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톨스토이/민음사
자기가 삶을 잘못 살아왔다는, 예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그런 가정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가장 높은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에 맞서 투쟁하려는 충동,
그가 당장 떨쳐 내려 했던 아득한 저 충동이야말로 진짜고 나머지는 모두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직장도, 삶의 방식도, 가족도, 사교계와 직장의 이해관계도,
이 모든 것이 잘못되었을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앞에서 이 모든 것을 변호하려고 애썼다. 그러다
돌연 스스로 변호하는 데에 참으로 무력감을 느꼈다. 그러자 변호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p.97
<전쟁과 평화>가 준 성공과 탄탄대로의 삶과 반대로 톨스토이는 심각한 우울증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멋진 삶이 도리어 죽음의 필연성에 집착하게 만든 것이다. 이때 톨스토이의 나이는 마흔 하나였다. 1869년 독일 철학자인 쇼펜하우어에 심취해 있었는데 그의 글이 어찌나 염세적인지 행복한 사람은 슬프게, 또 슬픈 사람이라면 자살충동을 느끼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때로 책 한 권이 인생 전체를 바꾸는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텐데 마흔에 쇼펜하우어가 아닌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가 일찍 접한 부모, 형제, 친척, 자녀의 죽음 또한 니체와 비슷한 면이 있다. 물론 니체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자식은 없었지만 그 또한 어렸을 때 아버지와 동생을 잃었다. 유전병이 있는 가족력 때문에 평생 두통에 시달려야 했고 빛에 약한 시력으로 요양이 삶의 한 형태이기도 했다. 심혈을 기울여 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그 당시 인정을 받지도 못했다. 살로메와 여동생의 불화로 사랑도 실패했다. 염세적일 수밖에 없는 그의 인생이었으나 그는 오히려 한 번뿐인 삶을 즉 후회가 없는 삶을 살라고 말한다.
그의 나이 마흔에 온 죽음에 대한 불안과는 달리 83세까지 장수를 누렸으니 이것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반일리치의 죽음은 크게 장례(추도식), 이반일리치의 삶, 병상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톨스토이의 영지 가까이에 있는 툴라라는 도시에서 이반 일리치메치니코프란 이름을 가진 판사가 젊고 한창 일할 나이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판결을 내리는 데 익숙한 사람이 죽음의 판결을 받는다는 것이 이 소설의 모티브이다.
소설은 고등법원 판사인 이반 일리치의 부고 소식으로 시작한다. 병석에 누운 지는 몇 주가 흘렀고 불치병이라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의 자리가 아직 그대도 유지되었으나 그의 사망과 동시에 있을 인사이동과 승진, 연봉등을 생각하느라 그 자리에 모인 동료들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그래서 집무실에 모인 이 신사들이 이반 일리치의 사망소식을 듣자마자 모두 제일 먼저 떠올린 생각은 이 죽음이 판사들 당사자나 지인들의 인사이동이나 승진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였다. p.8
살아남은 자들의 속마음은 이렇게나 건조하다. 죽음은 누군가에게 일어난 특별한 사건일 뿐,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을뿐더러 그런 생각을 하느라 굳이 음울한 기분에 빠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죽음(부고)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죽음의 원인을 묻고 남은 사람들의 안부, 그리고 장례식장의 위치, 참석여부와 거리를 따지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성찰과 동시에 예의상 도의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장례라는 절차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할 거리를 준다. 때로 귀찮게 느껴지는 이런 절차들이 죽음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는 데는 모두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추도식도 카드놀이를 방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표트르 이바노비치와 남편의 죽음 이후에 치러야 하는 절차들(묘지자리 가격, 합창단 초대, 남편 사망 후 국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유족연금)을 처리하는 것이 오히려 위로가 된다는 아내 프라스코비야 표도로브나의 모습은 오늘날 장례식장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
가까운 지인의 죽음 자체는 늘 그렇듯 부고를 접한 모두에게 내가 아니라 그가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의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어쩌겠어, 죽었는걸. 하지만 나는 아니잖아.' 그들은 저마다 이렇게 생각하거나 느꼈다. 이른바 이반 일리치의 친구들은 이와 더불어 이제 예의상 몹시 따분한 의무를 다해야 하고 추도식에 참석하여 남편을 잃은 부인에게 조의를 표해야 한다는 떨떠름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p.9
2장부터는 가장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가장 끔찍했다는 이반 일리치의 지나온 인생사가 시작된다.
그의 아버지 일리야 예피모비치 골로빈은 늙어 죽을 때까지 죽치고 앉아 월급을 받아먹는 삼등 문관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둘째였고 형처럼 너무 냉정하거나 꼼꼼하지도 막내처럼 절망적이지도 않았다.
둘의 중간쯤 되는 똑똑하고 활기차고 유쾌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집안의 자랑거리였던 이반은 사교계 모임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똑똑하고 빛나는 프라스코비야 표도로브나미헬에게 반해 결혼한다. 좋은 귀족 가문의 처자인 데다 인물도 좋고 재산도 좀 있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하려는 확고한 의지는 없었으나 "사실 결혼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나?"라는 말로 자신을 설득한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임신과 출산 그 사이 죽은 두 명의 아이들, 양육문제는 온전히 아내 프라스코비야 표도로브나의 몫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결혼이란 그가 대체로 본질적으로 여겨 온 삶, 즉 항상 가뿐하고 유쾌하고 즐겁고 사회가 장려하는 점잖은 성격의 삶을 파괴하기는커녕 더욱 고양해 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의 임신 초기부터 뭔가 낯설고 예기치 못한 불쾌한 일, 힘겹고 점잖지 못한 일이 발생했고 그것은 예상할 수도, 또 결코 벗어날 수도 없는 일이었다. p.28
남편과의 시간을 원했던 아내의 요구를 이반은 철저하게 무시한다. 또한 아내에게는 사회적 통념이 정해 놓은 외적 형식의 품격을 유지하는 것만 요구했다.
그는 가정일의 해방을 업무에서 찾았고 그 수단은 아내도 어쩌지 못한 것이었다. 일을 한다는데 뭐라 하겠는가?
그렇게 시간은 흘러 십칠 년이 지났다. 연봉 5000 루블짜리라는 새로운 일자리는 이 둘 부부 사이를 신혼 때 못지않게 좋아지게 만들었다.
이반은 이사할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꾸릴 계획에 들떠 있었다. 아내가 처남집에 머무르는 동안 혼자 벽지를 고르고 가구를 사들이고 수시로 가구 배치를 바꾸는 등 가족들에게 멋진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 작은 사고가 일어났다.
한 번은 말귀를 영 못 알아먹는 도배장이에게 커튼을 어떻게 달지 시범을 보여 주려고 사다리에 올라갔다가 발을 헛디뎌서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워낙 튼튼하고 민첩한 사람이라 균형을 잘 잡은 덕분에 창틀 손잡이에 옆구리를 찧었을 뿐 달리 다치지는 않았다. 부딪친 부위가 좀 아프긴 했으나 곧 좋아졌고, 이반 일리치는 요즘 내내 자신이 유난히 즐겁고 건강하다고 느꼈다. p.38
좋은 머리로 법대를 나와 귀족아가씨와 결혼해 가정을 일군다. 물론 가정일에 무관심하고 일과 카드놀이에 빠져 산 것이 그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단점이랄까? 새집에서 커튼을 달다가 떨어지면서 옆구리를 다치는 사소한 일이 결국 그의 병을 키우게 되고 그는 3개월 만에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져 죽음을 맞이한다.
이반일리치는 죽음의 순간까지 자신을 괴롭혔던 원인을 외로움과 거짓으로 보고 있다.
사랑하게 되어서 그녀 안에서 자신의 인생관을 함께 나눌 만한 무엇인가를 발견하지도 못한 채, 그저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해결한다는 소신 때문에 결혼을 결정했다. 사랑보다 조건이 맞아서 한 결혼이다 보니 결혼생활은 이반 일리치가 생각했던 편안하고 기분 좋고 즐겁고 늘 고상한 상류사회의 환상을 여지없이 깨뜨리고 만다. 아내는 육아를 함께 해주길 바랐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이반은 각종 일거리를 무기 삼아 가정 밖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갈 뿐이다.
결국 이반에게 가정은 따뜻한 식사와 집안 돌보기, 잠자리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럴싸한 결혼생활의 모습을 표면상으로 갖춘 쇼윈도 부부였기에 케이크와 사탕 같은 사소한 문제로 이혼이 언급될 정도로 격렬하게 싸우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품위 있고 유쾌한 그의 삶을 서서히 잠식시킨 건 옆구리 통증이 시작되고부터이다. 입속에서 이상한 맛이 느껴지더니 수시로 찾아오는 통증에 성격도 점점 괴팍해져만 갔다. 매사에 트집을 잡기 시작하고 모든 문제를 아내 탓으로 돌렸다. 프라스코비야는 처음에는 대들었지만 그냥 참아주기로 한다. 남편의 성격이 너무 끔찍해서 자기 인생 역시 불행해졌노라고 결론을 짓는다. 자신을 더 불쌍하게 여길수록 남편을 더욱 증오하게 되었다. 남편이 죽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으나, 그러면 봉급마저 사라질 테니 대놓고 바랄 수도 없다.
이반은 자신을 진단하는 의사를 보며 자신을 반추한다.
법정에서 그 자신이 그러했기에 익히 아는 짐짓 근엄한 척하는 의사의 태도도, 여기저기 두드려 보고 환자의 말을 경청하는 것도, 미리 정해져 있기에 굳이 답할 필요 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도, 그저 우리한테 맡겨 주면 모두 알아서 처리하리라고, 모든 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확실히 잘 안다고, 치료를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똑같이 대한다고 주장하는 의미심장한 표정도 말이다. 모든 것이 법정과 똑같았다. 그가 법정에서 피고를 대하며 짓는 표정을, 저명한 의사는 환자를 대하며 똑같이 짓는 것이었다. p.46
병의 원인도 결과도 모두 남편의 잘못이라는 아내에게 이반은 딱히 반박을 하지 못한다. 서운함과 괘씸함을 넘어 이반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깨닫자 절망에 빠진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의존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주방 하인 게라심이다. 병이 난 지 석 달 만에 이반의 병세는 급격하게 나빠진다. 아편과 모르핀 없이는 통증을 다스릴 수 없게 되었고 배변 때문에 특수 용기를 제작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의 배설물을 처리하는 게라심은 환자의 기분을 상할까 얼굴빛도 조심하는 배려심이 있는 인물이다. 특히나 그의 친절한 말투에 이반은 감동을 넘어 위안을 받게 된다.
이반 일리치를 제일 괴롭힌 것은 거짓이었다. 즉 모두가 그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잠자코 치료를 잘 받으면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 묵인하는 거짓말 말이다. 내가 죽어간다는 사실을 당신들도, 나도 알지 않느냐고, 그러니까 적어도 거짓말 좀 그만두라고 외치고 싶지만 정작 이반은 그러지 못한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한평생 모셔 온 '품위'라는 옷을 벗어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반의 처지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지만 게라심만이 이런 처지를 이해하고 또 가엾이 여겼다.
게라심만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모든 정황으로 보건대 분명히 그 하나만이 문제의 본질을 깨닫고 그 점을 숨길 필요가 없음을 알았으며, 그저 쇠잔해 가는 병약한 주인 나리를 불쌍히 여길 따름이었다. 심지어 한 번은 이반 일리치가 이제 그만 가 보라고 하자, 곧장 이렇게 반문하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죽게 될 텐데요. 수고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름 아니라 그의 말에는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한 일이니 별로 수고롭거나 버겁지 않고, 또 자신이 이런 처지일 때 누군가가 같은 수고를 베풀어 주길 바란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p.73
아픈 남편을 집에 두고 저녁모임에 나가는 장면은 이 소설의 막장을 보여준다. 프랑스 연극배우의 내한에 맞춰 이반이 예전에 특별석을 예약해 둔 공연이었다. 아이들의 미학적 감각을 키워야 한다며 그가 굳이 고집을 부려 예약한 자리여서 취소하고 곁에 있어달라는 말조차 하지 못한다. 딸과 딸의 약혼자만 보낼 수 없다며 자신이 따라가야 한다는 아내의 말도 서운하지만 옷차림이 너무 과하다. 젖가슴을 받쳐 올린 차림새에 얼굴에 분칠까지. 완벽한 오페라 옷차림이다. 젊은 몸을 한껏 드러낸 딸아이와 연미복에 오페라 가수머리를 따라한 예비 사위를 보자 이반은 심기가 불편해지고 어느 순간 대화는 뚝 끊어지고 만다.
아픈 병자를 두고 나가려는 이들의 마음이라고 편할까?
분명한 생과 사의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병석에 누워있는 남편과 오페라 공연을 보러 가는 가족. 이 둘의 대비는 그동안 이반의 삶을 극적으로 보며 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일과 가정생활을 철저하게 나누었으며, 이는 삶의 전반을 아우른다. 그런 그에게도 마음에 드는 친구들과 빈트게임을 하고 밥을 먹고 포도주를 한 잔 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기쁨이었다는 고백은 왠지 짠하게 느껴진다.
이반이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결혼생활에 충실했더라면 이런 비극을 피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앞선 선배들이 그렇게 하듯이 품위를 위해서 무심코 한 결혼이 결국 이런 파국을 가져오다니!
밤늦게 온 아내를 돌려보내고 자신을 돌보던 게라심도 내 보낸 뒤 이반은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린다.
이반은 결혼과 삶 전체에 대해 의심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는 게라심이 옆방으로 갈 때 까지 기다렸다가 더 이상 자제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의지할 데 없는 처지와 끔찍한 고독과, 사람들과 하느님의 잔혹함과, 하느님의 부재에 목 놓아 울었다. p.87
'혹시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갑자기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제대로 했는데 뭐가 어떻게 잘못되었단 말인가?'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고, 그 즉시 생사의 수수께끼를 송두리째 풀어 줄 유일한 해결책이란 뭔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인 양 치부하며 떨쳐 냈다. p.89
이런 결혼생활을 한 아내가 남편의 병 앞에서 죽음 앞에서 어떻게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가정 밖에서의 인간관계를 살펴보자. 이반은 삶이란 반드시 쉽고, 기분 좋고, 고상하게 흘러가야만 한다고 믿는 남자다.
청원자들과는 공적인 관계 외에 다른 관계를 맺지 않았고 법원직원인 경우 공적인 관계가 끝나면 일체의 관계 역시 깨끗이 정리를 한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오로지 인사이동뿐이다. 구질구질한 친구며 일가친척, 초라하고 시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멀리했다.
공과 사를 너무 지키다 보니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오직 고상한 예의만 남은 귀족들과 아내, 딸을 보며 이반은 그제야 반성과 후회를 하게 된다. 그의 모든 삶이 거짓이었다면서 자신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묻지만 그에게 남은 건 죽음이라는 진실 하나뿐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인 12장에서는 이반의 죽음이 그려진다. 그는 사흘간 멈추지 않고 비명을 질렀다. 그가 죽기 한 시간 전에 김나지움에 다니는 아들이 살며시 이반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아버지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대고 울음을 터트린다. 그 순간 이반은 구멍 속에서 빛을 보았고 자기 인생이 제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아직 바로잡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눈물을 흘리는 아내를 보니 가엾어 보이고 내가 저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보내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하고 눈을 감는다. 사실 '용서해 줘'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보내줘'라는 말과 발음이 비슷해 그렇게 나와버린 것이다.
죽음 대신 빛이 있었다.
"바로 이것이다!" 갑자기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기쁠 수가!"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찰나의 일이었고 그 순간의 의미는 이제 변하지 않았다. p.103
실제로 사후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의 책을 읽어보면 빛이 보인다고들 한다. 의사들은 산소부족으로 일어난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분석하기도 하는데 무엇이 되었든, 이반은 죽음의 끝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고, 회피로 일관했던 관계에 대해서 반성했으며, 아내와 아이를 가엾게 여기고 용서를 빌고 죽음을 맞이했다.
비록 그의 진심이 끝까지 전달되지 못한 점은 작가의 의도가 분명 있어 보인다.
20대 취준생들은 오히려 모든 것을 이룬 이반이 부럽다는 말을 했다. 그들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듯.
이어령 교수는 인간을 크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그만큼 이 책이 주는 울림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고로 카이사르도 죽는다라는 키제베터의 삼단 논법이 더 이상 특수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죽음가까이 다가가는 당신은 거짓 없이 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과연 무어라고 대답할 것인가?
남이 소망하는 것을 소망하는 자세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 보이는 삶에 치우쳐 포장하고 살지는 않았는지, 내 주변에 게라심 같은 친구가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다시 맨 앞장으로 돌아가보자. 친구인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죽은 이반 일리치의 얼굴을 보며 아름답고, 의미심장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 얼굴 표정에서 살아있는 자들에 대한 책망이나 경고를 발견한다. 당신이 이반 일리치라면 살아있는 자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
적어도 이런 삶은 아니야를 보여주는 책,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었다.
그는 표트르 이바노비치가 보지 못한 사이에 더 여위어서 몹시 달라진 모습이었지만 모든 망자처럼 아름답고, 무엇보다도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의미심장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는 해야 할 일을 해냈고 더욱이 제대로 해냈다는 표정이 어리어 있었다. 그 밖에도 아직 살아 있는 자들에 대한 책망이나 무언가를 경고하는 기색이 담긴 표정이었다.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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