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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프더레코드 May 30. 2019

그날 밤, 롱티의 비밀

아카시아 향기 진동하던 늦은 봄 토요일 저녁에

 금요일 저녁.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투폰으로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 단골은 아니다.


"사장님, 내일 두 명, 창가 자리로 예약되나요?"


"어... 내일 열명 예약이 잡혀 있어서 불편할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괜찮아요. 일곱시 반에서 여덟시 사이에 갈게요"


모르는 번호였지만 목소리는 서른다섯살 박사과정 단골이었다. 데이트하나 보다 싶었다.

커플들이 좋아하는 창가 자리


 다음 날 저녁, 예약이 펑크났다. 열 두명 모임에 세 명 밖에 오지 않았단다. 미안했는지, 그 세 명이 가게로 와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어차피 단골들이라 별로 원망스럽지 않았다. 그리고는 곧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등장했다. 서른다섯살 단골과 목소리만 비슷한 스무살 새내기 커플이었다. 여학생이 두리번거리며 창 밖을 보고 있을 때 예약했던 남학생이 슬그머니 바(bar)로 와서 귓속말을 했다.

"사장님, 맥주 말고 술 맛 많이 안 나면서 슬그머니 취할 수 있는 칵테일 뭐가 있나요?"

아무 생각없이 "롱티"(롱 아일랜드 아이스티)라고 답했다. 흰티에 검은색 마이를 걸친 그 학생은 다시 창가 자리로 가서는 "사장님, 롱티 두 잔이요"라고 말했다. 마치 12년 전부터 롱티를 마셔온 것 처럼.


길쭉한 잔에 무시무시한 도수의 술인 데킬라, 보드카, 바카르디, 드라이진에다 오렌지 리큐르인 트리플섹을 섞은 뒤, 레몬 한 조각을 짜 넣고 나머지를 콜라로 채워 아이스티 맛이 나는 롱티의 알콜 도수는 무려 35도. 전형적 앉은뱅이 술, 그래서 작업주로 널리 쓰인다.


'아... 작업!'


그제서야 나는 그 남학생의 빅픽쳐를 알아챘다. 노래와 노래 사이에 간간히 들려오는 대화를 들어보니 함께 온 여학생과는 '사랑과 우정사이' 어디쯤에 있는 관계였다. 청바지에 흰블라우스를 입은 여학생이 "맛있어"를 연발하며 롱티의 절반을 마셨을 때 개업 단골 커플이 왔고, 테이블 세 개인 가게는 만석이 됐다.


때마침 스피커에선 윤종신의 '오래전 그날'이 흘러나왔다. 그 때문인지 나머지 단골 두 테이블도 이내 스무살 남학생의 의도를 파악한 것 같았다. 자기들끼리 대화는 주고 받지만, 실제 관심은 창가 테이블로 몰려가고 있었다.


'스무살 새내기 둘은 오늘 밤 역사를 창조하는가'


오래지 않아 여학생이 한 잔을 다 비우고, 볼이 달아오른 채 혀가 25%정도 꼬인 상태로 "사장님, 이거 한 잔 더 주세요. 너무 맛있어요"를 외쳤다. 그러자 다른 양쪽 단골들이 약속한 듯 긴 한숨을 내밷았다. "어휴...", "흐음..." 남학생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저두요"라고 했다.


어쩌랴. 손님이 달라고 하시는데, 드려야지. 솔직히 여학생의 두 번째 롱티에 데킬라, 보드카, 바카르디를 부을 때 심적 갈등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일테다. 그러나 정직하게 정량을 투입했다.


스무살이면 고3인 내 아들과 한 살 차이다. 나는 그 여학생의 부모가 된 심정으로 남학생의 롱티를 제조했다. 모든 술을 두 배씩 부어넣었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아니 실제로 기도했다.


내 간절한 마음까지 부어 넣은 남학생의 두 번째 롱티가 절반쯤 남았을 때까지 흐름은 비슷했다. 여학생이 술을 홀짝거리면서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혀가 조금씩 꼬여갔고, 단골들은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어댔다.


하지만 남학생이 화장실을 다녀온 뒤 여학생보다 더 꼬인 혀로 주절주절 이야기를 시작하자 단골들의 절망의 한숨은 안도의 한숨으로 바뀌었다. 여학생이 롱티 한 잔을 더 주문하자, 남학생도 동참했다. 이번에도 나는 그의 롱티에 두배의 술과 기도를 담았다.

STOP! 일단 정지!


결국 여학생은 취기 60%정도로 계산을 마치고 나갔다. 남학생은? 혀는 '뫼비우스의 띠'가 됐고, 눈과 다리가 풀려 정신력으로 자기 몸을 지탱하면서 간신히 두발로 가게문을 닫고 나갔다. 그 순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박애주의로 충만한 우리 단골들은 건배를 외쳤다. 예약 파기로 미안해했던 단골손님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나는 남학생의 빈 롱티잔을 치우면서 "주(酒)님이 제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라고 답한 뒤 싱긋 웃었다.


"이 모든 게 '오프더레코드'인 거 아시죠?"


하지만 만약 그 새내기 커플이 정말 잘 된다면, 언젠가는 그날 밤 그 롱티의 비밀을 이야기하며 웃을 수도 있겠다. 그런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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