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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댓츠올 Dec 26. 2023

무르익는 계절

9월과 10월의 늦은 사슴탐사

9월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이다.

'구월'이라고 입을 모아 소리 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생일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더라도 이 흐릿한 계절을 사랑했을까. 타는 듯한 여름도 무르익은 가을도 아닌 어딘가 어정쩡한 구월이 나는 늘 흐릿하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아닌 달 같기도 했다. 실제로 구월은 늘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있었다. 그런 구월이 마치 내 정체성인 것 같았다. 어느 해인가는 구월을 매일매일 기록해야겠단 생각에 정말 그렇게 했다. 그러고 나니 매해 습관처럼 그런 의식을 치렀는데 이 역시 구월이 너무 흐리다는 생각에 나 혼자 그 테두리를 긁어 선명하게 만들고자 했던 건 아니었나 싶다. 


올해 구월은 헐겁게 지나갔다. 좋은 날들도 많았지만 좋지 않은 날들이 더 많았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생각한 적이 많았고 주위를 더 부드럽게 살피지 못한 일을 후회했다. 자주 마음이 어두워진 채로 구월을 살았다. 지나간 달을 붙잡듯이 겨우겨우 느리게 이어가던 지난달의 일기를 더 이상 쓰지 못한 것도 구월이 기점이었다. 별개로 작업실에서의 나날은 아주 차분하고 집중력 있게 보낼 수 있었다. 구월 말쯤 여행을 계획하고 있어서 그전까지 빠듯하게 살아야지 하는 다짐이 나를 예민하게 만들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구월 말에 짧은 여행을 다녀오고 그곳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왔다. 지난 유월에 한 차례 다녀온 도쿄를 다시 한번 가는 거라서 그때보다 기간은 짧았지만 마음만은 여유로웠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날이었나, 일정 중 하루에 일행과 미쓰코시마에 쪽 야외 카페에서 차와 조각케이크를 먹으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마지막날이라 이것저것 쇼핑을 해야 했는데 무얼 사야 할지도 모르겠고 생각 정리가 좀 필요해서 차나 한 잔 하자고 앉은 것이다. 머리를 비운 채 지나가던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아무 이야기나 떠드는 게 좋았다. 평소의 나라면 좀 더 바쁘게 쏘다녀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계속 그렇게 있었다. 나와는 달리 아직은 일정이 더 남아 있는 일행이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괜찮겠냐고 물었고 나는 좀 더 그러고 싶다고 대답했다. 드물게 맑은 날에 하늘엔 구름 한 점이 없었고 왜 이 나라는 내가 떠나는 전날에만 이렇게 맑은 거냐며 우스갯소리도 했다.


파란 하늘이 노랗게 저물어가고 저녁이 선명해질 무렵에 일어나 숙소를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걷는 길도 좋았다. 아무 생각이 없는 채로 멍하게 다음 계획도 없는 나와 동행했던 일행이 다음에 가야 할 곳을 인도해 주어 너무 고마웠다.


구월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가득이었다. 아무도 어떻게 할 방도가 없는 일에 대해서 자꾸만 '왜?' 하고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으려 했다. 그대로 두면 간직해두어야 할 감정이 날아가버릴까 봐 자주자주 멈춰 섰다. 그러고 돌아와 다시 시월을 맞이했을 때는 축축했던 마음이 잘 마른빨래처럼 뽀송하고 동시에 건조해져 있었다.


구월 말 타국에서 가라앉은 감정들을 시월 초 남쪽의 바다까지 품고 갔다가 시월 말 강원도의 깊은 산에서 무섭도록 진해진 단풍을 보면서 날렸다. 시원한 바람이 폐부에 가득 차던 순간, 흐릿하다고 생각한 구월 동안 짙어져 간 것들을 목도했다. 어쩌면 나는 이런 장면이 간절했던 것 같다.


주어와 목적어와 서술어가 명확하지 않은 글을 싫어한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꺼내지도 못하면서 애매하게 뭉뚱그리는 건 그저 쏟아내기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정도로만 뱉어내야 하는 이야기도 있다는 것을, 뱉어내지라도 않으면 안에서 굳어서 떼어내기조차 힘들어진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낀다. 결국 나라는 사람은 미리 가늠할줄 아는 건 하나도 없고 살아가면서 직접 그 시간을 겪어봐야만 뒤늦게 깨닫고야 만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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