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소설/문학동네
당의정
자신에 대한 연민 없이, 마치 다른 사람의 삶에 호기심을 갖듯 그녀는 이따금 궁금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먹어온 알약들을 모두 합하면 몇 개일까? 앓으면서 보낸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될까? 마치 인생 자체가 그녀의 전진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반복해서 아팠다.
그녀가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힘이 바로 자신의 몸속에 대기하고 있는 것처럼. 그때마다
주춤거리며 그녀가 길을 잃었던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될까? p.80
소설 『흰』은 1장 - 나, 2장 - 그녀, 3장 - 모든 흰, 해설 권희철, 작가의 말로 구성되어 있다.
에세이나 산문시, 아니면 일기를 읽는 기분이 들지만 이 책은 소설이다. 왜 소설이라고 했을까?
진실과 허구의 비율은 몇 대 몇일까?
이 책 전체가 작가의 말이라니, 한강 작가는 역시 작가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소년이 온다>가 출간된 뒤 작가는 폴란드의 번역가 유스트나 나이바르씨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바르샤바로 떠난다. 주변 사람들은 "쉬고 싶다더니, 왜 하필 그렇게 춥고 어두운 곳으로 가는 거야"라고 했지만 작가를 부른 곳이 오직 그 도시였고, 남극이나 북극이었다 해도 작가는 떠났을 거라고.
내가 아는 폴란드는 오로라 정도.
아이의 학교를 알아보고, 살림살이들을 쇼핑하고 번역가를 만나 기초 폴란드어를 배우는 작가.
한 달의 적응기간이 지나자 서울에서 살던 때와 비교할 수 없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바르샤바에서 거의 한 일은 바로 걷는 것.
이 책의 시작은 스물네 살의 어머니가 혼자서 갑작스럽게 나은 첫 아이에 대한 기억에서 시작한다. 그 아이가 두 시간 만에 죽었고 '흰' 도시인 바르샤바에서 삶과 몸을 빌려줌으로써 그녀를 되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엄마가 두 시간 동안 '죽지 마라, 제발'이라고 계속 속삭였던 말은 <소년이 온다>의 마지막 문장과 연결된다.
투병 중인 성희 언니를 향해 고문생존자인 선주가 건넸던 말과 정확이 같은 말이었다.
바르샤바는 1944년 히틀러가 본보기로 절멸을 지시했던 도시라고 한다. 폭격으로 95퍼센트 이상의 건물들이 파괴되고 흰 석조건물들의 잿빛 잔재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던 도시.
죽지 말아요. p.186
작가는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뒤 목록을 만든다.
강보 / 배내옷 / 소금 / 눈 / 얼음 / 달 / 쌀 / 파도 / 백목련 / 흰새 / 하얗게 웃다 / 백지 /
흰 개 / 백발 / 수의
목록의 시작은 강보, 마지막은 수의이다.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작가는 단어를 적어갈 때마다 마음이 흔들렸고, 책을 꼭 완성하고 싶다고, 쓰는 과정에서 무엇인가를 변화시켜 줄 것 같다고 느꼈다고 한다.
환부에 바를 흰 연고, 거기 덮을 흰 거즈 같은 무엇인가가 필요했다고. p.10
작가에게 글을 쓰는 행위는 후시딘 같은 거였구나, 작가가 태어나기 전 위로 언니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1부의 화자인 '나'는 오래전 살았던 301호의 '문'에 대해 이야기한다. 유난히 낡고 지저분한 철문은 난폭한 직선과 곡선들의 상처를 따라 검붉은 녹물이 번지고 흘러내려 오래된 핏자국처럼 굳어 있었다.
'나'는 흰 얼룩이 더러운 얼룩보다는 낫겠지 하는 마음으로 페인트칠을 한다. 한 시간 뒤 칠은 흐려져 있었다.
난 아무것도 아끼지 않아. 내가 사는 곳, 매일 여닫는 문, 빌어먹을 내 삶을 아끼지 않아. 이를 악문 그 숫자들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p.14
달떡처럼 얼굴이 흰 여자아이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 산달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양수가 터졌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학교에 있었고, 시골의 외딴 사택에 엄마는 혼자 있었다. 전화기는 이십 분 거리를 나가야 했다. 엄마는 산통을 참으며 배내옷을 만들고 강보로 쓸 홑이불도 꺼내놓고 마침내 아기를 낳았다.
화자는 이야기 속에서 자랐다.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기, 그이가 죽은 자리에 내가 태어나 자랐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화자도 처음에는 어린 나이에 아이를 잃은 엄마를 가여워했을 것이다. 안쓰럽고 측은한 마음이 왜 안 들었겠나? 하지만 좋은 이야기도 한두 번이다. 언니는 달떡같이 희고 예뻤다는데 그럼 나는?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언니의 자리를 대신해 태어난 나는 축복일까? 불행일까?
엄마가 말한 달떡은 찌기 전의 달떡인 거야, 그 순간 생각 했었다. 그렇게 깨끗한 얼굴이었던 거야. 그러자 쇠에 눌린 것 같이 명치가 답답해졌다. p.21
화자의 엇나가는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그래 언니가 있었다면 나는 태어나지 않았겠지. 고마워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그런데 그게 뭐 어쩌라고, 언니 몫까지 살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나는 나잖아. 내가 어떻게 살든 관여하지 마.
양가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엄마와 죽은 언니에 대한 측은지심과 원망과 질투의 감정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런 상태로 성장했다면 나라도 반복해서 아팠으리라.
글을 쓰고 페인트 칠을 하고, 낙하하는 눈송이들을 바라보는 행위 모두 그녀의 환부를 치료해 주는 치료제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막살라고 격려해주고 싶다.
1944년 공습으로 파괴된 도시는 원래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사진과 그림과 지도에 의지해 끈질기게 복원한 새것이다. 칠십 년 이상 된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간혹 어떤 기둥이나 벽돌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은 경우에는, 그 옆과 위로 새 기둥이 연결되어 있다.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된 도시에서 화자는 언니를 생각한다.
엄마의 증언 속에 언니는 불사조처럼 계속 살아난다. 하지만 그 언니는 진짜일까? 화자는 계속 의심한다. 그 기억 속에 쌓아 올려진 언니의 존재는 가짜라고 믿고 싶다.
이 도시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떤 사람.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해들 위에 끈덕지게 스스로를 복원한 사람. 그래서 아직 새것인 사람. 어떤 기둥. 어떤 늙은 석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 p.29
화자의 언니이야기는 세계를 넓혀간다. 독일군이 시민들을 총살했던 벽 앞에서 흰 초가 밝혀져 있다.
자신들이 살해되었던 벽을 향해 유령들이 우뚝우뚝 몸을 세우고 눈을 이글거릴지도 모른다.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p.39
유령들이 부유하는 도시를 '흰'이라고 표현한다면 여기서 '흰'은 어떤 공간이 될 것이다. 폐허가 되었다 복원된 도시에서 화자는 드디어 언니와 화해한다.
언니의 이유 없는 죽음은 히틀러에게 살해당한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으로 확장한다. 그 도시의 사람들이 벽 앞에 초를 밝히고 꽃을 바치는 것은 넋들을 위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살육당했던 것은 수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한다. 자신의 고국이 단 한 번도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연결시켜도 되는 것일까?
한강 작가의 치밀함, 영리함이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1부에서 언니의 죽음과 폭격으로 무너진 바르샤바는 2부에서 고국에서 일어났던 일 (5.18 광주 민주화 운동)로 연결되고 직전에 썼던 작품 <소년이 온다>와도 연결된다.
부서져본 적 없는 사람의 걸음걸이를 흉내내어 여기까지 걸어왔다. 꿰매지 않은 자리마다 깨끗한 장막을 덧대 가렸다. 결별과 애도는 생략했다. 부서지지 않았다고 믿으면 더이상 부서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니 몇 가지 일이 그녀에게 남아 있다;
거짓말을 그만둘 것.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 -자신의 것을 포함해 - 초를 밝힐 것. p.109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엄마를, 언니를 원망하지 않는다. 엄마가 계속 언니를 언급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언니의 죽음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가장 연약한 깃털을 모으고, 아이가 처음 입는 옷, 배내옷을 손수 짓는다. 장례식을 치르고 울고 불고 해야 슬픔을 달랠 수 있는 것처럼, 그녀 안에 살고 있던 언니와 화해하고 보내주는 일종의 추도의식이 필요한 이유다.
2부의 그녀는 1부의 나와 동일인이다. 성에, 서리, 눈, 눈송이들처럼 '흰' 것들에 대한 단상이 이어진다.
개는 개인데 짖지 않는 개는? p.62
싱거운 수수께끼의 답은 책에서 확인하시길~
아는 사람은 킥킥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다시 상처로 넘어가 보자. 이겨냈다고 생각했는데 화자인 그녀는 아직도 아프다. 소금은 무엇인가를 썩지 못하게 하고 소독하고 낫게 하는 힘이 있지만 '상처에 소금을 뿌린다'는 것은 못할 짓이다.
소금언덕에 발을 올릴 수 없는 화자는 사진이라는 사실을 아는데도 소금으로 인한 상처의 기억이 너무도 생생해 머뭇거린다.
소금으로 언덕을 만든 뒤 관람객들에게 거기 맨발을 얹도록 하는 설치 작품의 사진을 그녀는 얼마 뒤 보았다. 준비된 의자에 걸터앉아 신발과 양말을 벗은 뒤, 소금 언덕에 두 발을 얹고서 원하는 만큼 앉아 있도록 한 공간이었다. 사진 속 전시실은 어두웠고, 빛이 떨어지는 곳은 사람의 키보다 조금 높은 소금 언덕의 꼭대기뿐이었다...... 흰 소금 산과 여자의 몸이 자연스럽게 ㅡ 기이하게 아프게 ㅡ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려면 상처가 없는 발이어야겠지, 사진을 들여다보다 그녀는 생각했다. 곱게 아문 두 발이라야 거기 얹을 수 있다, 그 소금 산에, 아무리 희게 빛나도 그늘이 서늘한. p.67
죽지마, 죽지 마라 제발.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뜨고 들은 말은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p.133
'죽지마라 제발'은 엄마가 한 말이고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의 말은 화자가 한 말이다. 엄마와 화자는 공통의 대상에게 같은 말을 하면서 화해의 순간을 맞이한다. 비록 화자는 이야기 속에서 언니를 만나고, 상상하고, 이별의 과정을 겪는다.
나는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를 화자가 자신에게, 또 우리 모두에게 해주는 격려의 말이었으면 좋겠다.
사실 이 책을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다들 걱정이 많았다. 한강 작가 책중에서 가장 쉽게 읽혔지만 읽고 나니 가장 어려웠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오히려 무채색 계열의 책이 더 어렵다는 걸 이번에 깨달았다.
폭력과 죽음과 고통으로 점철된 책을 쓰고 난 뒤에 흰 페인트칠이 필요한 것처럼 작가에게 이 책은 정화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소년이 온다>를 읽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글쓰기가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말이다. 자신의 몸을 열어 죽은 영혼들이 들어오게 했으니 세상에 존재하는 온통 '흰'것으로 깨끗하게 비워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야 또다시 채울 수 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묻겠다. 아니 나에게 묻겠다. 당신은 당의정의 기억으로 살 것인가? 각설탕의 기억으로 살 것인가? 아플 때 먹는 당의정과 과분하고 귀한 듯한 각설탕 중에서 우리의 인생에서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말이다.
열 살 무렵이었다. 막내고모를 따라서 처음으로 커피숍에 갔을 때 그녀는 각설탕을 처음 보았다. 흰 종이에 싸인 정육면체의 형상은 완벽할 만큼 반듯해, 마치 그녀에게 과분한 무엇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벗겨내고 하얀 각설탕의 표면을 쓸어봤다. 귀퉁이를 살짝 부스러뜨려보고, 혀를 대보고, 아찔하게 달콤한 표면을 조금 갉아먹고, 마침내 물잔 속에 넣어 녹는 과정을 지켜보는 탐험을 했다.
이제 그녀는 더이상 단것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지만, 이따금 각설탕이 쌓여 있는 접시를 보면 귀한 무엇인가를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p.81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마음을 흔들고 꼭 완성하고 싶은 소재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 『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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