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결국 1일
얼마 전 엄마가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첫눈에 가슴 설레고 불꽃 튀는 사랑은 그 결말이 파국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고. 대신 첫눈에 끌리지는 않지만 만나면 만날수록 정이 가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이 나의 진정한 인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셨다. 당시에 왜 그런 말씀을 내게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들은 이후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남편과 네 번째 만남, 그리고 1일
다음 약속으로 우리는 주말에 서울 근교 카페에 가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 사귈 정도의 호감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냥 ‘한 번 더 만나보고 싶다’ 정도의 생각이었다. 그와의 만남과는 별개로 그즈음 나는 혼자서 당일치기로 전주에 있는 한옥 호텔에 다녀올 계획이 있었다. 내가 운영하는 필라테스 센터의 홈페이지를 새로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거기에 들어갈 좋은 사진, 즉 바디프로필이 필요했다.
색다르게 찍고 싶어서 한옥을 배경으로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소를 물색하던 중 지인으로부터 전주에 괜찮은 한옥호텔을 추천받았고 실물로 장소를 확인하고 싶어 사전답사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장에 몸소 가서 사진 찍기 좋은 스팟을 미리 정해놓고 그곳과 어울리는 대략적인 동작도 구상하고 싶었다.
기차표를 예매하려고 표를 보고 있는데 문득 봄바람이 부는 날씨에 혼자 내려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그와 서울 근교 카페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렇지만 카페 대신 전주에 당일치기로 다녀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이기적인 생각일 수 있겠지만 일도 하고 데이트하는 기분도 낼 수 있으니 1석 2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충동적으로 기차표 두 자리를 예매할 수 있을지 검색해 보았다. 떨어져 앉으면 예매가 가능한 자리가 딱 2자리 남아있었다. 생뚱맞지만 그에게 카톡으로 넌지시 내일 서울 근교 카페에 가는 대신 전주에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것이 어떨지 물어봤다.
나도 안다. 갑자기 이렇게 물어보는 거 이상하다. 사귀지도 않으면서 대뜸 당일치기로 전주에 다녀오자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약속 하루 전날 밤에 갑자기 계획을 변경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렇지만 날도 좋은데 나 혼자서 전주에 사전답사를 다녀오는 것은 정말 싫었다. 친구랑 다녀오면 좋겠지만 급 약속을 잡고 함께 놀러 갈 수 있는 친구가 없었다. 결혼이 늦어지는 시대라지만 놀랍게도 내 친구들은 대부분 나보다 일찍 결혼을 해서 육아에 전념하느라 멀어진 지 오래였다.
게다가 나는 삼십 대 후반이 되도록 남자랑 비행기는커녕 기차 한 번 타본 적이 없었다. 기차나 비행기를 타는 것은 꽤나 의미 있는 이벤트인 것 같아서 결혼이 확정된 남자랑 하고 싶어 미뤘었는데 이렇게까지 늦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예전부터 주변 친구들은 부질없는 의미부여라고 했지만 나는 줄곧 확고했다.
그렇지만 막상 마흔을 앞두고 보니 슬슬 내 생각이 틀렸던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나이 들기 전에 이성과 함께 기차라도 한번 타보고 싶었다. 이상한 거 알면서도 인생 뭐 있나 싶은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심 긍정적인 답변이 올 확률은 10-20% 정도로 희박할 거라 예상하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나 운전하는 거 좋아해. 멀리 가도 돼.
오랜만에 휴게소도 가고 좋다.
하고 싶은 거 다 말해.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다 해줄게.
의외로 그에게서 따뜻한 답변이 왔다. 그렇게 우리는 네 번째 만남에 전주로 향했다. 그는 내가 마실 커피까지 직접 내려서 보온병에 싸 오는 섬세함을 보여주었다. 약간의 어색한 기운이 맴도는 차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방 전주에 도착했다.
늦은 점심을 먹을 겸 전주 전통거리를 걷다가 길거리 노점 중에 사주를 봐주는 곳을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이따 밥 먹고 저기서 점 볼래?'라는 말이 나왔다. 길거리 노점에서 보는 점이 정확하겠나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뱉은 말이었다. 근처에서 점심을 사 먹고 나왔을 때 나는 아까 했던 말은 잊어버리고 그곳을 지나치려고 하던 찰나 그는 내가 무심코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저기 들려야지?
나: 아.. 맞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가볼까?
그: 응. 네가 가자고 해서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지.
그렇게 우리는 그 노점에 가서 재미 삼아 궁합을 봤다. 자리에 앉자마자 점쟁이 아저씨는 나를 보더니 공주가 왔다고 말씀하시며 내 사주부터 봐주기 시작했다.
점쟁이: 솔직히 이때까지 마음에 드는 남자 없었잖아?
(어떻게 아셨지? 너무 잘 맞춰서 신기했다.)
점쟁이: 우리 남자친구는 그래도 공주한테 선택받은 남자네. 공주가 눈이 되게 높은데 선택받았어. 허허허.
‘남자친구..? 우리 아직 사귀는 사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어 옆을 보니 그는 머리카락을 귀 뒤에 넘기며 어쩔 줄 몰라하며 듣고 있었다. ‘내가 이 사람을 선택한 건가? 같이 전주에 올 정도면 내가 이 사람을 선택한 건가?’ 갑자기 긴가민가했다.
점쟁이: 공주는 올 6월이랑 11월에 결혼 운이 있네.
지금이 4월이니 다가오는 6월은 결혼할 리가 없겠고 하더라도 11월에 하겠다 싶었다. ‘올해는 정말 결혼할 수 있을까? 누구랑 하게 될까? 이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 나에게도 결혼이라는 게 정말 현실이 될 수 있는 걸까? 몇 달 전에 본 전화사주에서도 올해 결혼운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인가 보다 싶어 기분이 좋으면서도 여러 가지 생각이 든 상태로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그렇게 재미로 사주를 보고 나와 우리의 최종 행선지인 한옥호텔로 향했다. 호텔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고 우리는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평화롭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장소에 직접 와보니 너무 좋아서 1박을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이 호텔을 추천해 분 분이 숙박 할인을 해 줄 수 있다고 하셔서 가능한 한 빨리 예약을 잡고 싶어졌다. 그분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다음 주나 다다음주 중으로 숙박을 하러 다시 이곳으로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를 하니 고맙게도 그가 다음번 방문에도 내게 라이드를 주겠다고 선뜻 말해주었다. 너무 고마운 제안이었지만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장거리 라이드를 얻어 타도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내가 올해 어떤 결심을 했었던가. 바로 나쁜 X처럼 살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오롯이 내 입장만 생각해 보니 라이드를 얻어 타면 내 몸도 편하고 말동무도 있어서 재미있고 좋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에 머물지?’라는 고민이 생겼다. 같이 1박은 할 수 없으니 돌아갈 때는 그 사람 혼자서 운전해서 올라가야 되는데 괜찮겠는지 물어봤다. 그는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아니면 그는 차에서 1박을 하고 나를 픽업해서 서울로 돌아올 수도 있고 또는 다음날 다시 전주로 올라와서 나를 픽업해 줄 수도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감동을 받아서 할 말을 잃었다. 세상에 이런 남자가 있다고?
이렇게 까지 말해주고 내 편의에 맞춰주며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데 이제는 내가 그를 안 만날 이유를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 남자와 사귀어 보지 않고 관계가 흐지부지 끝나 버리면 내가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강하게 들었다. 결국 우리는 전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앞으로 잘 만나보기로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