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3개월 전
여우 같은 여자는 보수적이다
남자들은 이성을 볼 때 외모가 자신의 스타일이고 대화가 잘 통하면 길게 생각하지 않고 일단 직진을 한다. 반면 여성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미래의) 아이를 지켜줄 수 있는 책임감 있는 남성을 원하기에 상대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여성은 이성과의 관계에서 만큼은 신중해서 잃을 것이 없다. 되려 경솔했다가 많은 것들을 잃어버릴 수 있다. 연예인들의 연애뉴스만 보아도 남자보다는 여자 연예인들의 타격이 훨씬 큰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다. 시대가 바뀌었다지만 연애에서 만큼은 보수적으로 처신하는 것이 안전하다.
나는 마음을 여는데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이다. 그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사귀는 데까지는 충분히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요즘은 여성에게 공을 들이는 수고를 최소화하고 싶어서 관계정립을 재촉을 하고 가스라이팅을 일삼는 여우 같은 남자들이 많다. 나의 시간을 기다려 주지 못하는 남자는 어차피 내 인연이 아니다.
남편과 두 번째 만남
다음 날 오후 1시에 전날 만난 소개팅남에게 연락이 왔다. 어제 그의 눈빛과 행동을 봤을 때에는 아침 일찍부터 톡이 올 거라고 예상했는데 예상보다는 연락이 늦게 왔다. '튕기는 건가?'라는 마음이 조금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새벽 늦게 자고 이른 오후에 일어나는 특이한 수면패턴의 소유자였다. 결국 그의 입장에서는 일어나자마자 나에게 연락한 것이었다. 노처녀 노총각들은 자격지심이나 트라우마 때문에 급발진을 할 때가 있는데 연애에 있어서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우리는 약속대로 3시에 보기로 했다. 약속장소에 도착해 보니 그는 이미 일찍 와서 카페테라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5:5 가르마에 웨이브 진 단발머리, 알록달록한 체크무늬 셔츠, 그리고 청바지를 입고 미소를 머금은 인자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어제 봤을 때도 요상했는데 다시 봐도 요상하다. 김이 빠진 채 인사를 건넸다. 그는 고개를 들더니 마치 여신을 바라보는 황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방긋 웃으며 일어났다. 내게 빵을 먹자고 하며 빵이 있는 쪽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나는 관심도 없는 빵을 고르러 따라갔다. 그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기다란 프레즐을 하나 집어서 쟁반 위에 올렸다. 맛없어 보였다. 어차피 안 먹을 거여서 상관없었다. 커피와 빵을 사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칼을 들더니 프레즐을 균일한 크기로 가지런하게 잘랐다. 참 예쁘게 잘 잘랐다.
그는 빵을 좋아한다고 말하며 본인이 디저트학 석사 출신이고 그의 어머니는 디저트학 박사출신이라고 말했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예의상 그가 잘라놓은 프레즐 한 조각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순간 입 안에서 폭죽이 터졌다. 세상에. 너무 맛있었다. 프레즐이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우울했는데 약간의 치유가 될 정도의 힘이 있는 강렬한 맛이었다. 그 빵을 고른 그가 순간 다시 보였다. 센스 있어 보였다.
그 사람은 내내 헤벌쭉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중간에 가끔씩은 여신 보듯이 황홀하게 홀려있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나중에 훗날 신랑이 된 그에게 들은 얘기인데 이날 나에게 완전히 홀렸다고 했다.) 그날 화장이 유난히 잘 먹기는 했지만 내가 그 정도인가 싶어 내심 머쓱했다. 대화도중 문득 이 사람의 헤어스타일이 평범했을 때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나: 머리 짧았을 때 사진 있어요?
그: 네! (아주 해맑은 표정으로 짧게 대답했다.)
나: 보여줄 수 있어요?
고개를 숙이더니 핸드폰에서 사진을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게 예전 사진을 보여줬다. 순간 깜짝 놀랐다. 너무 잘생긴 남자가 사진 속에 있었다. 아무리 봐도 포토샵을 심하게 한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나: 너무 잘생겼는데? 본인 맞아요?
그: 네! (동그란 눈으로 무해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나: 진짜 잘생겼다!
살면서 잘생겼다는 말을 처음 들어본다며 어색해하면서도 쑥스러워했다. 사진이 잘생겼다는 말이었는데 말이다. 아무리 봐도 너무 달라서 보정한 것 아니냐고 재차 물어봤는데 아니라고 했다. 사진 속 남성은 완벽한 나의 이상형이었다.
머리 자를까요?
잠시 주저하는 듯하더니 그가 대뜸 내게 물어봤다. 1년 넘게 열심히 길러온 머리라고 들었는데 고작 2번 본 나에게 이렇게 쉽게 머리를 자를지 물어볼 일인가 싶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단번에 끄덕이며 ‘네’라고 답했다. 머리를 자른 모습이 사진이랑 같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는 알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2차로 한강에 가서 산책을 했다. 그날 점심에 라면을 먹은 죄책감 때문에 저녁은 건너뛰고 싶었는데 마침 그도 저녁을 안 먹어도 좋다고 했다. 우리는 산책을 하며 더욱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나: 제 꿈은 정원이 있는 단독 주택에 집을 짓고 작은 연못을 만들어서 잉어를 키우는 거예요.
아뿔싸. 나도 모르게 이 말이 튀어나왔다. 앞으로 이성을 만나면 이 말만큼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던 터였다. 불과 며칠 전 헤어진 남자에게 ‘그런 이야기 듣고 좋아할 남자가 없다’고 지적을 받았던 터라 더욱 말실수를 한 것 같이 느껴졌다. ‘아.. 망했다.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던 순간 그가 대답했다. ‘그렇게 연못을 만들려면요~’라고 하며 연못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유튜브 누구의 영상을 보면 연못을 만들어서 각종 어류를 키우는 채널이 있다며 설명이 이어졌다. 어떻게 그렇게 아는 것이 많은지 물어봤다. 그는 찡긋 웃더니 ‘정보 수집이 취미’라고 했다. 알고 보니 예전에 그는 단독 주택에 살아본 적이 있었다. 나의 오랜 꿈이었는데 유경험자를 만나 본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순간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말실수라고 생각했던 나의 말들이 이 사람 앞에서 만큼은 실수가 아닌 매끄러운 대화로 이어지는 조용한 기적이 일어났다. 아직 이성으로서 확신은 안 들었지만 일단은 이 사람과 꼭 친한 친구로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낮에 만나 밤늦게까지 대화가 이어졌다.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의 차에 타자마자 그가 돌발 선언을 했다. 다음번에 만나면 ‘고백’을 할 거란 발언이었다. 고백을 예고하다니 생각만 해도 다음번 만남이 불편했다. 아... 앞으로 친구로 지내려고 방금 전에 마음먹었는데 어떡하지?
남편과 세 번째 만남
눈앞에서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라 차에서 내리기 전에 얼떨결에 다음 약속을 잡아버렸다. 집에 들어와서 생각해 보니 고백을 받을 자신도 거절할 자신도 없었다. 나에게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미안하지만 일이 생겨서 약속을 일주일 뒤로 미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약속 날이 다가오는 일주일 동안 지속적으로 내게 카톡을 보냈다. 나는 답변은 했지만 약간은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러 약속 날이 왔다. 내가 카톡에서 충분히 티를 냈기 때문에 이 정도면 눈치를 챘겠지 싶어 그 사람이 고백만큼은 안 하기를 내심 기대하고 나갔다. 아직 사귈 만큼의 확신은 없었고 그렇다고 끊어내기에는 대화가 재미있고 좋은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약속장소에 그는 먼저 와서 앉아있었다. 들어가자마자 멀리 앉아있는 그의 옆모습을 발견했다. 심한 거북목과 삼각 김밥 같은 단발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입은 왜 벌리고 있는 거지? ‘오늘이 마지막이다’라고 다짐하며 비장하게 입술을 깨물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방긋 웃으며 환하게 맞이해 줬다.
좋은 음식을 먹으며 대화가 무르익으니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생각보다 대화가 재미있었다. 내가 꼭 결혼해야 한다는 법도 없고 나와 이 사람 모두 싱글이니 그냥 친구로 영원히 알고 지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심하면 다음번에도 또 볼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던 찰나에 그가 갑자기 엄청나게 큰 쇼핑백을 뒤에서 주섬주섬 꺼냈다. 나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며 깜짝 놀랐다.
고백공격
일단 첫 번째로는 쇼핑백이 너무 구겨져 있어서 놀랐고 두 번째로는 세 번째 만남치고 선물이 꽤 좋아서 놀랐다. 브랜드 향수 선물이었다. 선물을 보자마자 들었던 생각은 ‘맙소사, 다음번에 무조건 만나서 내가 밥을 한번 사야겠다.’였다. 아주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날 꽃다발도 차에 있었는데 내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그것까지는 차마 내게 주지 못했다고 했다. 어쨌거나 선물을 받으니 대접받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그는 걸어서 나를 집까지 바래다줬다. 그렇게 서로 인사하고 내가 집에 들어가려고 등을 지려는 순간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결국 그가 지난번 예고대로 내게 고백을 하고야 말았다.
어떻게 대답해야 될까?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나의 단골 멘트를 뱉어버리고 말았다.
나: 아.. 어... 나는 아직 사귀는 것까지는 잘 모르겠어서… 한 달만 더 생각할 시간을 줄 수 있을까?
'망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순간 두려웠다. 이번에도 결국 서로 기분 상하다가 또 끝나버리겠구나 싶었다. 남녀 관계에서 둘 중 하나가 고백을 하는 순간 그 둘의 사이는 친구로 지내는 것이 물 건너 간 거나 다름없다. 사귀는 거 아니면 다시는 안보는 사이가 되어버린다. 나는 신중한 성격이기 때문에 예상보다 이른 고백을 받으면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대답을 유예하면 이성들은 어김없이 나를 쟤고 따지는 여자로 치부하는 일들이 다반사였다. 생각보다 빠른 고백은 내게 피로감을 줬다.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는 남자를 만나라
불안해하면서 답변을 기다리던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을 들었다. 그는 순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다시 푸근하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응~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면 그렇게 해.
한 달 기다릴게. 한 달 뒤에도 시간이 더 필요하면 그때 또 알려줘. 더 기다릴 수도 있어. 가라고 하지 않으면 나 계속 기다릴 수도 있다? 얘 아직도 안 갔어? 너 오히려 이럴 수도 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살면서 이런 대답은 처음 들어보았다. 내게 돌아왔던 대부분의 반응은 ‘지금 쟤는 거냐’ ‘네가 시간을 끌수록 내 마음이 식을 것 같다’ ‘넌 생각이 많아서 문제다’ ‘그냥 사귀자’ 등의 나를 비난하거나 압박하는 공격성 답변들이었다. 그동안 내가 들어왔던 답변들과 전혀 다른 색깔을 띠고 있는 그의 답변은 내게 새로운 감정을 줬다. 그것은 바로 ‘자유’였다. 이성과의 관계에서 처음으로 자유를 느꼈다. 그 자유 안에는 바로 나라는 사람에 대한 ‘존중’이 있었다.
그의 여유 있는 모습에 호감과 호기심이 생겼다. 그를 한 번 더 만나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