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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프더레코드 Sep 26. 2021

"임자, 해보긴 했어?"

'이 땅에 태어나서'를 읽고_아산문화재단 정주영 회장 20주기 독후감

-대회가 있길래 용돈이라도 벌어  요량으로 썼던 독후감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았고, 그냥 오랜만에 누군가의 삶을 글로 읽고, 감상을 썼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출근길 지하철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둘 중 한 명은 스마트폰 속 주식을 들여다보고 있다. 40대 초반인 또래의 친구들, 직장동료들과 둘러앉으면 식사 메뉴는 달라져도 대화 소재는 항상 아파트, 주식, 비트코인이다.

 ‘잘못 살아온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지난해 여름이다. 코로나19 대유행의 혼란 속 코스피와 코스닥은 멈추지 않고 상승했다. 정부가 이런저런 대책을 내놨지만, 아파트값 또한 속절없이 오르고 있었다.

 마흔 넘도록 ‘내 집’ 없이 월세와 전세를 전전하고 있다. 주식은 노력 없이 돈을 버는 도박같다는 생각에 해본 적이 없다. 비트코인 오를 것이란 소문을 들었지만 사기같이 여겨져 어떻게 사고파는지 알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열심히 일하면서 월급 아껴서 등록금, 월세 보증금, 전세자금 대출을 갚고 저축하면 언젠가는 내 집 마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자신이 어리석고 한심하게 느껴질 때 즈음 ‘이 땅에 태어나서’를 통해 정주영 회장을 다시 만났다.

 그와 처음 만난 건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를 읽었던 30년 전 중학생 때였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한민국 최고의 글로벌 기업을 만들어 낸 기적적 성공스토리가 재미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큰 감동은 없었던 것 같다. 앞날이 창창한 10대여서 ‘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가득했으니까.

 하지만 일상에 지쳐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40대에게 ‘이 땅에 태어나서’를 통해 다시 만난 정주영 회장은 그야말로 신화의 주인공같은 '거인'이었다.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끝내 성공을 이뤄낸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마치 거대한 손바닥처럼 나의 움츠린 등짝을 ‘철썩, 철썩' 후려치는 것 같은 깨우침을 줬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마주칠 때마다 집념으로 내딛었던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은 거인의 발자국마냥 내 심장을 ‘쿵, 쿵’ 울렸다.

 특히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울산 미포만 현대조선소 건설 과정은 정주영 회장 특유의 도전정신과 신념, 지혜와 성실성이 아니었다면 해낼 수 없었던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다.

 정주영 회장이 차관 도입을 위해 만난 A&P 애플도어 사의 롱바톰 회장에게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 그림을 보여주며 설득하는 모습에선 ‘얼마나 간절했으면 저런 기막힌 임기응변까지 발휘했을까’라는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또 그가 미포만 백사장 사진과 지도, 유조선 도면을 들고 배를 사줄 선주를 찾아 돌아다니며 “당신이 이런 배를 사준다고만 하면 내가 영국에서 돈을 빌려 이 백사장에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어주겠다”라고 말했다는 대목을 읽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즉 조선소도 없고, 조선소가 없으니 배를 만들어 본 적도 없고, 게다가 조선소를 지을 돈마저 없는데 유조선 2척을 사는 계약을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계약서를 가지고 영국 은행에 가서 담보를 잡아 빌린 돈으로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어서 주겠다는 뜻이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 조건에 응해서 배를 사겠다고 할까. 정주영 회장은 어떤 수준의 신념이 있었기에, 또 얼마나 간절했기에 이런 억지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정주영 회장은 또 이걸 해냈다. 모두가 ‘말도 안된다’, ‘불가능하다’고 한 일을 그는 해내고야 말았다. ‘할 수 있다’는 믿음과 '해야 한다’는 각오를 극한까지 끌어 올려 모든 역량을 한계 이상으로 발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기어이 해냈다.

 얼마 전 ‘2021년 1월 한국 조선업, 세계 선박 건조 수주량 51.7%로 4개월째 세계 1위’라는 뉴스를 봤다. 코로나19로 전 세계 제조업 전망이 불투명한 가운데 한국 조선업체들이 위기 극복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해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우리 국민에게 희망을 선물해 준 소식이다.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이 희망은 50년 전 이역만리에서 후진국에 대한 무시와 냉대를 참아가며, 본인조차 ‘미친 사람 취급당하기 딱 십상인 소리’임을 알면서도 어디 있을지 알 수 없는 선주를 찾아다녔던 정주영 회장의 땀과 눈물이 씨앗이 되어 뿌리내리고 자란 나무에 달린 하나의 열매라는 사실을 말이다.

  한 편의 영화와 같은 현대조선소 건설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듯 정주영 회장의 인생과 그가 이끈 ‘현대’의 성장사(史)는 ‘끝없는 도전의 역사’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정주영 회장이 도전해서 갖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공하면, 그것은 자신만의 업적에 그치고 만 것이 아니었다. 그 혜택을 모든 국민이 누렸고, 지금도 누리고 있다.

 마치 신화같지만 엄연한 사실이고, 그 역사의 중심에 정주영 회장과 현대가 있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역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시내버스나 마을버스를 탄다. 그 버스의 앞, 뒷면에는 은빛 ‘HYUNDAI’ 마크가 반짝인다. 만약 일제 치하 ‘아도서비스’에서 시작된 정주영 회장의 꿈이 1967년 현대자동차 설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또 ‘100% 국산화 달성’에 도전하지 않고 미국 거대 자동차 회사인 GM과 포드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는 편한 길을 택했다면 우리는 지금도 아프리카처럼 ‘GM’ 혹은 ‘FORD’, ‘TOYOTA’가 새겨진 자동차를 타고 출근할 것이다. 외국 회사와 싸우고,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하고, 울산 주민들을 달래고, 함께 일하는 직원들을 때로 다그치고 때로 격려했던 정주영 회장의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노력 덕분에 우리는 지금 전 세계 곳곳을 누비는 현대차를 보며 “봐라. 저 자동차가 미국도 일본도 아닌 대한민국의 기술로 만든 차”라고 자랑할 수 있게 됐다.

 자동차 분야에서 특히 두드러지지만 사실 정주영 회장은 도전했던 모든 산업 분야에서 ‘우리 힘으로’, 즉 ‘100% 국산화’를 목표했다. 고령교 복구와 비료공장을 시작으로 소양강댐과 화력발전소 등 플랜트 분야,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각종 도로와 교량 및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 과정에서 당장 편하다는 이유로 외국 자본과 기술에만 의존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한국의 현실은 2차 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부존자원이 풍부한 것에 취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동남아 나라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국가 경제의 근본인 사회간접자본을 자신의 힘과 기술로 만들지 못하면, 아무리 소비재를 잘 만들고 서비스 산업을 발전시켜도 그 과실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맛보고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주영 회장이 ‘자국화’, ‘100% 국산화’를 고집한 것도 이런 이유였고, 그 터전 위에서 우리나라 모든 산업 분야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다.

 ‘100% 국산화 도전은 해외시장 진출의 소중한 자산이 됐다. 정주영 회장이 해외진출을 결심하고 공표한 때가 1963년이고,  수주에 성공한 것이 1965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다. 놀라운 점은 1965년은 경부고속도로 착공 3 전이란 사실이다. 이후 1970년까지 현대건설은 알래스카, , 파푸아뉴기니, 베트남, 캄보디아에 호주까지 그야말로 태평양 일대를 종횡무진했다. 이와중에 1967년부터 소양강댐 건설도 맡았다. 현대건설이 중동 진출의  장을 화려하게 장식한 사우디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의 계약이 성사된 때가 1976년이다. 정주영 회장이 조선소를 지을테니 배를  달라고 선주를 찾아 유럽을 돌아다닌 6 뒤의 일이다. 국내에서 쌓은 경험으로 외국에 진출하고, 해외에서 쌓은 경험으로 다시 우리의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다시 해외로 진출하기를 무한 반복했던 것이다. 멈출  모르는 도전을 통해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던 세계 최빈국은 ‘보릿고개 상징되는 끼니걱정에서 벗어나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다.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한다.  기적의 중심에 정주영 회장, 그리고 그가 이끈 현대가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정주영 회장의 도전에는 항상 시련이 따라붙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모든 도전이 ‘대한민국 사상 최초였다.  보지 않은 , 남들은 지레 겁먹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일에 과감히 도전해 어려움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빛나는 성과를 냈다. 정주영 회장이 거듭해 왔던 시련 극복에는  개의 공식이 있다. 핵심은 ‘의지 ‘믿음’, ‘현장 ‘발상의 전환이다.

 그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반드시 해낸다’는 의지와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문제 해결 방법을 고민했다. 고민하는 장소는 책상머리가 아니라 항상 현장이었다. 진도가 나가다 멈춘 그 현장에서 어떻게든 일을 해내는 방향으로 생각했다. 상식과 고정관념의 틀에 매이지 않고 일을 하는 사람의 관점으로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분석하고 연구해서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담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문제를 풀어갔다.

 콘크리트댐 건설 계획을 사력댐으로 바꿔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비용을 줄였던 소양강댐 공사, 현대조선소를 만드는 동시에 배 두 척을 건조했던 것, 울산에서 생산한 기자재를 미포만에서 페르시아만까지 무려 1만2천킬로미터 바닷길로 운반했던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 고철선을 가라앉혀 물줄기를 막는 ‘유조선 공법’으로 완성한 천수만 간척 사업 등 정주영 회장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조롱을 감탄으로 바꿔낸 기적과 같은 일들을 이끌었다. 현장에서 의지와 믿음을 굳게 다지며 기발한 방식으로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스스로 ‘그저 꽤 부유한 노동자’라고 소개했던 것이 꼭 틀린 말이 아니다.

 40대가 되어 재회한 꽤 부유한 노동자 정주영 회장은 내게 이렇게 물었다. “임자, 물려받은 것 없는 처지를 탓하기 전에 무슨 일을 제대로 해보기나 했어?”

 그리고 이렇게 충고했다.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일단 해 봐. 이 사람아! 도전하지도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모든 일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거야”

 이에 주저하는 표정을 짓자 그는 이제 갓 40을 넘긴 ‘어린’ 노동자의 마음의 등짝을 이렇게 후려쳤다.

 “나는 나이 80 넘어도 일꾼으로서 늙었다고 생각지 않았어. 일에는 늙음이 없어. 최상의 노동자에겐 새로운 일감과 순수한 정열이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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