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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느긋 Mar 12. 2024

겨울 나라의 알사탕들

1월의 사슴탐사

2024년의 시작은 겨울 나라로 떠나기로 했다. 1월에는 삿포로, 2월에는 아이슬란드. 나는 따뜻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주로 해외여행은 그런 따뜻함으로만 가득 차 있었으므로, 이건 나답지 않은 여행 계획이었다.


시간이 많이 있을 때는 원래 하지 않던 일을 새롭게 해보게 된다. 겨울 나라를 여행하는 것 또한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삿포로 여행을 계획하며 친구와 나는 이런 장면을 꿈꿨다.


하얀 눈이 푹푹 내리고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내 발목까지 눈이 덮이는 거야. 그러면 미끄러지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한 걸음을 더 내딛겠지. 어둠이 짙게 내린 밤에는 노란 조명이 오롯한 이자카야에 들어가서 어묵과 생맥주를 원하는 만큼 홀짝인 다음 고요한 눈길을 넘어지지 않으려 조심하며 걸어야지. 내 속은 뜨끈한 국물과 약간의 취기로 얼큰해지고 바깥의 공기는 차가워서 서로 다른 두 개의 온도가 비로소 맞닿았을 때 나오는 하얀 입김을 바라보면서 빨개진 코끝을 훌쩍이며 숙소로 돌아가는 거야. 숙소에 돌아와서는 입가심으로 하이볼이나 슈하이를 한 캔 마시면서 창밖으로 떨어지는 굵직한 눈송이를 구경하자.


이러한 상상이 두터워질수록 겨울 나라에 대한 환상은 더해져만 갔다.



해가 바뀐 연초의 삿포로는 상상만큼이나 조용했다.


하얀 눈이 길가에 쌓여 있었고 길은 얼어 빙판이었다. 발이 푹 파묻힐 정도도 아니었고, 예년보다 따뜻했던지 비 같은 눈이 내리기도 했다. 우산을 펼쳤다가 그냥 눈비를 맞으며 걷기도 했다. 새해를 맞이하며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구글 지도를 보며 별을 찍어둔 가게들은 ‘야스미休み’라는 푯말을 걸어둔 채 고요했다. 닫힌 가게 문을 한참 보다가 울적한 마음을 추스르고 단단하게 언 빙판을 미끄러지지 않으려 조심하며 걸었다.

반듯하게 구획된 스스키노 거리는 몇 번이나 돌고 또 돌다 보면 길은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런 기분에 휩싸여 고개를 들면 위스키를 든 니카상이 우리를 보며 네가 서 있는 곳은 바로 여기라고 알려주었다. 니카상을 좌표 삼아 나의 길을 찾다가, 이자카야를 여러 군데 돌고 비로소 어느 한 곳에 자리 잡고는 가장 먼저 나온 삶은 풋콩을 씹어먹었다. 고대했던 어묵바에는 가지 못했지만 도리야키와 꼬치튀김 집에 갔고, 재즈바와 파르페에 곁들이는 위스키로 공백을 채웠다. 따끈해진 채로 나와서 다시 언 길을 친구들에게 의지해 조심조심 걸었다.


오타루에 다녀온 날에는 저녁식사로 예약해 둔 징기스칸을 먹으러 가기 전에 일행은 각자의 일정을 보냈고 친구와 나는 저녁 식사 전에 생맥주 딱 한 잔만 해야지 싶어 가게를 찾아 나섰다. 야스미休み와 만세키満席를 오가며 여러 번 허탕을 치던 중, 친구가 한 집을 가리켰다.


“저긴 뭘까.”


글자 하나를 알아본 나는 환희에 차서 외쳤다.


“이 글자(串)면 무조건 꼬치집이야, 들어가자.”


우연히 들어간 곳은 튀김꼬치 집이었다. 하얀 모자와 하얀 옷을 갖춰 입은 나이 든 주방장이 천천히 요리를 만들고 있었고 퇴근길 직장인들이 바 자리에 앉아 곁들임 음식으로 나온 채 썬 양배추를 씹고 있었다. 벽에 걸린 티브이에서는 러브하우스를 닮은 집수리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양송이튀김과 굴튀김을 시킨 뒤 생맥주를 한 잔씩 마시고 나왔다. 일본 여행을 할 때는 ‘나마비루 히토츠’ 하나만 알면 된다던 누군가의 조언과 ‘추운 겨울날 해 질 녘에 단골 레스토랑에 가서 삿포로 맥주와 굴튀김을 주문한다’는 하루키가 생각나는 저녁이었다. 그도 이런 기분이었을 테지.



따끈한 저녁을 먹고 나온 나의 든든한 속내와 겹겹이 차가워지는 바깥의 온도 차가 맞닿는 이런 이른 밤, ‘어깨 언저리에서 어렴풋하게. 굴튀김의 조용한 격려’를 느끼면서 걸어가는 기분은 여행 전 상상했던 장면 중 하나와 꽤 흡사했다.


겨울 나라에서 돌아온 후 나는 오타루에서 사 온 술사탕을 한 알씩 아껴 먹었다. 조그만 사탕은 얇은 설탕막이 치아에 닿는 순간 표면은 파스스 부서져 내리면서, 그 안에서 흐르는 소량의 위스키 향기가 혀끝에 느껴진다. 한 통에 여러 가지 맛이 있는데 각각의 맛을 느끼려면 꽤 집중해야 한다. 녹아 내리는 순간 흡 하며 코로 향을 맡아야 한다. 술은 술인데 술은 아닌 것만 같다.

사실 삿포로 여행에선 기대했던 만큼의 눈이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와 친구들은 옆구리에 팔을 꼭 붙인 채 미끄러지지 않으려 서로를 붙잡아주었다. 여름 나라에선 보통 제각각 떨어진 채 팔을 휘적이며 걸어가니까, 이 거리감이 낯설으면서도 퍽 다정했다. 내 앞에서 종종걸음 하며 걷던 일행들의 뒷모습이 자주 떠오른다. 방한모자에 감싸인 뒷모습들은 알사탕처럼 동그랗고 귀여웠다. 알사탕들을 따라서 미로 같던 스스키노 거리를 하염없이 배회하던 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겨울 나라의 오롯한 풍경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한국에선 주말에 발이 푹푹 빠질 듯한 폭설이 내렸다. 눈의 나라에서보다 더 큰 눈이 쌓이는 풍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평소의 여행과는 다르지만 그럼에도 꼭 같았던 몇몇의 장면들이 생각났다. 그 자체로 새로운 여행이었다는 자각. 새로운 장면들 속에 나를 그저 데려다 두었던 날들과 어떤 엇박자를 느끼며 토끼처럼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떠 보던 날들.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는 항상 그런 장면들 때문에 미소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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