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장편소설/문학동네

by 자몽커피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 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골짜기와 광산과 활주로 아래에서 구슬 무더기와 구멍 뚫린 조그만 두개골들이 발굴될 때까지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고, 아직도 뼈와 뼈들이 뒤섞인 채 묻혀 있어. p.317



이 책이 나온 2021년, 2024년, 올해까지 세 번의 책모임을 했다. 책은 다섯 번을 읽었다. 책이 나오기까지 7년이 걸렸다면 작가의 질문에 대답을 하기까지 5년이 걸렸다. 물론 5년 내내 이 책만 생각하고 살았던 건 아니다.

읽은 속도를 말하라면 정말 느릿느릿하게 여유를 가지고 읽었다. 한 입 먹고 백번은 곱씹는 사람처럼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란 마음으로.

이 책 중간에 단편 <작별>과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장편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 에세이 <빛과 실>을 읽기도 했으니 성격 급한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단편소설인 <작별>을 읽고 나서는 <변신>을 쓴 카프카가 부럽지 않았다. '그렇지, 우리는 한강보유국이야!'

장르 불문하고 모두 잘 쓰는 작가라고 결론지었다. 시, 소설, 희곡, 노래, 사진까지 완벽한 크리에이터가 아니던가!

다섯 번을 읽고 나서야 결론에 크게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을 밝힌다. 경하와 인선 중 누가 살고 죽었느냐는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고통을 느꼈다는 것이, 내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 더 소중하다. 그래도 결말이 궁금하다면 작가의 답을 알려줄 테니 끝까지 읽어주시길.




20250724_151434.jpg
20250724_151514.jpg
20250724_151615.jpg


이 소설은 모두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의 여정이 화자인 경하가 서울에서부터 제주 중산간에 있는 인선의 집까지 한 마리 새를 구하기 위해 폭설을 뚫고 가는 횡의 길이라면, 2부는 그녀와 인선이 함께 인간의 밤 아래로-1948년 겨울 제주도에서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의 시간으로-, 심해 아래로 내려가는 수직의 길이다. 마지막 3부에서 두 사람이 그 바다 아래에서 촛불을 밝힌다. _ <빛과 실> p. 25




이 소설은 경하의 꿈으로 시작한다. 경하는 학살에 대한 책을 냈고 몇 개의 사적인 작별을 했다고 나온다. 수신인 자리를 비워둔 유서를 쓸 만큼 책을 쓴 후 그녀는 삶과 죽음을 오가는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책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이 부분은 한강 작가의 실제 경험담을 담고 있다. 이 계절에 에어컨 고장이라니! 폭염에 시달리는 경하의 극한 고통은 베트남의 폭우, 만주의 추위, 제주의 폭설로 이어진다.

나라(섬)가 곧 날씨인 것이다. 특히 이 책은 '눈의 책'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눈의 속성이 나온다. 나는 그것이 제주의 특성이라고 생각했다.


<소년이 온다>에 대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소설로 도청이라는 공간에 모든 인물이 모여있다 흩어진다. 각 장의 초점화자가 사건 당사자로 나오며 직접 증언하는 형식으로 나온다. 작가 또한 다른 주인공들처럼 균등한 분량의 한 꼭지를 차지하고 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을 다룬 소설로 경하, 인선, 정심 세 여성을 중심으로 서사가 이루어진다. 이들은 사건 당사자가 아닌 대리인으로 간접 증언의 형식으로 4.3 사건을 이야기한다. 경하가 인선의 집 세천리에 들어가면서 죽었던 새가 살아나고 서울에 있는 인선이 나오는 등 불타 절멸된 장소가 소생, 재생의 장소로 변모한다.

광주 도청과 제주 세천리는 모두 국가 폭력이 이루어진 곳, 학살의 공간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곳을 그리는 방식은 너무나 상이하다.

특히 제주 인선의 집(세천리)까지 가는 과정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꿈을 꾼 것은 2014년 여름, 내가 그 도시의 학살에 대한 책을 낸 지 두 달 가까이 지났을 때였다. 그후 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그 꿈의 의미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 도시에 대한 꿈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빠르고 직관적이었던 그 결론은 내 오해였거나 너무 단순한 이해였는지도 모른다고 처음 생각한 것은 지난여름이었다. p.11



봉분 아래의 뼈들을 휩쓸어가기 위해 밀려들어오던 그 시퍼런 바다가, 학살당한 사람들과 그후의 시간에 대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때 처음 생각했다. 다만 개인적인 예언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물에 잠긴 무덤들과 침묵하는 묘비들로 이뤄진 그곳이, 앞으로 남겨질 내 삶을 당겨 말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바로 지금을. p.12



처음에는 광주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시간이 점차 흘러 그 꿈은 국가 폭력에 의해 학살을 당한 모든 곳이 아니었을까라고 작가는 꿈을 해석한다. 나 또한 그런 해석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결론이 오해나 단순한 이해였는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온다. 꿈에 대한 확산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을 맞은 것이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꿈이 아니었다고. 개인적인 예언은 무엇이란 말인가?


앞부분부터 이러니 진도를 나갈 수가 없다. 또다시 걸음을 멈춘 부분은 인선이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하는 장면이다. 아버지를 위한 영화도 아니고, 역사에 대한 영화도 아니고 영상시도 아니라는 인선의 말에 그럼 무엇에 관한 영화냐고 진행자가 질문을 한다. 끝내 인선의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당혹과 호기심과 냉담함이 섞인 진행자의 태도와 객석의 어리둥절한 침묵, 진실만 말해야 하는 저주를 받은 듯 천천히 말을 이어가던 인선의 얼굴이. p.236



작가와 관객이 보여주는 이 장면하나로 역사를 재현해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준다.

광주는 외신기자에 의해 영상이나 사진자료가 그나마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그 이후 작품들도 많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제주 4.3은 광주보다 더 멀리 있고, 은폐되었던 시간도 그만큼 더 길었다. 구술증언과 뼈만으로는 현장성을 가질 수 없다.

영화라는 매체가 과연 그것을 담을 수 있을까? 아마 그 어떤 매체로 담는다고 해도 그 한계성을 지적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영상으로 담는 순간 연기처럼 소모되는 것일까?


여기서 질문? 경하는 그 꿈을 잘못 해석했다며 프로젝트를 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럼에도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던 인선이 이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피에 적은 옷과 살이 함께 썩어가는 냄새, 수십 년 동안 삭은 뼈들의 인광이 지워질 거다. 악몽들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갈 거다. 한계를 초과하는 폭력이 제거될 거다. 사 년 전 내가 썼던 책에서 누락되었던, 대로에 선 비무장 시민들에게 군인들이 쏘았던 화염방사기처럼, 수포들이 끓어오른 얼굴과 몸에 흰 페인트가 끼얹어진 채 응급실로 실려온 사람들처럼. p.287





인선이 찍은 세편의 영화는 증언자의 구술방식을 취하고 있다. 기승전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증언자가 생각하는 어떤 특정한 시기와 특정한 사건이 누구의 개입 없이 증언된다. 주인공들은 모두 할머니로 불리는 연배의 여성들이다. 베트남의 학국군 성폭력 생존자, 1940년 만주 독립군 할머니, 인선의 엄마 정심까지,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국가(군인) 폭력의 피해자라는 사실이다. 인선은 세 편을 모아 첫 장편 영화를 만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모든 작업을 중단하고 국비 지원이 되는 목수학교에 입학해 목수가 되었다.

8년 전 제주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고향으로 떠난 인선은 4년 동안 치매 걸린 어머니를 돌보면서 엄마의 비밀을 알게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목공일을 하며 그 집에 혼자 머물고 있던 인선은 프로젝트에 쓸 나무를 자르다 사고를 당하고 서울로 이송된다.

왜 하필 서울 병원일까? 제주의 사건은 제주에서 해결할 수 없다. 인선은 서울로, 경하는 제주로 가야 하는 필연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잘린 손가락과 발가락을 제주에서 죽은 사람들, 즉 잘린 나무 몸통과 연결 지어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잘린 손가락, 발가락이 제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립된 섬 제주. 잘려 버린 섬 제주. 절단된 섬 제주를 어떻게 봉합해야 할까?



그러려면 똑바로 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보지 않고 시작할 수 없다. 어쩌면 상상보다 실제가 더 고통스럽다고 작가는 답한다.

잘린 손가락은 봉합 수술 그 이후가 더 힘들다. 3분마다 바늘을 소독하고 봉합부위를 찔러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피가 흐르고 통증을 느껴야 잘린 신경이 죽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인선이 말을 멈췄다. 간병인이 인선의 상처에 서슴없이 바늘을 찔러넣는 동작을 나는 똑똑히 다시 보았고, 인선과 함께 숨을 멈춘 채 후회했다. 좀전에 병원 로비에서 이미 깨닫지 않았던가, 제대로 들여다볼수록 더 고통스럽다는 걸? p.49




지금 깨끗하게 포기하면 안 되겠느냐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의사가 환지통에 대해 말했을 것이다. 지금은 물론 손가락을 지키는 편의 통증이 더 강하지만, 손가락을 포기할 경우 통증은 손쓸 수 없이 평생 계속될 거라고.

삼주라니, 너무 길다. p.42




처음부터 깨끗이 포기했다면, 인선이 제주병원에서 절단 부위를 꿰매기만 하면 굳이 서울까지 올라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포기한다고 평생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죽을 때까지 가져가야 하는 환지통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결정을 내려도 고통이 수반된다면?


새에 대하여.

인선이 키우고 있는 앵무새 아마를 살리기 위해 경하는 병원에서 바로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작가는 계속 얘기한다. 그만하고 싶다고. 제대로 볼 수록 더 고통스럽다고, 하지만 발생초기 태아의 형상을 지닌 새끼새를 살리려면 그녀는 나아가야 한다. 사랑하지 않아도 생명을 지키는 일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특히 어린 생명은 지켜져야 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태아도 어린아이도 아무 이유 없이 학살되었다.

죽을 고비를 넘어 도착했으면 아마는 살아있어야 하거늘 예상은 늘 비껴가지 않는다. 아마는 이미 죽었다. 경하는 손수건에 아마를 감싸고 작은 상자에 넣어 종려나무밑에 묻어준다. 새는 몸이 있어 장례를 치러줄 수 있었다. 죽음의 마지막 애도는 바로 장례를 제대로 치러주는 것이다. 학살로 죽은 수많은 사람들, 살려야 했지만 죽어버린 사람들은 어떻게 보내줘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동안 너무도 오랜 시간을 그저 흘러 보냈고 공적 애도를 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인색했다. 코발트 광산에 묻혀있는 뼈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종려나무는 고대 근동과 성경에서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많은 군중들이 옷을 벗고 환영의 의미로 흔들었던 가지가 바로 종려나뭇가지이기 때문이다. 가로횡과 세로횡으로 두 개의 이야기가 교차된다고 했을 때 나는 왠지 십자가가 생각났다. 때로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한 이유가 이런 것일까? 승리, 평화, 축하의 의미를 지닌 종려나무에 새를 묻어주는 마음 같은 것.


인선이라면 어디에 묻으려 할까.

마침내 나무 아래에 다다른다. 밑동 앞에 쌓인 눈을 삽으로 퍼낸다. 숨이 가빠지는 만큼 추위가 가신다. 상자를 가지러 안채 앞까지 걷는 동안에 이상할 만큼 세차게 심장이 뛴다고 느낀다. p.153






산책하러 나온 옷차림 그대로 가방 하나 없는 경하는 대책 없어 보이지만 그래서 그냥 제주 사람처럼 보인다.

경하가 인선의 집까지 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사람을 잡는다. 이렇게 까지 묘사할 필요성이 무엇인가? 갑자기 영웅서사에 나오는 주인공 같다. 근육이 울룩불룩하고 건강한 체격의 남성이 아니라 피죽 한 그릇에 근근이 연명해 온 작은 몸집의 여성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듯이. 인선이 취재했던 할머니들처럼, 산을 취재하며 들었던 모든 전설 속 여인들처럼.


여성의 몸으로 느끼는 고통이 더 부각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날씨도 최악, 몸 상태도 최악이다. 거기에 배터리도 간당간당. 시내로 돌아간다고 해도 누가 뭐라 할 사람 하나 없지만 그래도 경하는 포기하지 않는다. 꿈 얘기를 안 했다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까? 죄책감 때문일까? 폭염을 견뎌낸 경하는 이번에는 폭설과 추위와 강풍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다.

5년이 흐른 지금, 나는 반대로 제주가 경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날씨가 바로 제주이기 때문이다. 섬 특유의 배타성이 이렇게 표현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그 정도의 각오 없이 오려면 아예 오지도 말라는 듯이 말이다.

버스 정류장에 있었던 할머니는 꼭 영웅들을 도와주는 조력자같다. 인선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할머니에 기대 초조한 마음으로 버스를 기다리고 그 기다림에 응답하듯 버스가 도착한다.



인선은 고등학교 때 엄마가 너무 미워 가출을 한 적이 있었다. 서울로 올라와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해 있었을 때 엄마는 이미 인선이 다쳤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엄마는 인선에게 가출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입에 담지 않고 다만 수십 년 전 그 날 보았던 눈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었다. 이모와 엄마가 심부름으로 집을 나와 있는 사이 다른 가족이 군경에 총살당한 이야기를 들은 인선은 비로소 엄마에 대한 미움을 걷어낸다.


내가, 눈만 오면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헌디 너가 그날 밤 꿈에. 그추룩 얼굴에 눈이 허영하게 묻엉으네......내가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이 애기가 죽었구나, 생각을 했주. 허이고, 나는 너가 죽은 줄만 알아그네. p.86





<작별하지 않는다>에 나오는 무수한 상징들을 이해하는 것이 과연 이 소설을 온전히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경하가 인선의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이 소설은 꿈과 생시의 경계에 들어서는 판타지 소설로 변모한다.

인선이 서울에서 무연고 환자로 누워 있었을 때 엄마가 집에서 인선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툭 던지는 이유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지 않아도 함께 있는 느낌을 알 것이다.


자정쯤 됐을 때 엄마가 마루로 나와 불을 켰는데, 내가 밥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더래.

멍하게 나는 대꾸했다.

꼭 생시 같은 꿈이 있으니까.

열흘이나 딸 행방을 모르던 때니까, 일시적인 섬망 같은 거였는지도 모르지. p.103







1752987186560.jpg
1752987181966.png

작품 속 세천리(새가름마을) 카카오맵으로 본 표선해수욕장


지도에서 세천리를 찾아보니 '잃어버린 마을'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절멸이란 말은 이토록 폭력적이다. p읍으로 나오는 표선해수욕장을 카카오맵으로 찾아보니 너무나 아름답다. 한때 이곳이 처형장이었다니, 저 푸른 물빛이 될 때까지 얼마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갱생의 시간.

출간 직후 작가는 북토크에서 이 소설을 쓰는 시간이 '갱생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얼마나 간절하면 죽었던 아마가 살아나고, 서울에 있어야 하는 인선이 말끔한 몸으로 나타날까. 경하와 인선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회복의 시간이 아닐 수 없다. 그 대화 속에 인선의 엄마와 아빠 수많은 증언들이 제주 방언 그대로 살아난다.

인간의 간절한 마음이 평행우주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학살이 없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인선의 손가락이 잘리지 않은 평행우주가 존재한다면 나는 지금 서울 근교 아파트의 침대에 웅크려 누워 있거나 책상 앞에 앉아 있을 거다. 인선은 싱글 매트리스에서 잠들어 있거나 안채의 부엌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거다. 암막 천에 덮인 새장 속 횃대에 아마가 발을 걸고 있을 거다. 잠든 몸이 어둠 속에서 따스할 거다. 가슴털 아래 심장이 규칙적으로 뛰고 있을 거다. p.155




photo-1581145621636-871bcbdc7439?fm=jpg&q=60&w=3000&ixlib=rb-4.1.0&ixid=M3wxMjA3fDB8MHxzZWFyY2h8NHx8JUVCJTg4JTg4JUVCJThEJUFFJUVDJTlEJUI4JTIwJUVDJUEyJTg1JUVCJUEwJUE0JUVCJTgyJTk4JUVCJUFDJUI0fGVufDB8fDB8fHww
20250725_093041.jpg
20250725_093056.jpg

종려나무 출처 unsplash 경산 코발트 광산 관련책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이 소설을 간통하는 두 개의 시선에 대하여.

사람이 현재와 미래를 살려면 과거가 해결이 돼야 한다. 해결되지 않는 과거가 있는 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그런데 그 과거는 너무 오랜 시간 은폐되어 사라지고 흔적도 찾을 수 없다면 남은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포스트잇처럼 단편적인 역사를 우리는 어떤 선으로 연결해야 할까? 누군가를 사랑하면 따로 있어도 같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루 종일 너를 생각했더니 정말 네가 나타난 것처럼 말이다.

두 세계를 사는 사람들은 고통에 민감한 사람들이다.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슬픈 공간.

그 가상현실이 있어야만 숨이 쉬어지니까.




그의 한쪽 눈은 벽에서 움직이는 인선과 아마의 그림자들, 다른 쪽 눈은 유리창 밖 마당에서 저녁 빛을 받으며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두 개의 시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건지 나는 알고 싶었다. 저 엇박자 돌림노래 같은 것, 꿈꾸는 동시에 생시를 사는 것 같은 걸까. p.113



아버지가 그것들을 먹다가 문득 환상에서 빠져나오길 어머니는 바랐던 것 같아요. 그 방법이 정말 통하는 날도 있었어요. 내 손에서 귤을 건네받으며 아버지는 반쯤 웃었어요. 마치 두 세계를 사는 사람 같았어요. 한 눈으로는 나를 보고 다른 한 눈으론 내 몸 너머 다른 빛을 보는 것 같이, 어두운 방인데도 부신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올려다봤어요. p.165



아버지가 십오 년 동안 형무소에 있고 저 건너에도 있었던 것이.

책상 밑에서 내가 무릎을 구부리는 동시에 활주로 아래 구덩이 속에도 있었던 게.

정말 누가 여기 함께 있나, 나는 생각했다.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하는, 관측하려 하는 찰나 한곳에 고정되는 빛처럼. p.322




작품 제목인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해.

작별이라는 것은 상대가 있어야 가능하다. 상대가 없는데 어떻게 작별을 하란 말인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물 위로 건져 내는 것, 그들을 애도하고 장례를 치렀을 때 망각할 수 있는 자유도 허락되는 것이다. 소리를 내뱉으면 결연한 의지를 담은 선언문 같다. 끝까지 기억하겠다는 다짐. 마음을 다잡게 되는 문장. 영원히 마침표를 붙일 수 없는 말.



4.3 사건의 재현에 대해.

모든 재현의 방식이 끊어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인선의 다큐(베트남 전쟁, 만주 독립군, 제주 4.3)도 그렇고 구술 증언, 취재 기사 버전, 소설 속 인물의 심리 등으로 파편화된 사건들이 드러날 뿐이다. 정심이 모은 자료도 결국엔 30년의 공백이 있는 자료여서 끊어진 시간들은 결국 이어지지 못하고 만다.

오로지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단편적인 기억들의 모음집에 그쳐야 할 수도 있다. 이런 한계들은 결국 인선이 하나의 스토리를 지닌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이유이고 경하와 함께 하려던 프로젝트로 결국엔 그 꿈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 나오는 정심, 인선, 경하는 학살을 경험한 직접당사자와 그다음 세대로 연결되어 있다. 학살에 대한 경험은 점점 옅어질 수밖에 없다. 직접 당사자와 간접 당사자의 간극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

매끄러운 서사를 그릴 수도 없지만 그리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단지 이건 비극적인 이야기로 소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경하의 꿈으로 넘어가 보자. 물에 잠긴 무덤들과 침묵하는 묘비들로 이뤄진 그곳이 왜 개인적인 예언이 되는 곳인지. 결국 작가는 이런 세계를 외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0%의 확률에 기대 포기 하지 않았던 정심처럼, 경하의 꿈 이야기를 듣고 바로 나무 작업을 하다 손을 다친 인선처럼, 사랑하지도 않는 새를 구하기 위해 폭설을 헤치고 가주는 경하의 마음처럼.

우리에게도 묻고 있다. 당신도 그럴 수 있느냐고.






그럼, 군이 데려간 사람들은?

p읍에 있는 국민학교에 한 달간 수용돼 있다가, 지금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12월에 모두 총살됐어.

모두?

군경 직계가족을 제외한 모두. p.220




K시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연관된 국내외 사례들을 읽어가던 그때, 이 섬의 학살에 대한 구술 증언이 마을 단위로 채록된 이 자료집들을 나는 과감히 건너뛰었다. 육백 쪽짜리 진상조사 보고서와 관련 총론서들, 거기 부록들로 실려 있던 삼십여 명의 증언만으로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연두색 플래그가 붙은 페이지를 인선이 펼친다. 내가 보기 좋도록 방향을 돌려 그녀가 건넨 책을 나는 받아든다. p.222




1752987234573.jpg
1752989844975.jpg

표선해수욕장 백사장



초에 대해.

<소년이 온다>에서도 초를 밝히는 동호와 작가의 모습이 그려진다. 초는 죽은 이들을 위해 기리는 쉽고 단순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니다. 3부의 제목은 불꽃.

경하는 자신이 혼인지 인선이 혼인지 생각하지만 결론을 내릴 수 없다. 한 번도 몸은 스치지 않았지만 초를 계속 주고받으면서 대화를 이어나간다.

누군가를 기억해 주는 데 단 두 사람만 있어도 가능하다는 걸. 그저 초를 피우고 이야기 속에 그들을 살게 해 주면 되는 일을 우리는 왜 그토록 외면하고 살았을까?

아직까지도 누가 죽고 살았는지 궁금한가? 허무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작가의 의도는 구분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냥 개인적인 바람은 둘 다 살았으면 좋겠다.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었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p.325





마지막으로 눈에 대해.

눈에 대한 책을 추천하라면 당연히 이 책이다. 얼마나 오래 관찰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폭력적이면서도 포근한 성질을. 그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해. 차가움과 따뜻한 성질을 동시에 지닐 수 있는. 숲 속의 눈장면을 쓰기 위해 눈이 오면 택시를 타고 나갔다는 후일담을 듣고서야 정말 몸으로 체화해서 쓰는 작가라는 걸 실감했다. 그러니 더 생생할 수밖에.

목소리를 지니고 있지 않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목격자. 눈을 맞고 있는 검은 나무에서 시작한 꿈은 가출한 인선의 얼굴에 내려앉는 눈으로, 어린 정심과 그녀의 언니가 죽은 가족을 찾아 헤대던 운동장에서 내리는 눈을 지나 인선의 집으로 가는 경하가 보았던 눈으로 연결된다. 결국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하나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이렇게 긴 글을 썼나 보다.


물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지 않나. 그렇다면 인선이 맞으며 자란 눈송이가 지금 내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아니란 법이 없다. 인선의 어머니가 보았다던 학교 운동장의 사람들이 이어 떠올라 나는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푼다. 무딘 콧날과 눈꺼풀에 쌓인 눈을 닦아낸다.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 p.133




이 책을 읽고 고통을 느꼈다면 당신은 인간인 것이다. 지금까지 <작별하지 않는다>였다.


#작별하지않는다. #한강 #노벨상 #문학동네 # 책모임 #독서모임 #독서토론 #자몽커피 #소년이온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