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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프더레코드 Aug 03. 2021

'가난한 사랑노래'

삶과 사랑 이야기 #5

조금 솔직하게 이야기해보자.     

남자란 짐승이 그렇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생겼을 때, 처음에는 손 한번 잡아보려고, 키스 한번 해 보려고, 한번 안아보려고 온갖 쇼를 한다.     

하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시큰둥해진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이걸 보고 뭐라뭐라 했는데, 기억이 안난다.     

여성분의 경우 그대들의 연애사를 한 번 되돌아보시라. 초기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집까지 졸졸 쫓아오며 사랑을 속삭이던 남자 친구가, 어느 순간 이후로 온갖 핑계를 대며 집에 데려다주는 걸 피하려 하지 않던가?     

여자의 심리는 잘 모르겠다만, 남자가 결혼을 결심하는데는 '데려다주기 귀찮아서'라는 얼척(어처구니)없는 이유도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연애 초기 아내는 굉장히 쿨했다. 결정적으로 '집에 데려다 달라'는 말을 안 했다.     

새벽 2시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도 내가 데려다 주겠다고 하면 "괜찮아. 혼자 가는 게 더 좋아"라며 휙하니 택시를 잡아타고 가 버렸다.     

나는 이런 아내를 보며 '독립심이 강해서 그렇겠지'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내가 편하니까 좋았던 거지 뭐. 그 전과 비교해도 그렇고. 돈도 덜 들고. 히히     

2000년 늦봄 아내가 학교 구경시켜준다해서 이대 교정에 끌려 들어갔다. 음대 앞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들과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밥이 어디로 넘어갔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만난   달째였던가. 정동진 무박 2(무박임을 누차 강조해둔다) 여행을 다녀온 직후였으니 대충 맞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친구 2명이 서울에 놀러 왔다. 한 녀석은 군 일병휴가, 한 녀석은 중국에서 타월팔다가 휴가 차. 무작정 술만 먹기는 그렇고, 또 이 녀석들이 미팅을 줄기차게 요구하길래 아내에게 요청해 아내의 친구들과 3대3 미팅을 했다.     

이대 앞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신촌기차역 앞에 있던 노래방을 갔다.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된 A씨는 노래를 부르며 그때 한창 유행이던 펌프에 열중했고, 나와 아내를 연결시켜줬던 B는 당시 남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러 나와서 엄청난 주량을 보여줬다.     

촌놈친구들은 아내 친구들의 다정하고 세련된 응대에 몸둘 바를 몰라했다.

시간이 되어 아내 친구들은 각자의 집으로 흩어지고, 나도 촌놈들과 함께 내 자취방으로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아내가 나를 붙잡았다.

"집에 데려다 줘"     

"응?"     

"집에 같이 가자고"     

"어... 어."     

촌놈 둘 졸지에 서울의 미아가 되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둘은 내 자취방을 잘 찾아갔고, 방에 돌아갔을 때는 당시 잠깐 같이 지내고 있던 내 친형과 라면, 순대, 튀김 같은 걸 놓고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양재로 가는 버스 안에서 아내는 평소와 달리 말없이 창문만 보고 있었다. 나는 그 뭉툭한 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온갖 뻘소리를 다했다. 아내는 싱긋 웃을 뿐 말이 없었다.

양재역에서 내려 청계산으로 가는 마을버스로 갈아탔다. 버스는 시민의 숲과 현대자동차를 지나 가로등도 없는 골목으로 우회전했다. 두 코스를 더 가서 아내는 하차벨을 눌렀다. 같이 내렸다.     

아내는 세 걸음 쯤 앞서서 걸어갔다. 비닐하우스로 된 꽃집들 사이로 난 흙길로 접어들었다. 20미터쯤 더 갔을까.     

"여기야. 우리집"     

아내는 나무 출입문에 빨간색 락카로 '47'이라고 쓰여진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홀로 멍하니 서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됐다가, 다시 헝클어진 실타래마냥 복잡해졌다.     

'밤이 깊었으니 일단 돌아가면서 생각하자'     

돌아서 골목을 빠져나오려 하는데, 뒤에서 개짖는 소리가 들렸다. 번개같은 속도로 환복을 마친 아내가 얼룩무늬 강아지와 함께 내게 뛰어오고 있었다.     

"그쪽에 이제 차 없어. 저쪽으로 같이 가"     

아내는 내게 뛰어와 안겼다. 아내의 이마 위 끄트머리와 내 앞니가 살짝 부딛혔으나 중요한 건 아니었다. 분위기도 모르는 똥개(토토)는 짖으며 내 신발을 물어뜯었다.     

아내는 말없이 살짝 흐느꼈고, 곧바로 비닐하우스촌 뒤로 흐르는 양재천 징검다리를 함께 건넜다. 아내는 나를 영등포까지 가는 광역버스를 태운 뒤 손을 흔들었고,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토토는 경쟁자가 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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