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스페리아와 아니마: 이미지, 스펙터클, 판타스마고리아의 감각 세계
“톰 요크, Kid A와 안티테제의 미학으로부터”
라디오헤드의 디스코그라피를 거슬러 올라, 잠깐만 2000년으로 돌아가 보자. <Kid A>와 함께 새천년을 시작한 록 팬들의 심리적 아노미란 가히 어마어마한 것이었을 테다. <Kid A>가 발매되기 불과 3년 전, 라디오헤드는 세기말까지 숨 쉬던 록 음악의 역사가 뱉어낸 문법들(얼터너티브, 사이키델릭, 프로그레시브)을 종합하고 정리하는 작업에 매진했었다. 곡의 뼈대를 만드는 리프들,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듯, 반듯한 집처럼 구축되어가는 곡의 장대한 구조, 그리고 그 위에 정동을 덧입히는 전기 기타의 뚜렷하고도 충동적인 춤사위. 이것들은 지난 오십 년간 로커들이 말하고 설치고자 의존해왔던, 발화의 절대적인 방법론이었다. 1997년작 <OK Computer>에서 라디오헤드는 이를 적재적소에 정갈히 배치해 나가며, 물화된 이미지들이 고도로 축적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경험되는 인간소외를 거대한 서사(혹은 ‘매니페스토’)로 풀어냈던 것이다. 그런데 <Kid A>에서는 이것들의 대부분이 폐기된다. 기타-베이스-드럼의 정식을 따르는 그룹사운드는, 어디론가 숨어버린 뒤에 간간히 자락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경합하는 소리들은 정말로 난데없다. 텅 빈 방 한가운데서 죽은 듯 살아난 듯 깜빡이는 앰비언트 전자 리듬악기, 종잡을 수 없는 불협화음을 쏟아내는 프리 재즈 오케스트라, 그리고 우울과 신경증 사이를 종횡하는 톰 요크의 날 선 목소리는, 분명히 음악을 구성하지만 그 어떤 음악도 되지 않으려는 것 같다. 어떤 정합성을 가지고 구축되었던 ‘보편적인 것’은, 이제 길을 잃은 듯 정처 없이 헤맨다. 여기에서 톰 요크와 친구들은, <매트릭스 The Matrix>나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들, 혹은 겉보기에는 격정적 흥분으로 가득 찬 듯한 인더스트리얼이나 테크노 음악이 지시하던 세기말의 불안을 혼자서 모조리 들이마시다가 속이 썩어 문드러진 것만 같다. 우리 모두는 아마 이 시기부터 짐작하고 있었으리라. 톰 요크와 라디오헤드는 더 이상 대중음악가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라디오헤드와 선장 톰 요크는, 자기 파괴와 창조의 과정을 반복하는 변증법적 방식으로 ‘라디오헤디즘’이라 일컬어지는 자신들의 음악 세계를 확장해 나갔다. 가령 데뷔 앨범 <Pablo Honey>와 히트 싱글 ‘Creep’에서 그런지의 문법을 통해 찌질한 자기 연민을 늘어놓던 이 ‘애송이’들은, 후속 앨범 <The Bends>와 <OK Computer>를 작업해 나가며 자기들의 단선적 문법을 폐기하고 록 음악의 총체적 형식을 직조해냈던 것이다. 개인적 우울에 매몰되던 것으로부터 탈출해 보편적 우울을 담론화해 낸 것도, 이 시기 라디오헤드에게서 눈여겨볼 만한 점이다. 한편으로, 라디오헤드의 커리어 속에서 대립하던 상이한 형식과 메시지들은, <In Rainbows>(2007)와 같은 데에서는 화해를 이루고 합쳐지며 새롭고 미래적인 전망으로 재탄생한다.
라디오헤드가 전략으로 삼았던 ‘안티테제의 미학’은, ‘안티-그런지’와 ‘안티-자기 연민’에서부터 출발해 <Kid A>에 이르러 ‘안티-팝(대중음악)’, ‘안티-록’과 ‘안티-거대 서사(모더니티?)’로 재구축되었다. 새천년의 문턱 <Kid A>에서 록과 대중음악에 망치를 날렸던 라디오헤드는, 대중음악가(혹은 록 스타)의 지위를 포기하고 개척자로서의 입지를 획득했다. 에이펙스 트윈을 비롯한 몇몇 스노비스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디오헤드는 너무 대중적’이라는 볼멘소리를 했지만, 라디오헤드는 <Kid A>를 들고 나왔던 20년 전부터 지금까지, 정치적-심미적 아방가르드의 전선을 올곧게 지켜오고 있다.
“스펙터클 공장이 된 뮤지션”
그런데 요즘의 톰 요크는, 단순히 ‘대중음악가’의 지위뿐만 아니라, 아예 ‘음악가’, ‘뮤지션’이라는 이름표 자체를 폐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제 톰 요크의 ‘안티테제’는 ‘안티-팝’이나 ‘안티-록’을 넘어서 ‘안티-뮤직’이 된 것만 같다. 대관절 이게 무슨 얘기인지 궁금하다면, 톰 요크의 근작들을 들여다보자.
원래 톰 요크는 음악을 문법으로 ‘나’의 소외를 이야기하던 발화자였다. 가령 <OK Computer>의 수록곡 “Karma Police”의 가사 “For a minute there, I lost myself (거기에 잠시 머무르는 동안, ‘나’는 나를 잃어버리고 말았네)“는 ‘내’가 유적 자아로부터 소외되었음을 폭로하는 선언이었다. <Kid A>의 수록곡 “How to Disappear Completely”의 가사 “I’m not here, this isn’t happening(‘나’는 여기에 없어, 이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에서 소외적 상황에서 ‘회피’라는 행동을 수행하는 ‘주체’가 되는 것도, “Idioteque”에서 “Here I’m alive, everything all of the time (‘나’는 여기에 살아있다네, 그 모든 시간 동안)”라는 선언을 통해 온 시대를 살아내며 이것의 증언자가 되기를 자처하는 것도 바로 ‘I(나)’다.
그런데 라디오헤드와 톰 요크의 시간이 흐를수록, 작품 속의 그들은 ‘나’로서 등장하지 않는다. 어떤 행위를 수행하는 주체로서의 ‘나’도, 혹은 객체로 전락한 ‘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 사람이 아닌 스크린이다. 스크린이 하는 일은, 우리에게 닿을 수 없는 먼발치에서 분절되는 상황들을 관조(혹은 관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라디오헤드가 과거와의 혁명적 단절을 이뤄내었던 <Kid A>에서조차도, 그들의 언어는 여전히 음악이었다. 가령 라디오헤드는 <Kid A>에서 그 어떤 곡도 싱글 컷(정규 앨범 수록곡 중 일부를 따로 뽑아 싱글 – 남한의 음악시장에서는 소위 ‘타이틀 곡’과 유사한 개념 – 로 발매하는 일)을 하지 않았는데, 따라서 <Kid A>의 음악들은 뮤직비디오로 제작되지도 않았다. 오늘날의 대중음악시장은 물화된 이미지의 교환만이 이루어지는 곳인데, 청중과 오로지 청각만을 매개로 관계 맺었던 <Kid A>의 전략은 어떤 측면에서 이러한 상황을 거꾸로 뒤집는 시장개입적, 적극적 실천으로 표상되었다.
그런데 요즈음의 톰 요크, 요즈음의 라디오헤드는 더 이상 ‘음악’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이제 그들은 스쳐 지나가는 시각과 청각의 파편들을 얼기설기 엮어, 그것들을 어떤 이미지적 체험으로 재구축하고 이것을 불특정 다수에게 정처-목적지 없이 흩뿌리는 상황주의 실천가들에 가깝다. 요컨대 라디오헤디즘의 기획들(라디오헤드, 톰 요크의 솔로 활동, 그리고 그의 사이드 프로젝트 ‘아톰스 포 피스’까지)은, 록 밴드들이라기보다는 스펙터클 공장이 된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저 막대기 위의 달일 뿐”
가령 라디오헤드의 2011년작 <King of the Limbs>에 실렸던 싱글 “Lotus Flower”의 뮤직비디오를 보자. 톰 요크는 연꽃이 된 것처럼 내내 춤을 춘다. 그런데 이 춤은 그것의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살아있으며 생각하는 것으로서의 생동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여기에서 톰 요크는 발작하는 기계에 가깝다. 내 것으로서의 테제는 폐기되었고, 톰 요크가 ‘나’로서 원하고 주장하는 것은 그저 “막대기 위에 달린 달(Lotus Flower의 가사 – All I want is a moon upon a stick)”이다. 그는 내내 흑백의 공간 속에서 휘청이며, 연꽃을 위시로 한 은유의 장막 뒤편을 거닐 뿐이다. 근작 “Daydreaming”(2016)의 뮤직비디오는 또 어떤가? 여기에서는 생활세계의 여러 장면들이 제시되는데, 수많은 문들을 열고 닫으며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듯 보이는 톰 요크는 사실 그 세계들을 응시하며 근저에서 표류할 뿐이다. 이는 생활세계를 살아가는 그 어떤 이들도, 문을 열어젖히고 자신들의 세계로 들어왔다 나가는 톰 요크를 인식하지 못하는 데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
‘실천하지 않음’으로 전화된 ‘실천’. 그렇다. ‘실천하지 않음’으로 전화된 ‘실천’. 여기에서는, 멜빌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 Bartleby, the Scrivener」에 등장하는 대사 “I would prefer not to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이는 어떤 측면에서 역설적 실천성을 내포하는 것 같다. 어쨌거나 테제로서의 음악은 폐기되었고, 이를 대신하는 것은 표류와 응시의 정처 없는 과정을 통해 축적된 어떤 파편적 인상들이다. 유기적 구조와 결별한 채 단절적으로 자리 잡은 청각의 편린들, 그리고 매 초마다 인식되는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들은 대기 위를 떠돈다. 이것들은 이를 통해 음악이라기보단 이미지, 스펙터클, 판타스마고리아에 가까운 형태의 ‘체험’으로 구축된다. <Tomorrow’s Modern Boxes>(2014)에서 영화 <서스페리아 Suspiria>(2018)의 OST, 그리고 며칠 전 발매된 <Anima>까지, 톰 요크의 최근 행보는 전적으로 이러한 기획 위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것 같다. 특히 <서스페리아>의 스코어, 그리고 넷플릭스를 통해 선보인 폴 토머스 앤더슨의 단편영화 <아니마 Anima>와 함께 발매된 <Anima>는, 영상 및 이미지들과 얼개를 이루며 음악예술이라는 부분적 방법론으로부터 탈출하고 지각적 경험의 총체적 세계를 지향해 나가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들여다보기: 서스페리아, 그리고 아니마"
우선 <서스페리아>를 보자. 2018년에 개봉한 <서스페리아>는, 1977년에 이탈리아에서 개봉하여 컬트적 명성을 얻은 공포 영화 원작 <서스페리아 1977 Suspiria>을 루카 구아다니노가 재해석한 것이다. <서스페리아 1977>이 이성적 구조는 배제한 채 오로지 감각에 의존하여 영화적 경험을 구축해 간 정동의 산물이었다면,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는 낡은 세계의 미학을 징벌하는 정치적 바름으로써의 영화미학이 되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스페리아>는 원작의 연장선상에서 정동과 관능의 은유라는 방법론으로 대항 폭력을 구축해간다. 그리고 이를 통해 완성된 안티 파시즘의 어떤 (반) 미학적 정점은, ‘바더 마인호프 그룹’ 등 적군파의 폭력 투쟁이 위시하는 시대의 파편과 ‘서스페리아’ 마녀 이야기를 스크린 안팎에서 표류하게 만든 상황주의적 연출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톰 요크는 철저히 이러한 상황주의적 연출과 영화적 경험을 위한 도구 중 하나로서만 존재한다. 가령 “Suspirium”이나 “The Hooks”와 같이 영화 초입부에 배치된 곡들은, 마치 스티브 라이히의 “Violin Phase”나 짐 자무쉬의 영화 <패터슨 Patterson>처럼 생활세계를 직선이 아닌 나선으로 조망하는데, 모순과 균열은 기저에서부터 출발해 뱅글뱅글 맴돌며, 공중을 향해 점차 큰 원을 그려간다. 인식할 수 없던 모순과 균열이 우리의 지각을 천천히 잠식해가다 수면 위로 드러난 시점에, 그것은 시커먼 홍수처럼 폭주하는 이미지로 전화한다. 가령 “Volk(국민)”에서 “Suspirium Finale” 너머 종반부에 이르기까지, 지각된 균열 위에서 죄를 징벌하는 과정은 강렬히 명멸하는 적광의 인상들과 그로테스크한 음압, 그리고 나선 운동의 도돌이표로 표상된다.
그리고 <아니마>. 본래 라틴어로 아니마(anima)는 빛을 가리키는 단어다. 톰 요크 말마따나 우연히 자신의 노트에서 발견해 낸 이탈리아어 단어 아니마는 영혼(soul)을 의미한다. 한편 칼 구스타프 융의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제시된 개념으로서의 ‘아니마’는, 남성이 가진 무의식의 여성성을 가리킨다. (여기서 젠더의 위치가 거꾸로 뒤집힌 형태는 ‘아니무스(animus)’다.) 프로이트에서 융으로 건너오는 초기의 정신분석학에서, 젠더와 디스포리아(사회적으로 지정된 젠더 정체성의 모순에 대한 부적응과 내적 투쟁)는 이렇게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이분법적이고 원시적인 형태로 조망된다. 하지만 이드(Id)와 무의식이라는 짙은 그림자 아래에서, 아니마는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자기 불화를 비추어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빛이 될 수 있다.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상이한 정체성들이, 그것들의 양립 불가능성으로 인해 투쟁하다, 스스로의 자아를 진전시키는 새로운 양태의 정체성을 구성해갈 ‘헤겔적’ 변증법의 단초가 되는 셈이다.
영화 <아니마> 속에서, 톰 요크는 생활세계 속에 머무르면서도 이와 불화하는 서발턴적 위치에 서 있다. 지하철 속에는 숱한 근대인들이 앉아 있는데 이들과 함께 톰 요크는 마치 신경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발작한다. 다만 다른 이들과 달리, 톰은 근대인들을 ‘환대’(또는 ‘수용’)하는 지하철 개찰구를 넘지 못한다. 그가 근대적 시간을 체화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모든 지각들은 기어서 행군하는 그림자들과 불화하며 발작한다. 그가 화해를 이루는 것은, 자신과 타인의 에로스를 확인하고 관계로 연결되는 시점에서다. 그러나 감정과 관계는 필멸한다. 이것들은 한 가지의 항구적인 형태에 머물 수 없어, 끊임없이 무너지고 새롭게 다시 태어나며 변해 간다. <아니마> 속에서 모든 필멸하는 것들은 내내 흩날린다. 화해도 춤도 그렇다. 끝내 서늘하게 흩날리다 사라진다.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모든 이미지와 체험들 역시도 고정적이거나 항구적일 수 없고, 손에 쥔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린다. <아니마>는 그렇게 새어 나가 사라지는 빛이다. 그래서 <아니마>는 음악도 영화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꿈이거나, 사이키델리아거나, 판타스마고리아다. 그러나 모든 다른 이들처럼 ‘말할 수 없는’ 톰 요크의 꿈 세계는, 핍진성을 가진 판타스마고리아다.
“우리는 정말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닙니다.” - 톰 요크, 스티븐 콜베어 쇼(The Late Show with Stephen Colbert)에서의 인터뷰 중
톰 요크는 7월 28일 새 앨범 <Anima>와 함께 내한했다. 14년도부터 지금까지 톰 요크는 <Tomorrow’s Modern Boxes>를 가지고 투어를 해 왔다. 탈근대적 위치에서 근대성을 몰래 들여다볼 수 있도록 정갈히 넣어둔, 브릴로 상자 같은 앨범이다. 이와 더불어 무대에서 새롭게 선보인 <Anima>는, 관중들에게 공연이라기보다는 마치 렘 수면과 같은 경험을 선사했을 테다. 톰 요크가 공연장에서 “Creep”이나 라디오헤드의 옛날 곡들을 불러 주길 바란다면, 차라리 톰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록 스타 톰 요크는 죽었다. 그렇다면 톰 요크의 현재성은 무엇인지, 그의 새 앨범과 넷플릭스 단편 <아니마>로 직접 확인해보시라.