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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프더레코드 Jun 05. 2019

쉽게 읽혀진 詩

세 번째 동경 방문기 1

2019/04/20~22


도쿄 방문은 이번이 세 번째.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었다.
이전 두 번은 모두 출장이었던 반면 이번엔 순수한 관광.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었고, 그래서 충분했다.


예전부터 일본의 대학을 가 보고 싶었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궁금했고, 일본 대학생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마침 도쿄에 계신 선배의 숙소 근처에 동경대 코바마 캠퍼스가 있어서 여행 이틀 째 오전에 산책 다녀왔다.


코바마 캠퍼스에는 동경대의 메인이라고 여겨지는 법대, 의대 등은 없다.


그런데 캠퍼스 내의 건물 배치가 놀랍도록 옛날 서울대 마로니에랑 똑같았다.


나중에 선배의 설명을 들어보니 그럴만 한 것이, 제국주의 시대 일본 내에는 도쿄를 비롯 쿄토, 도호쿠, 규슈, 홋카이도, 오사카, 나고야까지 모두 7개 제대(제국대학)가 설립됐고, 식민지인 조선(경성제대)과 대만(대북제대)에 각각 하나씩 만들어졌다고 했다.


모양이 비슷한 이유는 추정컨데 예전 서울역과 도쿄역의 설계자가 같은 것과 같지 않을까 싶다고

...


개인적으로는 윤동주 시인께서 잠깐 다니셨던 릿쿄대에 가보고 싶었지만 동행자가 출국 전날 밤 4차까지 술을 때려먹고 집에 가는 길에 발목을 접질러서 다음 기회로 미뤘다.


하지만 코바마 캠퍼스를 돌아다니면서 100년 전에 이런 건물을 짓고, 근대 교육을 정착시킨 일본에 왔던 맑은 영혼의 식민지 청년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어렴풋이 추측해 볼 수는 있었다.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42년에 릿쿄대학에 왔다가 교토 도시샤 대학으로 옮겼던 윤동주.
그는 릿쿄대를 다니던 1942년 6월에 '쉽게 쓰여진 시'를 썼다.


지금까지 교과서, 참고서, 선생님들은
이 시 가운데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는 구절을 대체로 식민지 조국, 전쟁 동원이 시작되는 긴박한 상황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대학 수업을 듣는 자신에 대한 성찰 내지는 답답함 등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이번에 도쿄를 가서 느낀 점은 이같은 해석이 너무 평면적이지 않냐는 것. 근대화가 숨가쁘게 진행 중인 시기에 사회 전 영역의 기초이면서 필수 학문인 영문학과 교수가, 그것도 선교사가 세워 영문학 명문인 릿쿄대의 교수가, 단순히 늙었다는 이유로 현실과 동떨어진 강의를 했을까? 글쎄...


오히려 청년 윤동주는 늙은 교수가 하는 이야기가 워낙 중요하고 의미있어서 비애를 느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민지 조국의 현실은 캄캄한데 전쟁 준비에 여념없는 일제의 대학에서는 수준높은 강의가 이어지고. 지하 그룹 독립운동에 발을 담그고 있으나 해방은 멀어 보이는데, 그래도 언제일지 모를 해방 조국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수업을 빼먹을 수 없는(게다가 부모님이 피땀흘려 번 돈으로 등록금까지 냈으니...) 식민지 청년의 복잡다단한 심정적 갈등. 쉽게 쓰여진 시에는 이런 심상이 담긴 게 아니었을까.


뭐, 시의 해석은 다양할 수 있으니까. 내 생각은 그렇다는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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