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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프더레코드 Jul 22. 2021

신여성의 탄생

삶과 사랑 이야기 #1

 때는 21년 전인 2000년.

 철없는 대학생 부부는 3학년 2학기 기말고사 시즌 중 결혼식을 올렸다. 여자는 남자의 후까시를 사랑했고, 남자는 여자의 외모를 사랑했다. 어쨌든 둘 다 자세한 것은 따지지 않았다. 이게 화근이었다.   

 신혼여행은 기말고사가 끝난 뒤 갔다. 여자의 뱃속 아기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제주도 호텔에서 잭다니엘 한 병씩을 시원하게 까버리는 등 달콤 씁쓸 알딸딸한 여행의 상세한 이야기는 일단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문제의 단초를 확인한 것은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시집에 갔을 때였다. 어린 부부는 척하니 제주의 명물 한라산 소주 두 댓병을 기념품이랍시고 사왔고, 창원집에서는 부산, 마산의 친척들이 모두 모인 대형 술판이 벌어졌다. 노래 부르라는 아버지의 지시에 철없는 꼬마 신랑은 단 한 번의 주저함도 없이 젓가락 두드리며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구성지게 불렀고, 꼬마 신부는 모자를 들고 집 사야 되니까 노랫값 두둑하게 내 놓으라고 앙탈을 부렸다.     

 물론 현재는 오십줄을 바라보는 사촌형님의 형수님이 맏며느리지만, 결혼의 시간순이나 시집생활의 짬밥에 있어서는 이 꼬마 신부가 사실상 맏며느리다. 또한 시집의 구미호같은 시어머니들을 상대함에 있어서도 주저함이 없이 능숙하다.     

 어쨌든, 꼬마 신부는 뱃속에 손주 걱정이 천근만근인 시어머니의 걱정의 눈초리를 무시한 채 시아버지들이 부어주는 술을 넙죽 넙죽 받아 마셨다. "캬~소주는 역시 한라산이야"라는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여기까진 좋았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시집에서 처음 자고 일어난 며느리의 기상시간은 무려 9시. 20년 넘게 새벽기도를 다니신 시어머니의 기상시간은 4시 반. 애초에 상대가 안되는 게임이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잠옷바람에 방에서 나온 며느리는 주방에서 들려오는 싱크대 물소리는 애초에 자기와 전혀 무관한 듯, 자연스레 신문을 보고 계신 시아버지 옆으로 갔다. 세수도 안하고, 눈꼽도 안닦고.     

 대담하게 시아버지가 읽고 있는 신문 속지 섹션을 슬쩍 빼들고는 태연스레 읽기 시작했다. 쇼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는지는 여지껏 확인되지 않고 있다.     

 별로 읽을 것이 없었는지 신문을 개켜 버린 뒤 하품을 한 며느리는 TV까지 켰다. 그러자 새벽 장을 보시고 와 주방에서 일하시는 시어머니가 끓이는 물메기탕의 따뜻한 향내 속에 분노의 스멜이 섞이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챈 시아버지가 전략적 사자후를 내뱉았다.     

"야이 축구야!"     

며느리는 그제사 이상한 낌새를 느꼈고, 신랑이 자고 있는 방으로 쏙 들어왔다.     

"자기야 '축구'가 뭐야?"     

신랑은 속으로 '아이고 큰일났네' 싶은 동시에, 앞날이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응 이 동네에서 축구는 바보라는 뜻인데..."     

그러자 골똘히 생각하던 며느리는 "아 내가 아버님 보시는 신문 뺏아봐서 그러시나 보네? 아닌가. 아침에 TV보는 거 안 좋아하시나?"     

조용히 듣고 있던 신랑의 가슴은 이미 천길만길 낭떨어지로 추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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