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저녁, 예약이 펑크났다. 열 두명 모임에 세 명 밖에 오지 않았단다. 미안했는지, 그 세 명이 가게로 와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어차피 단골들이라 별로 원망스럽지 않았다. 그리고는 곧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등장했다. 서른다섯살 단골과 목소리만 비슷한 스무살 새내기 커플이었다. 여학생이 두리번거리며 창 밖을 보고 있을 때 예약했던 남학생이 슬그머니 바(bar)로 와서 귓속말을 했다.
"사장님, 맥주 말고 술 맛 많이 안 나면서 슬그머니 취할 수 있는 칵테일 뭐가 있나요?"
아무 생각없이 "롱티"(롱 아일랜드 아이스티)라고 답했다. 흰티에 검은색 마이를 걸친 그 학생은 다시 창가 자리로 가서는 "사장님, 롱티 두 잔이요"라고 말했다. 마치 12년 전부터 롱티를 마셔온 것 처럼.
길쭉한 잔에 무시무시한 도수의 술인 데킬라, 보드카, 바카르디, 드라이진에다 오렌지 리큐르인 트리플섹을 섞은 뒤, 레몬 한 조각을 짜 넣고 나머지를 콜라로 채워 아이스티 맛이 나는 롱티의 알콜 도수는 무려 35도. 전형적 앉은뱅이 술, 그래서 작업주로 널리 쓰인다.
'아... 작업!'
그제서야 나는 그 남학생의 빅픽쳐를 알아챘다. 노래와 노래 사이에 간간히 들려오는 대화를 들어보니 함께 온 여학생과는 '사랑과 우정사이' 어디쯤에 있는 관계였다. 청바지에 흰블라우스를 입은 여학생이 "맛있어"를 연발하며 롱티의 절반을 마셨을 때 개업 단골 커플이 왔고, 테이블 세 개인 가게는 만석이 됐다.
때마침 스피커에선 윤종신의 '오래전 그날'이 흘러나왔다. 그 때문인지 나머지 단골 두 테이블도 이내 스무살 남학생의 의도를 파악한 것 같았다. 자기들끼리 대화는 주고 받지만, 실제 관심은 창가 테이블로 몰려가고 있었다.
'스무살 새내기 둘은 오늘 밤 역사를 창조하는가'
오래지 않아 여학생이 한 잔을 다 비우고, 볼이 달아오른 채 혀가 25%정도 꼬인 상태로 "사장님, 이거 한 잔 더 주세요. 너무 맛있어요"를 외쳤다. 그러자 다른 양쪽 단골들이 약속한 듯 긴 한숨을 내밷았다. "어휴...", "흐음..." 남학생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저두요"라고 했다.
어쩌랴. 손님이 달라고 하시는데, 드려야지. 솔직히 여학생의 두 번째 롱티에 데킬라, 보드카, 바카르디를 부을 때 심적 갈등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일테다. 그러나 정직하게 정량을 투입했다.
스무살이면 고3인 내 아들과 한 살 차이다. 나는 그 여학생의 부모가 된 심정으로 남학생의 롱티를 제조했다. 모든 술을 두 배씩 부어넣었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아니 실제로 기도했다.
내 간절한 마음까지 부어 넣은 남학생의 두 번째 롱티가 절반쯤 남았을 때까지 흐름은 비슷했다. 여학생이 술을 홀짝거리면서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혀가 조금씩 꼬여갔고, 단골들은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어댔다.
하지만 남학생이 화장실을 다녀온 뒤 여학생보다 더 꼬인 혀로 주절주절 이야기를 시작하자 단골들의 절망의 한숨은 안도의 한숨으로 바뀌었다. 여학생이 롱티 한 잔을 더 주문하자, 남학생도 동참했다. 이번에도 나는 그의 롱티에 두배의 술과 기도를 담았다.
STOP! 일단 정지!
결국 여학생은 취기 60%정도로 계산을 마치고 나갔다. 남학생은? 혀는 '뫼비우스의 띠'가 됐고, 눈과 다리가 풀려 정신력으로 자기 몸을 지탱하면서 간신히 두발로 가게문을 닫고 나갔다. 그 순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박애주의로 충만한 우리 단골들은 건배를 외쳤다. 예약 파기로 미안해했던 단골손님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나는 남학생의 빈 롱티잔을 치우면서 "주(酒)님이 제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라고 답한 뒤 싱긋 웃었다.
"이 모든 게 '오프더레코드'인 거 아시죠?"
하지만 만약 그 새내기 커플이 정말 잘 된다면, 언젠가는 그날 밤 그 롱티의 비밀을 이야기하며 웃을 수도 있겠다. 그런 날이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