후 몇 대가 나오는 장편소설은 오랜만인 것 같다. 어느 순간 박경리, 조정래 선생님을 잇는 장편소설의 계보가 끊긴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다소나마 해소된 기분이다.

이민진 작가를 둘러싼 부모님, 남편, 그녀가 속해 있는 재미동포라는 수식어들이 아마도 이 책을 탄생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원산출신으로 남하한 아버지는 부산출신의 어머니를 만나 결혼을 했다. 피난민의 설움과 베트남 전쟁 후 한국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에 미국 이민을 결심하게 된다. 작가는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고 로스쿨 졸업 후 변호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녀의 남편은 일본계 미국인인데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작가의 시어머니가 어머니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일본이 한국인에게 저지른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파친코에 일본인이라고 다 나쁘게 그려진 게 아닌 이유는 아마도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한국인이라고 다 착한 게 아니 듯이 말이다. 민족성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 또한 어떤 특수한 환경에서 만들어진 경우이기 때문이다.

원 제목은 <Motherland>에서 <파친코>로 바뀌어 2017년에 출간이 되었다. 국내에서는 옮긴이가 이미정에서 신승미로 2022년에 바뀌었는데 사실 큰 차이점을 나는 개인적으로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남편을 따라 일본에 와서 재일한국인들을 인터뷰했을 때 누군가는 반드시 파친코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가족이든 친구든 이웃이든 말이다. 그녀는 파친코라는 불공정한 인생게임과 재일한국인들의 삶이 닮아 있다고 했다.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려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 책을 통해 세상은 불공정하고 불공평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머물러 있다거나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끈기 있게 계속 나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끝내 자살한 노아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말이다.


"야쿠자는 일본에서 제일 더운 사람들이에요. 폭력배들이에요. 상습범들이라고요. 가게 주인들을 협박해요. 마약을 팔아요. 윤락가를 지배해요. 무고한 사람들을 해쳐요. 최악의 조선인들이 모두 이런 폭력단 일원이라고요. 내가 야쿠자한테 돈을 받아 공부했는데 이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난 절대로 이 더러움을 씻어내지 못할 거예요. 엄마가 이렇게나 어리석다니." 노아가 말했다. "어떻게 더러운 것에서 깨끗한 것을 만들 수 있겠어요? 엄마가 날 더럽혔어요." p.110





재일 한국인은 끊임없이 규탄을 하며 살아왔다.

한국도 일본도 아닌 경계에 있는 사람들, 양쪽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자들은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할까?

인물들이 보이는 삼각구도에서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계속 고민하면서 읽었다.

선자, 이삭, 한수,/ 요셉, 경희, 창호, /노아, 아키코, 리사,/ 모자수, 유미, 에스코,/ 솔로몬, 하나, 피비,/ 하루키, 아야메, 모자수 등등


특히 선자의 선택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많이 나왔다. 한수의 첩으로 사는 삶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최소한 경제적으로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사람이 크게 아프고 나면 괴팍해지거나 선량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삭은 그 후자인 것 같다. 은혜를 은혜로 갚았다고 생각한다. 임신한 몸으로 폐병 걸린 이삭을 병간호한 선자가 나는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선자와 아이를 책임진 이삭의 인간성이 너무 멋져 보인건 사실이다.

노아의 자살에 대해서는 공감 가는 면도 있지만 자식 넷을 두고 할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정체성에 이렇게까지 몰두할 일인가 싶기도 했다.


아키코가 단념하지 않고 말했다. "유대인들이 자기 국가를 가질 권리가 있겠지만, 전 미라와 다니엘이 영국을 떠나야 할 필요는 없었다고 봐요. 전 이 고결함이라는 주장이나 박해받는 사람들을 위한 더 위대한 국가라는 소리는 달갑지 않은 외국인들을 다 쫓아내려는 구실이라고 생각해요." p.61





노아, 모자수, 솔로몬에게 파친코는 각각 어떤 의미였을까도 토론 주제 중 하나였다. 유대인에게 고리 대금업으로 읽히는 이미지가 재일동포에게는 파친코가 아니었을까 싶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밥줄이었으니 말이다. 생계의 수단에 옳고 그름의 잣대는 필요 없지만 타인을 속이거나 도덕적 결함이 깔려있다면 떳떳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노아는 철저히 일본인이 되고자 했지만 실패했고, 솔로몬도 미국은행에서 일했지만 잘리고 만다. 모자수가 가장 현실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재일조선인의 신분으로 할 수 있을 일을 했고 정직하게 사업을 했다. 자식을 남부럽지 않게 교육시킬 수 있었으니 그의 삶은 성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 사업을 이은 솔로몬에게 파친코는 어떤 의미였을까? 일종의 도피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번 책을 통해 외국 특히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같은 한국인이지만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그 신분이 변하는 세계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가슴 아픈 역사에 또 한 번 울분이^^

책을 통한 경험은 이래서 좋다.


모자수와 직원들은 당첨 결과를 조작하려고 기계를 살짝 손봐서 돈을 따는 사람은 적고 잃는 사람은 많게 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자신이 행운아일 거라는 희망을 품고 게임을 계속했다. 어떻게 성공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겠는가. 에쓰코는 이 중요한 면에서 실패했다. 아이들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이길지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믿어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파친코는 바보 같은 게임이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았다.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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