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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프더레코드 Jan 07. 2020

<서평>나쁜기자들의 위키피디아

-강병철 지음 - 우리 사회를 망치는 뉴스의 언어들에 대하여

 1998년 대학 입학 직후 만났던 95학번 복학생 선배는 이런 말을 했다.

 "예전에는 이맘때 학과사무실에 회사 입사 지원서가 막 쌓여 있었거든, 근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네. 나 1학년 때는 선배들이 '야 너 그렇게 공부 안 하고 놀면 나중에 증권사 같은 데 밖에 안 받아 준다'라고 했거든..."

 놀면 가는 곳이 증권사라니... 뭐 당시에 증권사를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지만, 어쨌든 청년들 취업이 갑자기 어려워졌음을 방증하는 장면이었다.


 청년 취업난이 우리 사회의 주요 화두로 떠오른 건 1997년 IMF 외환위기 직후부터다. 하지만 당시에는 요즘처럼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년들을 지원하거나, 그들이 겪는 어려움이 담론화되지 않았다. 당시 국가의 지원은 기술 및 직업교육 등 간접 지원이 주를 이뤘다. 청년 취업난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은 '나라 경제가 어려우니 어쩔 수 없지. 개개인이 열심히 노력해서 뚫어야지' 정도였다. 경제성장률이 매년 10%에 육박했던 시절(개인적으로 이런 시절을  '손자병법의 시대'라 부른다. 80년대 고도성장기 샐러리맨의 애환을 담은 KBS 드라마 손자병법으로 당시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까?)과 비교하면 개인에게 원인을 찾을 수 없는 현상이었지만 그 해결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몫이었다.


 20대 중후반 청년층의 취업 문제가 지금과 같이 전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후반부터다. 2007년 1월 '88만 원 세대'라는 책이 나오고 비슷한 시기에  '청년실업'이라는 단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실업'이라 하면 애초에 있었던 직업을 잃었다는 뜻일 텐데, 한 번도 직업을 가져보지 못했던 청년에게 실업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을 어느샌가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 취업이 힘들어서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라는 '삼포세대'라는 말도 2011년(경향신문 기획기사에서 처음 사용) 등장했고, 이어 'N 포 세대'로 확대 재생산됐다.


 이전에도 이미 있었던 청년 취업난을 2000년대 후반부터 갑자기 절박한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마침내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에게 직접 돈을 쥐여주기까지 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이 시행되는 걸 보면 개인이 고군분투 각개격파하며 취업전쟁을 치러냈던 직전 세대의 입장에서 조금은 억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가 이전까지는 무관심하거나 외면했던 취준생들을 따뜻하게 보듬어야 한다는 덕목을 왜 2000년대 후반부터 갑자기 보편화한 것일까.


 이런 의문에 대해 '나쁜기자들의 위키피디아'(강병철 지음)라는 책은 답을 바로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 즉 방법론을 알려주고 있었다. 기자인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 어느 순간 스리슬쩍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는 '포퓰리즘', '시위꾼', '코리아패싱', '귀족노조', '묻지 마 범죄', '시장 질서', '종북', '적폐' 등등 뉴스 언어의 기원을 찾고, 그 언어에 도사리고 있는 음모를 밝혀낸다. 이어 담론 형성에 미치는 영향과 현실에 반영된 사례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시장 질서...


 그러나 최근 이 표현(시장 질서)은 지극히 자의적이고 편의에 따라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큰 변화의 시기마다 시장 질서에 대한 고민이 집중적으로 이뤄졌고 그 결과 이념 지향성에 따른 기본 입장들이 대략 정리되면서 이 단어를 손쉽게 상대 진영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처럼 써먹는 것이다. 이제 언론은 물론 정치권, 재계, 산업계 등에서 보수는 보수 대로 진보는 진보대로 또 기업은 기업대로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심지어 영화계에서 모 외국 영화가 어떤 요일에 개봉을 했느냐를 두고 '시장 질서 훼손'을 운운한 기사까지 내보내는 실정이다. 이 정도면 기자나 업계 특정 인물의 마음속에 있는 질서가 곧 시장 질서라고 주장하는 수준이 아닐까?

 국민들은 언론이 시장 질서를 운운할 때마다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지금 이 기사에서 말하는 시장 질서는 누구를 위한 질서인가. 그 질서는 국민을 위한 질서인가 아니면 재벌만을 위한 질서인가. 이 질서 안에서 흙 수저로 태어난 나와 재벌 2, 3세가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을까. 반대로 정부가 규제를 할 때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 정책은 경제 주체로서 내가 더 자유롭고 공정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가. 별 도움이 되지 않거나 오히려 방해가 된다면 우리는 이를 단호히 거부할 수 있다. 백종원 대표의 설루션이 골목 상권이 아니라 백 대표 자신이나 특정 관계자들을 위한 것이라면 점주들이 그의 말을 들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개념화, 추상화를 거친 언어는 이미 그 탄생 과정에서 일정한 방향성을 갖기 마련이다. 저자는 기자의 날카롭고 폭넓은 시각으로 접근해 뉴스 언어 생산자가 숨기고 싶었던 그 비밀을 폭로하고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기존에는 지나쳤던 프레임과 담론의 중층구조를 알게 됨으로써 뉴스를 비판적 시각으로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더 정확하고 적나라한 현실과 마주할 수 있음을 어느 순간 느끼게 된다.


 그래서, 2000년대 후반에 청년실업 문제가 본격적으로 부각된 원인은 무엇일까. 당시 한국 사회의 정치 경제적 주도세력인 베이비부머(1955년~1963년생)의 자녀 세대(1980년대 중후반 출생)가 본격적으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언론사 데스크인 부장, 차장급들이 대부분 베이비부머였고, 현장 고참급인 기자들 역시 이른바 86세대로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취업은 어렵지 않았던 경험을 공유한 동일 '코호트'였다.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 "잘 키운 딸 하나 열아들 안 부럽다"라는 구호 아래 1자녀 혹은 2자녀를 위해 청춘을 바치고 있던 이들이 보기에 자녀가 4년제 대학을 나오고, 학점도 좋은데 취직이 안 되는 것이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청년실업 문제의 심각성이 부각되고, 시간이 흘러 국가와 지자체 차원의 구체적 지원까지 이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남는 의문 하나. IMF 직후인 1998년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던 세대들에 대한 동정론이 그 직후 세대보다 크지 않았던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한 분석... 혹은 구라는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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