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다윈/사이언스 북스
인간이 체계적인 선택과 무의식적인 선택의 방법을 통해 위대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고
실제로도 그랬다면, 하물며 자연이 그러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인간은 눈에
보이는 외부 형질에만 영향을 줄 수 있다. 반면 자연은 외부 요소들이 그 유기체에 유용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양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자연은 생명의 전체 조직 내의
모든 내부 기관과 모든 미묘한 체질적 차이에 작용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선택하지만 자연은 자신이 돌보는 존재의 이득을 위해서만
선택한다. 선택된 모든 형질은 자연에 의해 완전히 단련되며 그 유기체는 적절한 생활환경
조건 아래 놓인다. p.144
이 글은 <종의 기원>에 관한 글이 아니라 책에 다다르는 여정을 그린 글이다. 책장 한편에 꽂혀있거나 빌렸으나 몇 장 읽고 다시 반납을 일삼았던 당신에게 책을 펼칠 이유가 되는 글이 되길 바란다.
나 또한 그랬다. 아니 우리 독서모임이 그랬다. 이 책은 3년간 끊임없이 추천 목록에 올랐지만 매번 유보되기 일쑤였다. 농담처럼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으로 대신 읽자는 말도 매번 반복되었다.
방귀가 잦으면 똥을 싼다고 <종의 기원>을 번역한 장대익교수와 먼저 친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 과정은 <코스모스>를 번역한 홍승수 교수의 <나의 코스모스>를 먼저 읽은 것을 답습한 것이기도 하다.
장대익 교수는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에서 공감과 소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교양의 기준을 제시하는 진화학자이자 과학철학자다. 주요 저서로는 <다윈의 식탁>, <다윈의 서재>, <다윈의 정원>으로 이어지는 다윈 3부작과 최재천 교수와 공역한 <통섭>등이 있다.
번역서인 프란스 드 발의 <침팬지 폴리틱스>와 저서인 <공감의 반경>을 읽고 독서 모임을 가졌는데 책도 좋았지만 그날 모인 회원들의 열띤 토론의 시간이 인상 깊었다. <침팬지 폴리틱스>는 리뷰를 남겨놓았으니 참고하시길...
<다윈의 식탁>도 <종의 기원>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 책이다.
내가 속한 독서모임이 과학서적을 읽는 모임 인가 하면 절~대 아니다. 인문, 과학, 철학, 소설, 예술 등의 각각의 분야를 골고루 읽자 정도인 평범한 모임이다. 그런데 우리 모임은 장점이 하나 있다. 연말이 되면 다음 해에 읽을 책들을 추천하는데 어떤 책을 추천해도 일단 모두 받아준다. 절대 쿠사리가 없다. 쿠사리가 좀 없어 보이는 말이지만 핀잔보다는 더 어울리기에 그냥 사용한다.
사실 책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적 호기심이 얼마나 높은가 보다 지적 허영심이 높은 사람들이 많을수록
두껍고 어려운 책에 도전할 수 있다. 우리 모임은 이 두 가지를 가진 사람의 분포가 조금 더 높을 뿐.
<코스모스>, <이기적 유전자>,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등등의 과학서를 읽었던 이유도 지금 생각해 보면 지적 호기심과 지적 허영심을 채워준 책인 동시에 <종의 기원>을 읽기 위한 발판이었던 것이다.
예수는 모두 알지만 <성경>은 정작 읽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는 정말 때가 되었다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읽어야 하지 않겠어?'
이제 슬슬 들어가 보자. <종의 기원>은 최재천 교수의 발간사, 장대익 교수의 옮긴이 서문, 찰스 다윈의 서론을 지나 총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은 정확히 650페이지에서 끝난다. 마지막 장인 14장에서 친절하게 13장까지의 내용을 요약, 결론을 짓기 때문에 사실 이 장만 읽어도 괜찮다. 아니면 제일 먼저 읽어도 상관없다.
왜냐고? 다윈의 주장은 한 줄로 정리할 수 있을 만큼 깔끔하고 심플하다. 그런데 그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는 이 책은 신에 대항하는 불손한 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런 공격에 맞서기 위해 수많은 예시들을 적고 또 적고 그냥 계속 적었다. 그리고 다시 한 방을 먹인다. '이거 그냥 맛보기야~ 내가 앞으로 쓸 책들의 목차의 일부분이라고 할까?'
다윈의 학술서 3부작 <종의 기원>,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중에서 우리는 이제 겨우 첫발을 떼었을 뿐이다. <비글호 항해기>나 서간집인 <기원>, <진화>까지 갈 수나 있을까?
우선 먼저 놀랐던 점은 그림이 일절 없다는 것이다. 앞부분을 대부분 차지했던 비둘기 육종 그림은 그렇다 치고(비둘기 사진을 일일이 검색하면서 읽었다는 회원도 있었다), 갈라파고스의 핀치새는 어디 있는 거냐고? 186~187페이지에 있는 도표 한 장이 유일한 그림이라면 그림이다.
싹은 성장하면서 새로운 싹을 자라나게 만든다. 또한 만일 이 싹이 강한 생명력을 가지는 경우에는 사방팔방으로 가지를 뻗어 다른 많은 연약한 가지들이 자라지 못하게 만든다. 나는 거대한 생명의 나무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믿는다. 그 나무에서도 세대가 거듭되면서 시들어 떨어진 나뭇가지들은 지표를 뒤덮는 반면, 계속해서 갈라져 나가는 아름다운 나뭇가지들은 그 나무를 뒤덮고 있다. p.202
찰스 다윈의 삶에 대해 짧게 설명하고 넘어가 보자. 마취제가 없던 당시 의과대학생이었던 찰스 다윈은 수술 장면을 견디지 못하고 중퇴를 한다. 집안에서 루저로 찍힌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케임브리지대학교 신학부에 입학한다. 박물학자의 꿈을 꾸던 그에게 대타로 HMS 비글호를 탈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4년 10개월 동안 남아메리카를 탐험하게 된다. 그때 에콰도르 서쪽의 갈라파고스 군도를 방문했고 영국에 돌아와 샘플들을 정리하다가 우리가 모두 다 아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먹이 환경에 따라 새의 부리 모양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자연 선택'이라는 진화 메커니즘을 고안한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연 선택 이론을 완성시켜 가던 중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라는 젊은 학자의 편지를 받고 자극을 받아 1859년 <종의 기원>을 출간하게 된다.
흔히 다윈이 '종이 변한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한 사람이다', '종의 변화 메커니즘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다'라고 평가를 하는데 이는 큰 오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을 먼저 한 사람 중에 찰스 다윈의 친할아버지인 에라스무스 다윈과 프랑스의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도 있었다. 종이 변한다는 생각은 그 당시 웬만한 지식인들에게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다만 입 밖으로 내기 힘들었을 뿐.
찰스 다윈의 독창성은 바로 '생명의 나무' 개념을 창안한 것이다. 그 이전의 사람들은 생명을 한 줄로 세워놓고 등급을 매기는 것에 익숙했다. 그들의 존재론은 '생명의 사다리'라고 할 수 있는데 맨 위에는 신이, 그 밑에는 천사가, 그리고 그 밑에는 인간, 침팬지, 원숭이 등이 서열대로 배치되어 있는 구도였다.
이런 생각은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는 창조론자들의 구미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하지만 찰스 다윈은 이 사다리 대신 '생명의 나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나무의 줄기에서 가지들이 뻗어 나오듯이, 한두 개의 공통조상에서 출발한 생명이 다양하게 분기해 왔다는 주장이다.
1837년에 이미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20년 후에야 <종의 기원>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책에 나오는 단 하나의 그림이 바로 생명의 나무이다.
당장 없어져야 하는 이미지가 있다면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그림이다.
지금 동물원에 있는 침팬지들은 500만 년, 1000만 년이 지나도 절대 인간으로 진화할 수 없다. 이 이론에 따르면 침팬지와 인간은 과거 언젠가 하나의 '공통 조상 common ancestor'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명의 중심도 아니고 최상위층도 아닌 것이다.
게다가 현재 살아 있는 모든 종들은 38억 년의 생명 역사에서 살다 간 수많은 종 중 단 1퍼센트에 불과하다. 즉 99퍼센트는 모두 멸절했다. 어쨌든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어쩌다 운 좋게 살아남은 그 1퍼센트라는 것이다.
만일 어떤 개체들에게 유용한 변이들이 실제로 발생하다면, 그로 인해 그 개체들은 생존 투쟁에서 살아남을 좋은 기회를 가질 것이 분명하다. 또한 대물림의 강력한 원리를 통해 그것들은 유사한 특징을 가진 자손들을 생산할 것이다. 나는 이런 보존의 원리를 간략히 자연 선택이라고 불렀다. p.198
<종의 기원>의 논증은 다음의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모든 생명체는 실제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수의 자손을 낳는다.
②같은 종에 속하는 개체들이라도 저마다 다른 형질을 가진다.
③특정 형질을 가진 개체가 다른 개체들에 비해 환경에 더 적합하다.
④그 형질 중 적어도 일부는 자손에게 전달된다.
이 조건들이 만족되면, 그리고 오직 그럴 경우에만, 어떤 개체군내의 형질들의 빈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게 될 것이고 상당한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종도 생겨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다윈이 제시했던 '자연 선택을 통한 진화'의 핵심이다.
공통조상과 생명의 나무 개념에서는 우월하거나 열등한 종 따윈 없다. 이것이 바로 160년 전 다윈이 인류의 오만함에 끼얹은 도발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이를 다윈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역사가는 한술 더 뜬다. "지성계의 거두 다윈, 마르크스, 프로이트 중에서 유일하게 다윈만이 오늘까지 건재하다."라고. 이것이 바로 160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의 지식인들이 여전히 <종의 기원>에 대해 열광하는 이유다. p.21
<종의 기원>은 1859년~1872년까지 다섯 번 판본을 바꿨다. 오늘날 대개 다윈의 진화론을 떠올리면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부터 생각나는데 이는 당대의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의 영향 때문이다. 다윈도 그의 영향으로 5판부터 "적자생존"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진화(evolution)라는 용어 자체도 원래 다윈의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변화를 동반한 계승"이라는 용어를 쓰다가 1871년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을 펴내면서 '진화'라는 단어를 처음 쓴다. <종의 기원>의 경우에는 1872년 출간된 6판에 가서야 '진화'로 대체한다. 이 또한 스펜서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 개념은 훗날 인종주의와 우생학의 원흉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과연 몇 판일까?
국내 번역본들이 대개 6판 번역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책은 독창성과 과감함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고 평가받는 초판을 번역했다.
가장 재미있었던 장을 뽑으라면 단연코 11~12장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오늘 모인 모두의 의견이니 믿어도 좋다.
왜 대륙이 달라도 비슷한 종들이 분포하는지에 대해, 멀리 떨어져 있는 섬에 살고 있는 생물들 중 일부가 어떻게 현재의 서식지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해 다윈은 이렇게 대답한다. 신의 개입이 없이도 새에 의한 이동과 물에 의한 이동이 우리가 생각한 것만큼 나약하지 않다고 말이다.
거의 모든 대양도에서, 심지어 매우 고립된 작은 섬에서조차도 육서패류가 살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것들은 토착종이지만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 종들도 포함되어 있다. 일부 종들은 7일간 바닷물에 담겨 있어도 손상되지 않는다고 한다. 패류 중 하나인 헬릭스 포마티아는 20일간 바닷물에 담가두어도 다시 되살아 났다고.
새의 발에 묻은 흙에서 몇 백 종의 씨앗이 나온다는 사실 또한 아주 재미있게 묘사가 되어 있으니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시길...
이제 슬슬 마무리를 짓자. 어차피 이 책은 요약을 할 수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 유튜브에 떠도는 <종의 기원> 동영상도 보지 말고 그냥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그 어떤 글도 영상도 이 책을 담고 있지 않으니 온전히 내 시간과 힘을 다해 이 책을 느끼라고 말이다.
그것이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이자 다 함께 이런 시간을 할 수 있었던 우리 회원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은 이유이다.
나의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를 지나 그 위, 그 위의 그 어떤 지점에서 하나라도 삐끗했다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 만나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너무 터무니없이 우연에 의해 태어났고 살아간다. 이 사실만으로도 이 하루가 너무 귀하지 않은가?
인간이라고 교만할 필요도 없고 누군가를 너무 미워할 필요도 없다. 우연히 주어진 이 생을 그냥 사랑하게 만들어 준 책 <종의 기원>이었다.
번식을 동반한 성장, 번식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는 대물림, 외부적 생활 조건의 직간접적인 작용과 사용 및 불용에 의한 가변성, 생존 투쟁을 초래하는 높은 개체 증가율, 자연 선택의 결과로 나타난 형질 분기와 덜 개량된 형태들의 멸절을 포함한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대상인 고등 동물은 이 법칙들의 직접적 결과물로서 자연의 전쟁 및 기근과 죽음으로부터 탄생한 것들이다. 처음에 몇몇 또는 하나의 형태로 숨결이 불어넣어진 생명이 불변의 중력 법칙에 따라 이 행성이 회전하는 동안 여러 가지 힘을 통해 그토록 단순한 시작에서부터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우며 한계가 없는 형태로 전개되어 왔고 지금도 전개되고 있다는,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p.650
그래도 한 가지 '자연 선택'과 '생명의 나무' 만큼은 꼭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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